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월14일 시체로 발견된 에디 게레로.
게레로의 갑작스런 죽음을 비롯해 최근 들어 프로레슬러들이 30, 40대에 요절하는 일이 잦다. 프로레슬러들이 일찍 사망하는 주된 이유는 심장 쇼크로 인한 돌연사다. 97년에 브라이언 필먼이 심장마비로 사망한 채 발견됐다. 99년엔 근육질 몸매와 섹시한 동작으로 인기를 끌었던 릭 루드가 심장 쇼크로 사망했다. 또 2003년에는 그의 친한 친구이던 미스터 퍼펙트와 브리티시 불독이 같은 병으로 세상을 떠났다.
스포츠에서는 경기 도중 사망하는 경우도 있지만 경기장 밖에서 경기와 연관된 일로 사망하는 경우도 많다.
축구선수들 심장마비 사고도 적지 않아
94년 1월26일에는 헝가리 국가대표 미클로스 페헤르(24·당시 벤피카)가 경기 중 사망했다. 페헤르의 정확한 사인은 밝혀지지 않았다. 2003년 6월 컨페더레이션스컵 도중 카메룬 축구대표팀의 비비앵 포는 심장마비로 팬들의 곁을 떠났다. 8월에는 전 말레이시아 대표 알리 바카르가 자선경기 도중 역시 심장마비로 사망했다. 그리고 11월에는 스위스 2부 리그의 골키퍼 레토 가프너가 뇌출혈로 명을 달리했다. 국내에서도 2002년 춘계대학연맹전 도중 숭실대 김도연이 경기 중에 쓰러져 결국 숨을 거뒀다.
10월7일 AP통신은 놀라운 사실을 타전했다. 94년 미국월드컵 조별리그에서 자책골을 넣은 콜롬비아의 축구선수 안드레스 에스코바르의 살해범으로 당시 43년형의 징역형을 받은 움베르토 무노스가 겨우 11년 만에 석방됐다고 보도한 것이다. 이에 대해 에스코바르의 아버지 다이오 에스코바르는 “콜롬비아에는 정의가 없다. 콜롬비아 법관들이 도대체 무엇을 하는지 모르겠다”며 강하게 비난했다. 그러나 움베르토 무노스의 조기 석방으로 당시 안드레스 에스코바르의 살해는 조직적으로 이뤄졌음이 입증됐다. 그동안 움베르토 무노스의 조직에서 그의 석방을 위해 다방면으로 노력한 결과라는 것이다.
콜롬비아는 94년 미국월드컵 대회 시작 전 펠레가 치켜세운 월드컵 우승후보 0순위였다. 지역 예선에서 전 대회 준우승국 아르헨티나를 5대 0으로 격파했고, 프란시스코 마투라나 감독의 용병술은 최고였다. 그러나 막상 뚜껑이 열리자 콜롬비아는 루마니아에 1대 3으로 패했다. 2차전에서는 수비수 안드레스 에스코바르의 자책골로 미국에 패배했다. 대회 직후 감독 마투라나는 에콰도르로 망명해버렸으며, 자살골의 주인공 에스코바르는 총탄을 맞고 숨지는 월드컵 최고의 불상사가 생기고 말았다.
94년 미국월드컵에서 자책골을 넣은 뒤 총탄을 맞고 숨진 안드레스 에스코바르.
96년 5월19일 새벽, 유도 국가대표 정세훈은 국가대표 선발전에 나가기 위해 체중조절에 들어갔다. 정세훈의 평소 체중은 77kg 정도로, 신장 170cm인 그에게는 적당한 체중이었다. 하지만 출전 체급은 65kg급이었다. 무려 12kg을 빼기 위해 정세훈은 사우나실을 오가며 땀을 빼고 또 뺐다. 누구나 그렇듯이 처음 몇 kg은 잘 빠진다. 정세훈도 7~8kg까지는 잘 빠졌다. 문제는 나머지 2~3 kg이었다. 드디어 마지막 1kg을 빼기 위해 사우나실에 들어간 정세훈은 끝내 걸어 나오지 못했다. 꿈에도 그리던 올림픽 무대에 서보지도 못한 채 죽고 만 것이다. 직접적인 사인은 심장마비로 밝혀졌지만 무리한 체중 감량이 원인이었다.
유도, 복싱, 태권도, 역도 등 체급종목 선수들의 세계정상을 향한 몸부림은 체중조절에서 시작된다. 체중조절에 실패하면 경기에 출전하는 것조차 금지된다. 피나는 훈련·금식·사우나·토하기는 기본이고, 막판에는 수십g을 빼기 위해 피까지 뽑는 등 상상을 초월하는 방법이 동원된다. 운동을 제외한 다른 체중 조절법이 모두 건강에 치명타를 입히기 때문에 지금도 지구촌 곳곳에서 체급종목 선수들의 죽음을 담보로 한 체중 줄이기가 벌어지고 있다고 봐도 좋을 것이다.
프로야구에서는 86년 OB 베어스의 후보 포수였던 김영신 선수가 한강에 투신자살하는 사건이 발생했다. 김영신은 지금은 야구부가 없는 상문고와 동국대를 나온 유망주였다. 국가대표를 지내기도 했고, 프로에 입단할 때도 OB 베어스 안방을 책임질 선수로 평가받았다. 그러나 85년 OB 베어스 팀에 입단한 뒤 조범현(현 SK 와이번스 감독), 김경문(현 두산 베어스 감독) 등 팀 내 선배 포수들 틈에서 출장 기회를 갖지 못하는 것을 비관, 한강에 투신자살하고 말았다. 당시 OB 감독이던 김성근(현 일본 프로야구 롯데 지바마린스 인스트럭터) 씨는 80년대 후반을 위해 김영신을 키우고 있었다고 회고했고, 또 그럴 만한 능력을 갖고 있는 선수였다. OB구단은 그를 기리기 위해 백넘버 54를 한국프로야구 첫 영구결번으로 지정했다. 한국 프로야구 최초의 영구결번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