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간동아 7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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커져라, 세져라 ‘韓流 영향력’

한국, 일본 문화 일방적 수용에서 쌍방향 발전까지 눈부신 성장

  • 정지욱 한일문화연구소 학예연구관 nadesiko@unitel.co.kr

    입력2010-01-07 14:51: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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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커져라, 세져라 ‘韓流 영향력’

    초기의 붐(boom)으로 시작된 한류가 이제는 일본 문화 속에 정착해 하나의 장르로 굳어졌다. 조인성의 군 입대 현장까지 찾아온 일본팬들.

    일본에서는 1896년 11월25일 키네토스코프라는 영상장치가 처음 선보였고, 2년 후인 1898년 일본인에 의해 처음으로 영화가 촬영돼 다음해에 상영됐다. 우리나라에서도 1897년 지금의 서울 충무로에서 ‘활동사진’이라는 영화가 처음 상영됐다. 그리고 일본보다 20여 년 늦은 1919년 ‘의리적 구투(義理的仇鬪·의리의 복수)’라는 영화가 한국인 김도산에 의해 만들어져 단성사에서 첫 개봉됐다. 이렇듯 한국과 일본의 영화 역사는 100여 년을 훌쩍 뛰어넘어 뤼미에르 형제가 시네마토그래프를 발명한 직후부터 지금까지 이어지고 있다.

    사실 일제강점기엔 일본의 간섭 아래 수많은 영화가 만들어지고 보급되면서 그들이 의도한 문화통치의 한 수단으로 이용됐다. 그 기간에 조선총독부에서 세운 ‘조선영화사(朝映)’와 중국 만주에 세워진 ‘만주영화사(滿映)’는 한국과 중국의 영화사에서 씻을 수 없는 오점인 동시에 양국 영화산업 발전의 기초가 되기도 했다.

    한국에서는 1924년 일본인에 의해 만들어진 조선키네마에 대항해 수많은 독립영화사가 세워졌지만, 조선총독부에 의해 1942년 ‘조선영화사’로 통폐합됐다. 이들 독립영화사는 광복 직후 그동안의 경험을 바탕으로 우리말로 된 영화를 만들어낼 수 있었다. ‘만주영화사’는 패전 후 일본으로 돌아가 도에이영화사(東映)의 기초가 되거나 홍콩 영화의 시조가 됐다.

    쇼·드라마·광고 등서 심심찮은 표절시비

    일제강점기를 경험한 한국으로선 광복 이후 일본 문화의 침략행위를 용납하기 어려웠다. 그래서 1998년 일본 대중문화가 전면 개방되기 전까지 일부 국제영화제를 제외하고 일본 영화는 한국에서 상영되지 못했다. 이는 대중가요와 TV 방송 같은 대중문화에서도 마찬가지였다.



    하지만 광복 이후에도 한국 영화는 일본의 영향을 직간접적으로 받았다. 다만 일반 관객들은 일본 영화를 체험할 수 없어 그 영향과 관계에 대해 몰랐을 뿐이다. 수많은 일본 영화가 한국에서 리메이크되거나 일부 표절됐지만, 영화에 출연한 배우나 감독조차 이를 모르는 경우가 허다했고, 어떤 경우에는 시나리오 작가만 알고 있기도 했다.

    한 예로, 일본에서 1963년 제작된 나카히라 코우(中平康) 감독의 청춘영화 ‘흙탕 속의 순정(泥まみれの純情)’은 대사만 번역해 신성일과 엄앵란이 1964년에 주연한 김기덕 감독의 영화 ‘맨발의 청춘’으로 만들어졌다. 개봉 당시 수많은 관객의 심금을 울렸고, 한국 영화사의 한 획을 그은 작품으로 꼽힐 만큼 인정받은 영화지만 카메라 각도, 대사, 의상 등이 원작과 동일한 표절작품이라는 사실이 밝혀졌다.

    1997년 이진석 감독이 연출한 영화 ‘체인지’는 개봉 직전 일본 오바야시 노부히코(大林宣彦) 감독의 청춘영화 ‘전교생(轉校生)’(1982)을 리메이크한 사실이 밝혀져 제작사가 서둘러 판권을 구입하는 해프닝이 벌이지기도 했다.

    이런 문제는 영화계뿐 아니라 대중문화계 전반에서 빚어졌다. 1980년대 중반까지만 해도 방송가에선 개편 시기가 다가올 때마다 관계자들의 부산행이 잦아지곤 했다. 일본 방송을 보면서 새롭게 꾸밀 프로그램을 궁리하기 위해서라는 건 공공연한 비밀이었다.

