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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인 오은 의 vitamin 詩

책은 맥주처럼 시원하니까

책은 맥주처럼 시원하니까

책은 맥주처럼 시원하니까
평일의 독서

조금도 독창적이고 싶지 않은 하루야.

오늘의 어둠은 어제의 어둠처럼 혹은

백 년 후의 어둠처럼 펼쳐지고

나는 다만 읽는 자로서 당신을 바라보네.



맥주는 정말 달력 속 맥주처럼 시원하고

꼬치에 꿰인 양은 한 번도 매애매애 울지 않아.

고백 없는 고백록의 금빛 장정처럼

내용이 사라진 중세의 신비한 금서처럼

당신의 페이지는 당신을 기록하지 않지.

당신이 내게 밑줄을 긋는다면

나는 온순한 낱장처럼 활짝 벌어져

끓어오르는 사막의 한가운데를 펼칠 수도.

오늘 나를 돌아 나가는 피는 제법 피처럼 붉고

시시각각 식어가지만.

당신은. 나는.

오늘의 양고기와 내일의 후회에 대해

새벽 한 시 무심히 터진 울음에 대해

서로 다른 길 위에서.

정말이지, 오늘은 한 치의 오차도 없는 평행선의 날.

밤의 페이지가 천천히 넘겨지자

한 권의 책이 스르르 쓰러지듯

내 눈동자 밖의 당신이

잠시, 흔들렸을 뿐.

몸 안을 가득 채운 글자들이 쏟아지려다 말았을 뿐.

만년필에서 실수로 떨어진 한 방울 잉크처럼

당신은. 나는.

―김경인 ‘평일의 독서’ (‘얘들아, 모든 이름을 사랑해’ 민음사, 2012 중에서)

책은 맥주처럼 시원하니까

너는 언제 책을 읽니. 대체 언제 책을 읽는 거니. 나는 말한다. 책은 시간 나면 읽는 게 아니더라고. 한가할 때만 독서하면 일주일 내내 아마 한 자도 읽기 어려울걸? 억지로라도 시간 내서 읽어야 하는 게 바로 책이야. 오히려 시간이 없으니까 책을 읽어야 해. 부족한 시간이 풍요로워지도록, 시간의 어느 한 줄기가 반짝일 수 있도록 간절한 맘으로 페이지를 펼쳐야 해. 그래서 시간을 쪼개 책을 읽을 때면 나도 모르게 비밀스러워져. 그 순간만큼은 내가 그 구절을 소유한다고 믿으니까. 그 단어 위를 나 혼자 묵묵히 미끄러지니까.

“나는 다만 읽는 자로서” 묵묵히 소임을 다하기 시작한다. 활자를 하나하나 마음에 담기 시작한다. 어떤 활자는 단숨에 들어오고 어떤 활자는 더디더디 들어온다. 어떤 문장은 목구멍 뒤로 꿀꺽 넘어가고 어떤 문장은 아주 천천히 읽어야만 그 깊이를 간신히 느낄 수 있다. 심호흡을 한 뒤에야 겨우 책장을 넘길 수 있다. 내 옆에 “온순한 낱장”이 쌓이기 시작한다. 좋아하는 단어도 마음속에 차곡차곡 쌓인다. “내용이 사라진” 곳에서는 상상을 하고 맘에 드는 문장에는 “밑줄을 긋는다”. 마음속이 “끓어오르는 사막”처럼 요동한다.

그럼 너는 왜 책을 읽니. 나는 대답한다. “백 년 후의 어둠” 같은 날이 이어지고 있잖아. 한마디로 말해, 재미없잖아. 여기를 등지고 훌쩍 떠날 수는 없으니까 책으로 떠나는 거지. 책은 “서로 다른 길 위에” 설 수 있게 해주니까. “달력 속 맥주처럼 시원하”니까. 그 길을 거닐면서 “시시각각” 변하는 내 모습을 지켜보고 싶으니까. 나한테 부끄럽고 싶지 않으니까. 충실하고 싶으니까.

심심하니까, 글을 쓰기 싫으니까, 오늘만큼은 “독창적이고 싶지 않”으니까 나는 또 책을 읽는다. 습관처럼, 재채기처럼, 자기 전에 하는 하품처럼, 자고 일어났을 때 켜는 기지개처럼. 책을 읽으면서 공감을 하고 반성을 하고 배움을 얻는다. 밤늦게까지 책을 읽던 중 꾸벅꾸벅 졸다 그만 “잠시, 흔들”리기도 하면서. 이 책을 다 읽고 나면 어쩌면 내가 독창적으로 변해 있을지 몰라. 물론, 십중팔구 “당신의 페이지는 당신을 기록하지 않”는다. 책을 읽어도 책은 나를 기억하지 못한다. 나만 책을 기억한다.

책은 맥주처럼 시원하니까
지금 막 “한 권의 책”을 다 읽었어. 배가 불러. 마음이 불러. 기분이 좋아. 가슴속에 새로운 책이 나타났어. “몸 안을 가득 채운 글자가 쏟아지려”고 해. 나는 그 글자를 하나씩 꺼내 들어. 그것을 가지고, 꿈속에서 “스르르” 쓰기 시작한다.

오은 1982년 출생. 서울대 사회학과와 카이스트 문화기술대학원 졸업. 2002년 ‘현대시’로 등단. 시집으로 ‘호텔 타셀의 돼지들’이 있음.



주간동아 2012.07.02 844호 (p74~7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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