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간동아 97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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슈틸리케 매직에 활짝 웃은 한국

주전선수 줄부상 악재에도 어떻게든 이기는 ‘늪 축구’가 통했다

  • 김도헌 스포츠동아 기자 dohoney@donga.com

    입력2015-01-30 16:02: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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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슈틸리케 매직에 활짝 웃은 한국

    한국 축구대표팀 이정협이 1월 26일 이라크와 맞붙은 ‘2015 아시아축구연맹(AFC) 아시안컵’ 준결승전에서 전반 20분 헤딩 선제골을 터뜨린 뒤 환호하고 있다.

    한국 축구는 2014 브라질월드컵에서 쓰디쓴 좌절을 맛봤다. 원정 월드컵 첫 16강에 올랐던 2010 남아공월드컵의 선전에 이어 사상 첫 원정 월드컵 8강 진출이란 큰 목표를 세웠지만 결과는 조별리그 1무2패, 충격적인 탈락이었다.

    대한축구협회는 월드컵 이후 비난 여론에 민첩하게 대응하지 못하면서 사령탑인 홍명보 전 감독의 불명예 퇴진에 단초를 제공했다. 홍 전 감독이 자신의 생각처럼 대회 직후 결과에 책임지는 모습을 보였더라면 더 큰 상처는 피할 수 있었을 것이다.

    더욱이 대한축구협회는 새로운 외국인 사령탑을 선임하는 과정에서 또 한 번의 헛발질을 했다. 덜컥 베르트 판마르베이크(네덜란드) 감독과의 우선 접촉을 공개했지만 협상은 예상 밖으로 틀어졌고 한국 대표팀 지휘봉을 잡는 감독은 ‘2순위 사령탑’이라는 불명예를 피할 수 없게 되는 우를 범했다.

    ‘2순위 감독’이 몰고 온 ‘유쾌한 반란’

    우여곡절 끝에 추락하는 한국 축구의 선장에 오른 이는 울리 슈틸리케(61·독일) 감독이다. 국제 축구계에서 톱클래스 지도자라기엔 거리가 있었던 그는 ‘2순위 감독’으로 한국을 맡았고, 취임 초기만 해도 그에 대한 우려의 시선이 있었던 것도 사실이다. 하지만 지난해 10월 초 한국 사령탑으로 데뷔전을 치른 슈틸리케 감독은 몇 개월 만에 대표팀의 체질을 바꾸는 데 성공했다. 1월 호주에서 펼쳐진 ‘2015 아시아축구연맹(AFC) 아시안컵’에서 온갖 난제를 뚫고 결승 진출을 일궈내며 한국 축구에 제2의 부흥기가 올 수 있다는 자신감을 불어넣었다.



    브라질월드컵을 앞두고 홍 전 감독은 “소속팀에서 주축 선수로 뛰지 못하는 선수는 뽑지 않겠다”고 했던 자신의 원칙을 깨고 박주영(30·알 샤밥)을 주전 스트라이커로 발탁해 큰 논란을 낳았다. 게다가 대표선수 대부분이 홍 전 감독이 2012 런던올림픽 대표팀 사령탑을 맡았을 당시 활용한 제자들이었다. ‘의리’ 논란과 함께 ‘홍명보의 아이들’이란 달갑지 않은 수식어가 끝까지 그의 어깨를 짓눌렀다.

    반면 슈틸리케 감독은 개인적 인연이나 기존 틀에 얽매이지 않아도 되는 외국인 사령탑의 이점을 십분 활용했다. 박주영을 한 차례 대표팀에 합류시켜 테스트했지만 경기력이 받쳐주지 않는다고 판단하자 과감히 호주 아시안컵 엔트리에서 제외했다.

    슈틸리케 감독은 지난해 12월 제주도 전지훈련을 앞두고 “우리는 배가 고픈 선수가 필요하다. 열정과 의욕이 있는 선수라면 경험이나 나이와 관계없이 발탁하겠다”고 공언했고, 그 약속을 지켰다. 이정협(24·상주상무)이 그 주인공이다. 슈틸리케 감독의 선택에 따라 성인 대표팀에 처음 발탁된 이정협은 이번 아시안컵을 통해 ‘군데렐라’ ‘슈틸리케 감독의 새로운 황태자’라는 별명을 얻으며 맹활약을 펼쳤다. A조 1위를 다투던 호주와의 조별리그 3차전, 결승 진출을 놓고 맞닥뜨린 이라크와의 준결승전에서 잇달아 결승골을 터뜨리며 ‘슈틸리케 매직’의 아이콘이 됐다.

