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스날이 마지막 리그 우승을 차지한 지 벌써 20년이 넘었다. 그것은 단순한 우승이 아니었다. 아스날은 2003~2004시즌 단 1경기도 패하지 않으며 잉글랜드프리미어리그(EPL) 최초 ‘무패 우승’ 타이틀을 챙겼다. 기나긴 잉글랜드 축구 역사에서도 1980년대 프레스턴 노스 엔드만이 해낸 대업이었다. 이때만 해도 2001년에 이어 다시금 라이벌 맨체스터 유나이티드를 제치며 21세기 아스날 시대가 왔음을 알리는 것만 같았다. 하지만 그때는 미처 알지 못했다. 아스날의 영광이 그렇게 막을 내릴 것이라고, 또한 20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리그 우승을 기다리게 될 것이라고 말이다.
한때 ‘아스날 vs 맨체스터 유나이티드’ 혹은 ‘아르센 벵거 vs 알렉스 퍼거슨’의 라이벌리(rivalry)로 표상되던 잉글랜드 축구는 2003년 첼시를 인수한 로만 아브라모비치의 등장과 함께 큰 변화를 맞게 된다. 언제까지나 찬란할 것 같던 아스날 시대가 저물고, 수도 런던을 대표하는 축구팀이 바뀌기 시작한 것도 그즈음이다. 런던을 연고로 하는 첼시는 러시아 재벌의 막대한 투자를 바탕으로 2004~2005시즌, 2005~2006시즌 연속 EPL 트로피를 가져갔다. ‘스페셜 원’ 조제 모리뉴가 최고 주가를 달리면서 첼시는 EPL 판도를 완전히 바꿔버렸다. 그럼에도 맨체스터 유나이티드는 퍼거슨과 ‘유나이티드 정신’으로 계속 우승에 도전했고 트로피를 가져가는 데 성공했다. 문제는 아스날이었다. 벵거는 킥 앤드 러시로 대표되던 잉글랜드 축구에 본격적인 패스 축구를 도입한 선구자지만, 그가 지향하는 축구로는 승리와 재미를 모두 챙기기가 버거웠다. 결정적으로 다른 팀들이 이적료를 펑펑 쓰며 전력을 보강할 때 아스날은 같은 선택을 하지 않았다.
유능한 코치이자 매니저였던 벵거는 철저한 실리주의자다. 1996년 런던에 도착해 아스날의 모든 것을 바꿔놓은 그는 탁월한 안목으로 저평가된 선수들을 영입하고 뛰어난 유망주를 슈퍼스타로 만들었다. 당연히 그는 EPL에 불어닥친 머니게임에 동참하지 않았다. 물론 이런 선택에는 당시 허리띠를 바짝 죈 구단 사정도 작용했을 테다. 당시 아스날은 지금 사용하는 에미레이트 경기장을 짓느라 전력 보강에 큰돈을 쓰기 어려웠다. 현재보다 미래를 내다본 투자였지만, 잉글랜드 축구 시장이 큰 변화를 맞이한 때라 타이밍이 좋지 않았던 것이다. 런던 시내에 축구장이라는 거대 부동산을 소유하는 데 예상보다 큰 비용이 든 점도 변수였다. 당연히 선수단 운용은 후순위로 밀려났다.
새 경기장이 개장한 후에도 아스날의 재정적 어려움이 곧장 해결되지는 않았다. 설상가상으로 2008년 아랍에미리트(UAE) 아부다비 왕자 셰이크 만수르 빈 자예드 알나얀이 맨체스터 시티를 인수하면서 EPL 상위권 판도가 다시 요동치게 된다. 이때부터 아스날의 현실적 목표는 리그 4위를 유지하면서 UEFA 챔피언스 리그 진출권을 따내는 것으로 바뀌었다. 하지만 축구 시장이 바뀌면서 아스날을 지탱하던 시스템도 흔들리기 시작했다. 선수 몸값은 높아지고 좋은 유망주를 영입하는 경쟁도 치열해졌다. 우승과 멀어지면서 아스날에 헌신하려는 선수의 수도 줄어만 갔다. 그래도 벵거는 팀을 4위권으로 유지했고, 경기장 건설 후유증에서도 벗어나 미진하긴 해도 전력 보강에 신경 쓸 여력이 생겼다.
