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간동아 2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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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고전의 르네상스를 연다”

3대 역사서 한국어 CD로 집대성…해외서도 “문화혁명” 격찬

  • 입력2005-12-20 12:22: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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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국 고전의 르네상스를 연다”
    고려의 정사인 ‘고려사’는 조선 태종∼세조 때 학자들이 집필했다. 1만800여 목각본판에 160여 만 자의 한자로 기록돼 있으므로 역사학자가 아니면 읽을 엄두가 나지 않는다.

    그러나 이젠 사정이 달라졌다. 이 책은 600년의 시간을 뛰어넘어 우리의 PC 속으로 들어왔다. 지난 4월 이 역사책은 현대 한국어로 번역돼 컴퓨터용 CD로 만들어졌다.

    기자는 5월27일 밤 TV에서 ‘역사드라마’를 보던 중 고려 태조 왕건이 나라를 세우는 과정을 고려사에선 어떻게 기록하고 있는지 궁금해졌다. PC를 켜고 몇 번 ‘클릭’했다.

    “정사에 조하기를 건 임금은 사군이 흙 무너지듯 붕괴할 때 구적을 제거하고 점차로 봉강(경계)을 넓혀 나갔더니 해내(국내)를 통합… 병진에 포정전에서 즉위하여 국호를 고려라 하고 개원하여 천수라고 하였다.” 600년 전에 살았던 역사학자로부터 ‘뉴스브리핑’을 받는 느낌이었다. 짧게 정리된 표현에 이어서 왕건의 시시콜콜한 행동, 표정, 말 한 마디 한 마디까지 줄줄 나왔다.

    고려사뿐만이 아니다. 삼국사기와 조선왕조실록 등 한국역사의 3대 정서가 모두 한국어 CD로 제작됐다. 영국 옥스퍼드대학에서 동양사를 연구하는 제임스 루이스 교수는 최근 이 세 가지 CD를 보고 ‘문화혁명’이라고 표현한 바 있다. 루이스 교수는 이 CD들은 앞으로 한국인들의 ‘정신’에 엄청난 ‘충격’을 가져 올 것이라고 예상하기도 했다.



    서울시스템과 동방미디어의 이웅근회장(68). 그가 이 일을 해냈다. 제 나라 역사의 중요성을 아는 사람이라면 지금 누구나 그에게 ‘감사’의 마음을 전하고 있다.

    이회장은 서울대 상대, 미국 미네소타대 경영학 석사 출신으로 60∼70년대 서울대 교수, 공인회계사회 회장을 지냈다. 그가 역사와 인연을 맺은 것은 흔히 ‘CTS’라고 불리는 ‘전자출판에 의한 신문제작시스템’ 사업에 손을 대기 시작하면서부터. 80년대 후반부터 대기업과 치열한 경쟁을 벌인 끝에 전국 신문사의 80%가 이회장 회사(서울시스템)의 제품을 쓰고 있다고 한다.

    신문을 컴퓨터로 편집하는데 사용되는 한글 서체는 워드프로세서 수준보다 훨씬 복잡하고 어렵다. 이회장은 자체 개발한 서체로 방대한 분량의 역사서도 컴퓨터에 저장할 수 있겠다는 확신을 갖게 됐다. 그는 92년 조선왕조실록의 한국어판 CD 제작에 들어갔다. 전문가들은 A4용지로 16만 쪽 분량의 이 작업이 완성되기까진 30년이 걸릴 것이라고 예상했다. 그는 전국의 대학교에서 연인원 10만여 명을 동원했다. 3년만에 완제품이 나왔다. 단순한 번역이 아니라 40만건의 검색항목을 가진 강력한 ‘검색엔진’도 갖췄다. 그는 삼국사기(99년)와 고려사도 같은 방법으로 제작했다. 8년만에 2000년 한국 정사를 마침내 CD에 담은 것이다.

    이회장은 “돈을 벌 목적은 갖고 있지 않다”고 말했다. 돈을 버는 것은 고사하고 그는 이로 인해 파산의 위기를 여러 차례 겪어야 했다. 조선왕조실록 제작에만 50억원이 들어갔다. 그런데 정품은 5년이 지난 지금까지 개수로는 수백여 개, 고작 10억원어치만 팔렸다고 한다. 대신 국내엔 20여 만개의 불법복제본이 유통되고 있다. 삼국사기와 고려사CD도 마찬가지 상황이다.

    서울시스템은 98년 10월 부도를 맞았다. 130억원의 빚더미에 오른 것이다. 그래도 세상은 이 회사를 버리지 않았다. 법원에서 화의신청이 받아들여진 뒤 캐나다에서 500만 달러, 유럽투자펀드에서 1200만 달러의 투자가 들어왔다. 이 회사가 하고 있는 사업의 ‘인류문화사적 가치’를 외국에서 먼저 알아 본 것이다. 서울시스템은 이런 도움을 받아 다시 일어설 수 있었다.

    사상계, 창작과 비평, 고종`-`순종실록 등이 CD롬에 담겼다. 이회장은 최근 역사적 자료를 CD에 담는 작업을 전담하기 위해 서울시스템에서 동방미디어라는 회사를 분리, 독립시켰다. 5월26일 기자가 서울 인사동에 있는 이 사무실을 찾았을 때는 35명의 연구원들이 ‘수수미꾸리’ 같은 한국의 담수어들을 새로 제작되는 동식물도감CD에 담는 작업을 하고 있었다.

    이 회장은 “CD제작사업은 여전히 수익이 나지 않는다. 그러나 한국인 중 누군가는 해야 하는 사업이므로 사비를 털어 이 일을 하고 있다”고 말했다.

    3개 역사서 CD가 한국사회에 끼친 가장 큰 영향은 무엇일까. 이 회사 이남희 연구개발실장은 “역사학을 전공하지 않은 지식인과 일반 대중이 2000년 역사의 원문을 쉽고 풍부하게 접할 수 있게 됐다는 점”이라고 설명했다. 이로부터 파생되는 효과가 이미 사회 곳곳에서 나타나고 있다는 게 이 회사의 견해다. 역사CD가 나온 이후 각 대학 정치학과에서 조선시대 정치학자인 정도준과 송시열을 다룬 박사논문이 등장하기 시작했다. 소설가 김지영씨는 조선왕조실록에서 작품의 모티브를 찾는 데 익숙해졌다고 한다. 동방미디어는 앞으로 조선왕조실록보다 더 방대한 규모인 승정원일지의 국역CD 제작에 나설 계획. 이 기업 덕에 한국은 기술적 문제로 고서CD 제작엔 엄두도 못내고 있는 일본보다 훨씬 앞서가고 있다.

    “뮤지컬 명성황후의 세계적 반향에서 보듯 한국의 고전엔 전 세계에 영향을 줄 수 있는 예술창작, 대중문화, 인문학, 자연과학의 소재가 풍부하게 녹아 있다.” 이회장은 “소수의 역사학자가 독점하던 고전을 이제 대중이 공유하기 시작했다. 한국 고전의 ‘르네상스’시대가 열리길 기대한다”고 말했다. 棟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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