    해외여행 자유화와 일본 대중문화 개방 후에도 우리나라 방송의 일본 베끼기 행각은 줄지 않고 있다. 아직도 각종 버라이어티 쇼와 드라마는 물론, 광고까지 심심찮게 표절 의혹에 휩싸이고 있다. 특히 대중가수들의 노래, 댄스, 의상, 뮤직비디오는 그 정도가 더하다.

    만화영화도 예외는 아니다. 386세대인 필자는 많은 TV 만화영화를 보면서 자랐다. 그러나 어린 시절 꿈과 희망을 안겨준 거의 모든 TV 만화영화, 즉 ‘타이거 마스크’ ‘마징가 Z’ 등이 죄다 일본 작품이었다. 이런 사실을 알게 된 고교시절 애국심에 불타 친구들 앞에서 열변을 토했지만, 집에 돌아와 결국 TV 앞에서 ‘은하철도 999’ 등 일본 만화영화에 열중하는 이중적 태도를 보였다. 주말에 고정적으로 방송되던 디즈니 만화가 있었지만 아직도 방송되는 상당수의 만화영화는 일본 작품이다.

    일제강점에서 벗어난 지 65년이 흐른 지금까지도 한국의 대중문화는 일본의 영향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 게 사실이다. 하지만 그 영향이 일방적이기만 했을까. 일본에서 한류 열풍을 일으키며 문화적 영향을 미친 사례 또한 많이 찾아볼 수 있다.

    커져라, 세져라 ‘韓流 영향력’

    송승헌에게 열광하는 일본 중년 여성들.

    일본 문화 속 하나의 장르가 된 ‘한류’

    1966년 이만희 감독이 연출한 ‘만추(晩秋)’는 1972년 사이토 고이치(齊藤耕一) 감독에 의해 ‘약속(約束)’으로 리메이크돼 그해 일본 영화 베스트 5에 올랐다. 이 작품은 한국과 미국이 글로벌 프로젝트로 현재 다시 촬영 중이며, 2010년 개봉 예정이다. 김지운 감독의 ‘조용한 가족’(1998)은 미이케 다카시(三池崇史) 감독의 ‘가타쿠리가의 행복(カタクリ家の幸福)’(2002)으로 리메이크됐다. 또한 이재한 감독의 ‘내 머릿속의 지우개’(2004)는 일본 원작을 리메이크한 작품으로, 일본에 역수출돼 큰 호응을 얻으면서 영화 부문에서 한류를 일으키는 원동력이 됐다.

    ‘겨울연가’로 대표되는 일본 방송가의 한류는 아직도 이어지고 있다. 이른바 아줌마 팬으로 시작된 한류는 ‘대장금’을 통해 한국의 전통문화에 대한 관심으로 이어졌고, 현재 ‘아이리스’ ‘선덕여왕’을 통해 남북관계와 현대사는 물론, 고대사에 대한 관심으로 이어지면서 상당한 반향을 일으키고 있다. ‘동방신기’를 비롯한 아이돌 스타들의 활동을 봐도 일본 연예계에서의 한류 자리매김 정도를 알 수 있다.

    언제부터인가 일부에서는 ‘한류의 종식’을 걱정하며 우려의 목소리를 내고 있다. 이는 한류를 지나치게 상업적으로 이용하려던 초기의 실수가 빚어낸 결과다. 사실 한류 시장이 축소된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초기의 붐(boom)으로 시작된 한류가 이제는 일본 문화 속에 정착해 하나의 장르로 굳어졌다. 붐처럼 일시적으로 지나가는 바람이 아닌, 고착된 장르로 일본 문화 속에서 지속적인 영향력을 갖게 된 것이다.

    10여 년 전 한국을 방문한, 영화 ‘철도원’과 ‘호타루’의 후루하타 야스오(降旗康男·75) 감독은 “한국 영화에는 에너지가 넘친다”며 “감독들이 장면 하나 하나를 찍을 때, 연기자들이 한 장면 한 장면을 연기할 때 뿜어져 나오는 에너지는 놀라울 만치 강하다”고 극찬했다. 또 2009년 여름 한국을 찾은 일본 영화계의 원로 오바야시 노부히코(大林宣彦·71) 감독은 “한국 영화 속의 배우들은 연기가 살아 있다. 일본에선 이미 사라져 찾아볼 수 없는 눈빛 연기를 한국 배우들의 모습에서 볼 수 있었다”고 말했다.

    자고로 문화는 상호적인 활동이다. 즉, 일방적인 것이 아니라 쌍방이 주고받으며 서로의 장점을 취하고 단점은 보완하면서 발전해나가는 것이 문화다. 2010년은 경술국치 100년이 되는 해다. 한국과 일본이 더 이상 대결의 시각으로 날을 세우지 말고, 더욱 활발한 문화교류를 통해 양국이 서로 발전하면서 국제 문화무대를 아시아가 이끌어보는 것은 어떨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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