주간동아 235

2000.05.25

‘동토의 땅’도 변해야 산다?

‘벼랑끝 경제’ 회생 위해 계산된 빗장풀기…정치 분야는 변화 움직임 전혀 없어

  • 입력2005-11-29 11:59: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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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동토의 땅’도 변해야 산다?
    신록이 눈부신 5월 서울.

    5월7일 주방짜오(朱邦造) 중국 외교부 대변인이 서울에 왔다. 이날 웬디 셔먼 미 국무부 자문관도 북-미 미사일협상을 맡고 있는 찰스 카트먼 한반도 평화회담 특사와 함께 김포공항에 내렸다. 주방짜오 대변인은 1일부터 5일까지 평양에 머무르다 하루만에 베이징을 거쳐 서울로 왔고, 셔먼 자문관은 9일 김대중대통령을 만나 정상회담과 관련, 한-미-일 공조문제를 확인한 뒤 북경으로 가서 4자 회담 재개문제 등을 중국과 협의했다. 5월29일에는 모리 요시로 일본 총리가 김대중대통령과 정상회담을 갖는다.

    5월의 평양.

    5월1일, 평양시 노동자들이 5·1절(노동절) 110돌을 맞아 김일성광장에서 야회(夜會)를 가졌다. 조선중앙방송은 이 행사를 이튿날 새벽뉴스 시간에 내보냈다.

    “야회 참가자들은 경애하는 장군님을 높이 모시고 주체의 사회주의 한 길을 따라 혁명의 붉은 기를 더욱 높이 휘날리며 명절의 밤을 즐겼다. 끝없는 행복과 기쁨 속에 진행된 야회는 경애하는 장군님의 영도에 따라 이 땅 위에 사회주의 강성대국을 반드시 일으켜 세울 우리 노동계급의 혁명적 열의를 잘 보여주었다.”



    5월8일에 북한은 호주와 대사급 외교관계를 재개키로 합의하고 양국 대사를 곧 임명할 것이라고 보도했다. 북한은 이탈리아와의 수교에 이어 올해 두번째로 서방국과의 외교관계를 복원했다. 5월11일 북한은 그동안 미뤄오던 ARF(아세안 안보포럼)에 가입신청을 한 것으로 알려졌다.

    남북정상회담이 한달 안으로 다가옴에 따라 서울과 평양, 워싱턴, 도쿄, 베이징의 발걸음이 빨라지고 있다. 이중에서도 관심의 대상은 평양의 움직임이다. 박재규 통일부 장관은 지금 북한 주민들은 남북정상회담을 ‘통일회담‘으로 받아들이는 분위기라고 했다. 북한당국이 남북정상회담을 ‘궁극적으로 통일을 위해서’라고 설명하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아울러 북한 주민들은 ‘이제 잘살 수 있게 됐다’라는 희망을 갖고 있다고 한다.

    이런 현상을 놓고 보면 북한은 변하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본격적인 변화까지는 아니더라도 적어도 변화의 기로에 서 있는 것은 틀림없어 보인다. 북한은 진짜 변하고 있는 것일까.

    주방짜오 중국 외교부 대변인은 서울에서 가진 기자 간담회에서 꽤 의미심장한 발언을 했다.

    “평양에서 북한 외무성 사람들을 만나보니, 북한이 이번 정상회담을 ‘전략적 선택’으로 성사시켰다는 인상을 받았다. 북한 당국자들이 정상회담에 대해 아주 적극적이었다.”

    여기에서 ‘전략적 선택’이란 무엇을 의미하는 것일까.

    북한이 남북대화에 응할 때는 한 가지 원칙이 있다. 그것은 ‘반드시 자기들이 필요할 때 대화에 응한다’는 것이다.

    지금 김정일이 정상회담에 응하는 것은 크게 두 가지 이익이 있기 때문이다. 첫째, 남측의 도움을 빌려 이른 시간 내에 경제를 회생시키는 것이고 둘째, 정상회담을 이용하여 대외관계에서 유리한 입지를 확보하는 것이다. 그런 점에서 남한을 전략적으로 선택한 것으로 볼 수 있다.

    올 초 김정일은 ‘노동신문’ 등의 2000년 신년 공동사설을 통해 3대 국정지표를 내걸었다. ‘사상-총대-과학기술의 중시’다. 사상은 김일성-김정일주의, 총대는 군사력, 과학기술은 생산력(경제)이다. 이중 사상과 총대는 스스로 해결할 문제다. 그러나 경제는 자체의 힘으로 회생이 어렵다.

    북한이 경제회생을 하는 데는 몇 가지 대외문제를 해결해야 한다. 미국이 북한에 대한 경제제재 조치를 해제해 줘야 하고, 이를 위해서는 테러 지원국 명단에서 북한을 제외시켜줘야 한다. 미국은 그렇게 하기 위해 북한이 제네바 협정을 성실히 이행하고, 미사일 개발-수출 등을 중단해 주길 원한다. 하지만 군사력 위축을 바라지 않는 북한으로서는 쉽게 결정할 사안이 아니다.