    슈틸리케 감독은 브라질월드컵에서 드러난 문제점들을 깊이 연구해 ‘반면교사’로 삼았다. 선수 구성과 활용에서 이를 확인할 수 있다. 월드컵대표팀은 젊음을 강조했다. 이동국(36·전북현대), 차두리(35·FC서울) 같은 베테랑 선수들을 의도적으로 배제됐다. 강한 체력과 압박을 강조했기 때문이다.

    슈틸리케 감독도 강한 체력을 바탕으로 한 ‘점유율 축구’를 추구하기는 마찬가지다. 하지만 그는 경험에도 주목했다. 이동국의 부상을 아쉬워했으며, 차두리의 경험에 기대를 걸었다. 슈틸리케 감독은 차두리, 곽태휘(34·알 힐랄)를 중용했다. 베테랑 선수들은 빼어난 경기력으로 보란 듯이 화답했다. 차두리는 활력을, 곽태휘는 수비 안정을 가져다줬다. 브라질월드컵 때는 볼 수 없던 모습이다.

    ‘슈틸리케 스타일’, 한국 어떻게 바꿀까

    슈틸리케 매직에 활짝 웃은 한국

    1월 26일 ‘2015 아시아축구연맹(AFC) 아시안컵’ 대한민국과 이라크의 준결승전에서 슈틸리케 한국 축구대표팀 감독이 선수들에게 작전 지시를 하고 있다.

    슈틸리케 감독은 스스로 정해놓은 원칙에 대해 누구보다 철저하다. 평소 와인을 즐겨 마시는 그는 이번 아시안컵을 앞두고 시드니에서 전지훈련을 할 때만 해도 코칭스태프 등과 와인을 한 잔씩 했다. 그러나 대회가 개막하자 와인뿐 아니라 맥주도 입에 대지 않았다. 경기와 경기 사이 휴식일이 길어도 긴장의 끈을 놓지 않고자 금주를 택했다. “1월 31일 결승전이 끝나고 난 뒤 기분 좋게 와인을 한잔했으면 좋겠다”는 말로 우승에 대한 갈증을 우회적으로 표현했고, 이는 선수들에게 감독의 의중을 은연중에 전달하는 상징적인 메시지가 됐다.

    슈틸리케 감독은 미디어도 노련하게 활용하며 선수들과의 팽팽한 긴장감을 경기력으로 연결시켰다. 그는 1월 13일 쿠웨이트와의 조별리그 2차전 직후 선수들이 경기에 임하는 자세에 문제가 있다며 강하게 질책했다. 선수 개개인에 대한 평가는 다소 과하다 싶을 정도로 냉정했다. 실명을 거론하며 채찍질을 가했고, “한국은 더는 우승 후보가 아니다”라는 말로 선수단 전체의 각성을 요구하기도 했다.

    경기 중 슈틸리케 감독은 90분 내내 벤치에서 분주하게 움직인다. 간혹 벤치 기둥에 기대어 조용히 경기를 지켜보기도 하지만, 테크니컬 에어리어 전체를 폭넓게 활용한다. 경기 도중 선수들이 지시한 대로 플레이하지 않으면 불같이 화를 내기도 하고, 또 심판 판정에 불만이 있을 때는 적극적으로 항의한다. 골 세리머니에는 얌전한 편이지만, 동작은 대부분 와일드하고 거침이 없다.

    슈틸리케 감독은 취임 초부터 “공격을 잘하는 팀은 승리하지만 수비를 잘하는 팀은 우승을 차지한다”며 수비의 중요성을 건축의 기초 공사에 빗대 강조했고, 이번 아시안컵에서 이를 증명했다. 한국이 조별리그 3경기와 8강전, 4강전 등 5경기 연속 무실점을 기록하며 27년 만에 아시안컵 결승에 오를 수 있었던 것은 조직적인 수비의 중요성을 강조한 그의 지도력 덕분이다.

    슈틸리케 감독은 취임 후 처음 치른 공식 대회에서 자신의 색깔을 유감없이 보여줬다. 이동국, 김신욱(27·울산현대)의 부상으로 선수 구성에서부터 100% 전력을 꾸릴 수 없었고, 대회에 들어가서는 이청용(27·볼턴)과 구자철(26·마인츠) 두 핵심 자원이 부상으로 중도 낙마하는 아픔 속에서도 성공적으로 아시안컵을 마무리했다. 아시안컵 이전에 치른 5차례 평가전으로는 그의 진면목을 파악하기 힘들었지만 이번 아시안컵을 통해 슈틸리케 스타일이 무엇인지 알게 했고, 앞으로 한국 축구가 어떻게 더 발전할 수 있을지 기대감을 품게 했다. 아시안컵 성적만으로 ‘한국 사령탑’으로서 성공 여부를 판단할 수는 없다. 그러나 슈틸리케 감독은 성공한 지도자로 남을 수 있음을 스스로 입증했다. 한국 축구대표팀의 활약이 앞으로 더 기대되는 이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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