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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반도|6·25 50주년 ‘비화’

인민군은 서울 점령 후 왜 3일간 쉬었나

김일성, 국회 개원시켜 이승만 하야 기도…정치공작 실패하자 한강 이남으로 공격

인민군은 서울 점령 후 왜 3일간 쉬었나

인민군은 서울 점령 후 왜 3일간 쉬었나
1950년 6월28일 서울을 점령한 인민군은 서울시청에 김일성-스탈린 초상화를 내걸고 인공기를 게양했다(왼쪽). 서울에 들어온 인민군이 시가행진을 벌이고 있다(작은 사진).

인민군 6사단 13연대 정치장교(중좌)로 6·25전쟁에 참전한 최태환씨는 “김일성은 서울 점령 후 제2대 국회를 소집해 이승만대통령 하야를 결정하는 쿠데타를 벌이려 했다”고 증언했다.

6·25전쟁 때 인민군 작전국장이었던 유성철씨도 ‘인민군은 서울 점령을 위한 3일 작전 계획만 갖고 전쟁을 일으켰다’는 증언을 남겼다.

6·25전쟁이 발발한 지 50년이 되었다. 6·25전쟁 최대의 미스터리는 6월28일 서울에 입성한 인민군이 왜 3일 동안 진격을 멈추고 ‘노닥거렸느냐’ 하는 점이다. 8개 사단이던 국군은 유일한 한강 다리인 인도교를 폭파하고 서울을 떠날 당시에는 5개 사단으로 줄어 있었다. 병력도 30%밖에 남지 않았었다.

6·25 발발 소식을 듣고 한국으로 달려온 미지상군 부대가 최초로 전투를 벌인 것은 7월5일이었다. 따라서 인민군이 쉬지 않고 국군을 밀어붙였다면 7월5일쯤에는 낙동강 부근에 도달해 사실상 한반도 전역을 석권했을 수도 있다. 이런 상황이라면 미군은 지상군 파병을 포기했을지도 모른다. 이런 이유로 서울을 점령한 후 인민군이 3일을 지체한 것은 6·25전쟁 최대의 미스터리로 남아 있다.



6·25전쟁 전날 국군 전 부대는 육군본부 명령을 받아 비상경계령을 해제했으나, 춘천을 방어한 국군 6사단 7연대(연대장 임부택대령)만은 자체적으로 비상경계령을 풀지 않았다. 미국과 러시아에서 공개된 6·25 당시의 인민군 남침 계획(선제타격 계획)에 따르면 인민군 2, 12사단은 국군 6사단을 뚫고 춘천을 점령한 후 서남진해 수원을 점령하기로 돼 있었다.

그러나 국군 7연대의 결사항전 때문에 인민군 2, 12사단은 6월28일에야 춘천을 점령할 수 있었다. 우리 쪽은 이러한 사실을 근거로, 7연대를 필두로 한 국군 6사단이 잘 싸웠기 때문에 인민군은 전의가 꺾여 3일 동안 서울에서 주저했다는 해석을 내놓고 있다. 그러나 이러한 해석은 개전 당시의 패배를 감추고 싶어하는 우리 쪽의 ‘아전인수’(我田引水)에 지나지 않는다.

지난 4월26일 만주 동북군정대 1기 동기생 자격으로 중국 인민정치협상회의 부주석 조남기 인민해방군 상장을 만나 화제가 되었던 최태환씨(71)는 “인민군이 서울에서 지체한 데는 다른 이유가 있다”고 밝혔다. 최씨는 6·25 개전 당일 중좌(중령) 계급으로 인민군 6사단 13연대 정치보위부 책임장교였다(정치보위부 장교는 우리의 기무부대 장교와 흡사하다).

6월9일부터 23일 사이, 6사단 예하 부대들은 38도선 근방으로 이동했다. 부대 이동이 끝나자 방호산 사단장은 “소좌급 이상 전 장교와 군관은 사단 사령부로 모이라”고 지시했다. 13연대 부연대장 최진학과 함께 사단 사령부에 간 최씨는 평소와 달리 경위(警衛·우리의 헌병에 해당)들이 도열해 있어 매우 긴장된 분위기를 느꼈다고 회상했다. 이날 사단 사령부에서는 김두봉 최고인민회의 상임위원장(국회의장에 해당)의 시국강연이 있었다.

부대 이동이 있기 전 최씨는 평양에서 ‘어느 한 나라에서 일어난 일’이라는 제목의 영화를 본 적이 있었다. 체코슬로바키아는 1945년 내무상 베네시가 쿠데타를 일으킴으로써 내전 없이 공산화가 됐는데, 영화는 바로 그 과정을 소재로 한 것이었다. 최씨는 사단 사령부로 가면서 이 영화와 비슷한 일이 벌어지는 것 같다는 대화를 최진학과 주고받았다.

6월25일 인민군은 문산 방면으로는 인민군 1, 6사단, 의정부 방면으로는 인민군 3, 4사단을 투입해 서울을 공격했다. 서울에 먼저 입성한 것은 인민군 3, 4사단이었다. 지금 서울시 의회 청사로 쓰이는 건물이 1950년에는 국회의사당이었다. 6월28일 이권무소장(한국군 준장에 해당)이 이끄는 인민군 4사단은 국회의사당에 인공기를 내걸었다. 이때 이미 최씨가 속한 6사단 13연대는 한강을 건너 개화산(서울 강서구 개화동)에 포진했다. 인민군 부대가 한강을 건넜는데도 진격 명령이 내려오지 않았다.