문제는 마지막 우승 후 어렵사리 버텨낸 10여 년 동안 치고 올라온 다른 팀들의 존재다. 이들 팀은 아스날이 정체된 사이 무서운 속도로 전력을 끌어올렸다. 당장 우승에 도전하는 팀 수가 늘었고 북런던 라이벌 토트넘 홋스퍼까지 4위 자리를 노리는 위치가 됐다. 여기에 위르겐 클롭 감독과 함께 과거 영광을 되찾은 리버풀이 가세하면서 아스날 입지는 흔들렸다. 결국 부임 후 단 한 번도 4위 밖으로 밀려나지 않았던 벵거호(號) 아스날은 2016~2017시즌 처음 리그
5위로 주저앉았다. 동력을 잃은 팀은 그다음 시즌에도 챔피언스 리그 복귀에 실패했다. 벵거에 대한 의심이 확신이 되는 순간, 스물두 시즌을 함께한 벵거 시대는 그렇게 막을 내렸다.
세상만사가 그렇지만, 바꾸기만 하면 모든 일이 잘 풀릴 것 같은 착각에 빠지는 순간이 있다. 최면에 걸린 듯 이보다 더 나빠진다는 생각은 일절 하지 못하는 것이다. 아스날이 그랬다. “이제 벵거 시대는 끝났다” “벵거의 지도력은 현대 축구와 맞지 않는다” “아스날의 저력에 새로운 감독의 리더십이 더해지면 새 바람을 일으킬 수 있다”는 목소리가 비등했다. 물론 성적 하락으로 불가피한 측면도 있지만, 결과적으로 아스날의 선택은 완전히 틀렸다. 한 감독이 장기간 팀을 이끈 후 나타나는 후유증을 고려하지 못한 것이다. 어쩌면 감독 교체라는 카드로 팀이 처한 현실을 애써 부정하고 싶었는지도 모른다. 아스날은 스페인 출신인 우나이 에메리 감독을 영입했지만 도리어 리그 8위까지 추락하며 충격에 휩싸였다.
이런 아스날에 구세주처럼 등장한 이가 미켈 아르테타 감독이다. 그는 스페인 출신으로 에버턴과 아스날을 거치며 EPL 정상급 중앙 미드필더로 활약했다. 은퇴 후에는 세계 최고 명장인 주제프 과르디올라 맨체스터 시티 감독 아래서 지도자 수업을 받았다. 2019년 겨울 아스날은 팀의 장기 계획과 함께 젊은 선수들을 이끌 적임자로 아르테타를 선택했다. 감독 경험이 없던 30대 후반의 젊은 지도자를 선택한 것이 자칫 도박으로 비칠 수도 있었다. 실제로 팬들은 초보 감독을 인내심을 갖고 바라보지 않았다. 당장 성과가 나오지 않자 다시 감독 교체 목소리가 높아졌다. 하지만 아르테타는 2019~2020시즌 FA컵 우승을 차지하면서 믿음을 줬고, 리그 순위도 8위→5위→2위로 높여갔다. 지난 시즌은 22라운드까지 선두를 달리며 잊혔던 우승 기억을 끄집어내기도 했다.
이번 시즌에도 리그 반환점을 돈 현 시점에 아스날은 다시 우승 경쟁을 이어가고 있다. 크리스마스에는 지난 시즌처럼 리그 1위라는 선물이 찾아왔다. 물론 최근 5경기 가운데 4경기를 승리하지 못하며 시즌 첫 위기가 찾아온 것도 사실이다. 무기력하게 역전 우승을 내줬던 지난 시즌 상황이 재연되는 것 아니냐는 우려도 나온다. 하지만 젊은 선수들과 젊은 감독이 다시 아스날을 우승에 가까운 팀으로 만들고 있다는 사실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재벌 구단주 등장에 바뀐 잉글랜드 축구
지난해 12월 17일 아스널의 카이 하베르츠(오른쪽)가 공을 몰며 질주하고 있다. [GETTYIMAGES]
유능한 코치이자 매니저였던 벵거는 철저한 실리주의자다. 1996년 런던에 도착해 아스날의 모든 것을 바꿔놓은 그는 탁월한 안목으로 저평가된 선수들을 영입하고 뛰어난 유망주를 슈퍼스타로 만들었다. 당연히 그는 EPL에 불어닥친 머니게임에 동참하지 않았다. 물론 이런 선택에는 당시 허리띠를 바짝 죈 구단 사정도 작용했을 테다. 당시 아스날은 지금 사용하는 에미레이트 경기장을 짓느라 전력 보강에 큰돈을 쓰기 어려웠다. 현재보다 미래를 내다본 투자였지만, 잉글랜드 축구 시장이 큰 변화를 맞이한 때라 타이밍이 좋지 않았던 것이다. 런던 시내에 축구장이라는 거대 부동산을 소유하는 데 예상보다 큰 비용이 든 점도 변수였다. 당연히 선수단 운용은 후순위로 밀려났다.