    또 북한은 일본으로부터 식민지 배상금(50억∼100억 달러)을 받아내고 싶어한다. 그러나 식민지 배상금과 북-일 수교문제는 같이 진행되는 것인데 일본이 미국의 대북한 정책에서 이탈하여 단독으로 수교문제와 배상금 지불문제를 해결해 줄 것 같지 않다는 것이 북한의 관측인 듯하다. 하지만 경제회생문제는 느긋하게 기다릴 상황이 아니다.

    결국 시급한 경제문제를 도와줄 나라는 역대 남한 정부 중에서 가장 북한에 호의적인 김대중 정부라는 계산이 나오는 것이고, 남한 정부를 이용하여 경제회생 문제와 대외관계에서 유리한 입지를 확보하는 문제를 같이 풀어가자는 것이 김정일의 계산인 듯하다. 지금 북한의 변화를 보는 관점도 이러한 구조 속에서 내려다보아야 핵심이 보일 수 있다.

    북한은 지금 내부에서 변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가장 뚜렷한 분야가 경제건설이다. 지난해 김정일은 총 69회의 현지지도를 나갔다. 이중 군부대 방문이 27회, 경제지도가 23회, 기타 19회다. 올해는 총 22회(5월10일 현재) 중 군부대 방문 8회, 경제지도 6회다. 98년 이전과 비교해보면 경제지도 횟수가 현저히 늘었다. 이밖에 농지정리, 고속도로 건설, 광케이블 매설, 수력발전소 건설 등 대규모 사업이 ‘천리마 대진군’의 구호 속에서 진행되고 있다.

    따라서 북한은 적어도 현상적인 측면에서는 과거 남한의 ‘잘살아 보세’ 시대의 초창기와 비슷한 면을 갖고 있는 것 같다. 박정희 전대통령의 개발독재는 그런 점에서 김정일의 벤치마킹 대상으로 일정 부분 유효할 것이다. 김정일이 현대그룹 정주영 명예회장을 만난 자리에서 ‘새마을운동’에 관심을 표명한 것도 그런 맥락일 가능성이 없지 않다. 다만 중요한 것은 ‘사상을 틀어쥐고’, 즉 김정일의 수령독재체제를 끝까지 고수하고, 군사력에 위축이 없는 범위 내에서 경제회생이 이뤄져야 한다는 것이다. 그래야만 김정일로서는 이른바 ‘강성대국’으로 갈 수 있는 것이다.

    물론 자본주의에 기초한 박정희식 개발독재가 북한에 그대로 적용되지는 않을 것이다. 98년 북한은 인민경제계획법을 제정했으나 이는 북한에 투자를 유인하는 ‘대외용’일 뿐, 본격적인 개혁개방으로 나간다는 뜻이 아니다. 아울러 유럽 등지로 이른바 ‘자본주의 연수’를 보내는 것도 본격적으로 자본주의를 받아들이겠다는 것이 아니라 ‘자본주의’를 공부해 김정일 수령주의 체제에 충격을 주지 않는 범위 내에서 어떻게 활용할 것인가 하는 것이 주된 목적이라고 보아야 할 것이다.

    이렇게 볼 때 지금 북한의 변화는 본질적인 변화라기보다는 현상적인 변화, 즉 경제회생을 위한 제한된 범위 내에서의 변화라고 보는 것이 좀더 정확할 것 같다. 북한은 모든 분야에서 사상(정치)이 우선인 만큼 북한의 본질적인 변화는 경제분야에서 찾을 것이 아니라, 정치분야에서 변화를 찾아야 한다. 이를테면 수령주의에 대한 선전활동이 어느 정도 줄었는지, 노동당 내에서의 선거를 민주적인 방식에 따라 진행하는지, 군인의 수가 어느 정도 줄어들었는지 등이 북한의 본질적인 변화를 읽어낼 수 있는 바로미터가 될 수 있다. 북한은 아직 정치분야에서의 변화는 보이지 않고 있다. 그런 점에서 차기 당대회를 유심히 지켜볼 필요가 있을 것이다.

    정상회담 개최 합의문이나 지금까지의 실무회담을 지켜보면 북한은 김일성의 조국통일 3대원칙(자주-평화-민족대단결)의 틀 안에서 정상회담을 해석하고 운영하고 싶어하는 것 같다. 북한 국민에게 이번 정상회담을 통일회담으로 선전하고 있는 것도 ‘희망’을 주어 ‘천리마 대진군’에 힘을 보태고, 북한의 대남 정책 틀 안에서 진행된다는 것을 강조하기 위한 것이라고 볼 수 있다.

    그러나 이번 정상회담은 김대중 정부의 지속적인 햇볕정책의 큰 성과물이며, 남북관계에 중요한 계기가 될 것임은 틀림없다. 어쨌든 북한이 남북대화에 적극적으로 나왔다는 것 자체가 중요한 변화다. 아울러 북한의 경제는 단시일 내에 회생될 수 있는 성질이 아니다. 따라서 우리는 이같은 북한의 작은 변화를 지속적인 변화로 유도하여 그 변화의 폭과 속도에 탄력을 붙여나가는 전략을 계속 펼쳐나가야 할 것이다. 그런 점에서 한-미-일 공조와 특히 대중국 관계에 많은 노력을 기울여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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