여기서 잠깐 1950년 전후의 남한 정치사를 살펴보기로 하자. 단독정부 수립을 결정한 남한은 1948년 5월10일 제1대 총선(제헌의회 선거)을 치러 200명의 제헌의원을 선출했다. 제헌의회 선거에 결사 반대한 것은 북한이었다. 북한은 공작원과 남로당원을 동원해 방해 공작을 펼쳐, 선거 기간 무려 900여 명의 사상자가 발생케 했다.

제헌국회는 대한민국을 수립하고 2년만에 종료되고, 1950년 5월30일 제2대 총선이 실시되었다. 이때도 북한은 방해 공작을 펼쳤으나 6명이 사망하고 3명이 납북되는 선에서 그쳤다. 그러나 210명의 당선자 중에서 친이승만 라인으로 분류될 수 있는 의원은 58명뿐이었다. 요즘식으로 말하면 ‘엄청난 여소야대’ 현상이 만들어진 것이다.

6월7일 북한은 돌연 남북 총선거를 제의했다. 그러면서 “이승만은 하와이에서 독립운동 자금을 빼내 착복했으니 출마하면 안된다. 신성모(당시 국방장관)는 중국 양쯔강을 오가는 배의 선장을 하며 아편 장사를 했으니 출마하면 안된다”는 등의 토를 달았다. 그와 동시에 북한은 민족주의 민족전선 대표 3명을 남한으로 보냈는데, 남한은 이들을 붙잡아 구금하고 “이들이 귀순해 왔다”고 발표했다.

6월10일 북한은 남한에서 검거된 남로당 거물 이주하, 김삼룡과 북한에 있는 조만식 선생을 교환하자고 제의했다. 이렇게 시국과 남북 정세가 복잡해지자 육군본부는 전군에 비상경계령을 하달했다(이 경계령은 6월24일 0시 부로 해제되었다). 김일성은 이렇게 남한과 복잡한 정치싸움을 하다 전쟁을 일으킨 것이다.

최씨는 “서울 점령 후 인민군이 주력한 것은 제2대 국회의원을 찾아내는 것이었다”고 말했다. 또 “초대 대통령 이승만은 국회 간선으로 당선됐으니, 야성이 강한 2대 국회의원을 조종하면 이승만대통령 퇴진 결정을 내릴 수 있다고 본 것이다. 이승만 퇴진을 결정한 후 국회의원들로 하여금 ‘오는 8월15일 남-북한을 통합한다’고 선언케 하는 것이 김일성의 계획이었던 것으로 안다”고 말했다.

이때 인민군 1, 6사단은 서울 서쪽과 북쪽을 포위하고 인민군 3, 4사단은 서울 동쪽과 북쪽을, 그리고 춘천으로 남진하는 2, 12사단은 남쪽을 포위할 계획이었다. 이렇게 서울을 포위한 채로 국회를 열어야 국회의원들이 시키는 대로 할 것으로 보았는데 2, 12사단이 국군 6사단의 선전(善戰)에 걸려 계획한 날짜에 수원을 점령하지 못했다. 최씨는 남쪽이 열려 있었기 때문에 국회의원을 비롯한 남한 요인들이 대거 피난했다며 이렇게 말했다.

“서울을 점령한 후 곧 인민군은 ‘2대 국회의원 소집 공고’를 냈으나 찾아오는 의원이 거의 없었다. 3일 동안 인민군은 국회의원 색출 작업에 나섰으나 국회 개원에 필요한 정족수(과반수)의 의원도 찾을 수 없었다. 그래서 ‘어느 한 나라에서’처럼 친공산 쿠데타를 일으켜 정치적으로 남한을 통합할 수 없다고 보고 7월2일 군사력으로 전 한반도를 석권한다며 한강 이남으로의 공격을 결정한 것이다.”

최씨 부대에 “영등포를 해방하라”는 명령이 하달된 것도 이 날이었다. 이 명령이 있기 전 최씨는 “(서울에서의 정치공작이 끝났으니) 곧 북조선으로 퇴각하라”는 명령이 떨어질 줄 알았다고 말했다. 서울에서 정치공작을 완성할 때까지는 인민군대가 서울을 포위해 있고, 공작이 완수되면 그 즉시 철수해 미국을 비롯한 서방국가에 빌미를 주지 않으려 했다는 것이다.

최씨의 증언은 6·25 당시 인민군 작전국장이었던 유성철씨(당시 소장)에 의해 보강된다. 유씨는 1990년 11월 ‘한국일보’에 연재한 ‘나의 증언’에서 ‘우리의 남침계획은 사흘 안에 서울을 점령하는 것으로 끝나게 돼 있었다.(중략) 서울을 점령하면 20만 남로당원이 일어나 남한 정권을 전복시킨다는 박헌영의 말을 철썩같이 믿고 있었다’ ‘6·25는 사흘을 예정했으나 실제로는 3년이 걸렸다. 뒤집어 말하면 인민군은 3일을 제외한 전 기간 각본에도 없는 전쟁을 치렀다는 뜻이다’고 밝힌 바 있다.

최씨는 인천 상륙작전 후 빨치산활동을 하다 붙잡혀 실형을 살다 풀려났으나, 전향한 적은 없다. 이러한 최씨의 증언이 사실이라면 6·25전쟁은 김일성의 철저한 오판 때문에 확대된 것이 된다. 오판을 감추려고 전쟁을 확대한 김일성을 사가들은 어떻게 평가할 것인가.



주간동아 2000.06.22 239호 (p22~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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