새 경기장이 개장한 후에도 아스날의 재정적 어려움이 곧장 해결되지는 않았다. 설상가상으로 2008년 아랍에미리트(UAE) 아부다비 왕자 셰이크 만수르 빈 자예드 알나얀이 맨체스터 시티를 인수하면서 EPL 상위권 판도가 다시 요동치게 된다. 이때부터 아스날의 현실적 목표는 리그 4위를 유지하면서 UEFA 챔피언스 리그 진출권을 따내는 것으로 바뀌었다. 하지만 축구 시장이 바뀌면서 아스날을 지탱하던 시스템도 흔들리기 시작했다. 선수 몸값은 높아지고 좋은 유망주를 영입하는 경쟁도 치열해졌다. 우승과 멀어지면서 아스날에 헌신하려는 선수의 수도 줄어만 갔다. 그래도 벵거는 팀을 4위권으로 유지했고, 경기장 건설 후유증에서도 벗어나 미진하긴 해도 전력 보강에 신경 쓸 여력이 생겼다.
포스트 벵거, 구세주처럼 등장한 아르테타
잉글랜드프리미어리그(EPL) 미켈 아르테타 아스널 감독. [뉴시스]
5위로 주저앉았다. 동력을 잃은 팀은 그다음 시즌에도 챔피언스 리그 복귀에 실패했다. 벵거에 대한 의심이 확신이 되는 순간, 스물두 시즌을 함께한 벵거 시대는 그렇게 막을 내렸다.
세상만사가 그렇지만, 바꾸기만 하면 모든 일이 잘 풀릴 것 같은 착각에 빠지는 순간이 있다. 최면에 걸린 듯 이보다 더 나빠진다는 생각은 일절 하지 못하는 것이다. 아스날이 그랬다. “이제 벵거 시대는 끝났다” “벵거의 지도력은 현대 축구와 맞지 않는다” “아스날의 저력에 새로운 감독의 리더십이 더해지면 새 바람을 일으킬 수 있다”는 목소리가 비등했다. 물론 성적 하락으로 불가피한 측면도 있지만, 결과적으로 아스날의 선택은 완전히 틀렸다. 한 감독이 장기간 팀을 이끈 후 나타나는 후유증을 고려하지 못한 것이다. 어쩌면 감독 교체라는 카드로 팀이 처한 현실을 애써 부정하고 싶었는지도 모른다. 아스날은 스페인 출신인 우나이 에메리 감독을 영입했지만 도리어 리그 8위까지 추락하며 충격에 휩싸였다.
이런 아스날에 구세주처럼 등장한 이가 미켈 아르테타 감독이다. 그는 스페인 출신으로 에버턴과 아스날을 거치며 EPL 정상급 중앙 미드필더로 활약했다. 은퇴 후에는 세계 최고 명장인 주제프 과르디올라 맨체스터 시티 감독 아래서 지도자 수업을 받았다. 2019년 겨울 아스날은 팀의 장기 계획과 함께 젊은 선수들을 이끌 적임자로 아르테타를 선택했다. 감독 경험이 없던 30대 후반의 젊은 지도자를 선택한 것이 자칫 도박으로 비칠 수도 있었다. 실제로 팬들은 초보 감독을 인내심을 갖고 바라보지 않았다. 당장 성과가 나오지 않자 다시 감독 교체 목소리가 높아졌다. 하지만 아르테타는 2019~2020시즌 FA컵 우승을 차지하면서 믿음을 줬고, 리그 순위도 8위→5위→2위로 높여갔다. 지난 시즌은 22라운드까지 선두를 달리며 잊혔던 우승 기억을 끄집어내기도 했다.
이번 시즌에도 리그 반환점을 돈 현 시점에 아스날은 다시 우승 경쟁을 이어가고 있다. 크리스마스에는 지난 시즌처럼 리그 1위라는 선물이 찾아왔다. 물론 최근 5경기 가운데 4경기를 승리하지 못하며 시즌 첫 위기가 찾아온 것도 사실이다. 무기력하게 역전 우승을 내줬던 지난 시즌 상황이 재연되는 것 아니냐는 우려도 나온다. 하지만 젊은 선수들과 젊은 감독이 다시 아스날을 우승에 가까운 팀으로 만들고 있다는 사실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