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원도 원주농협 직원들은 ‘올해도 대풍이 예상된다’는 언론 보도 이후 오히려 걱정이 커졌다. 농협의 ‘주인’인 농민과 함께 황금빛 들판을 보며 포만감에 젖어야 할 이들의 마음이 점점 더 무거워지는 까닭은 무엇일까. 현재 원주농협이 안고 있는 100t의 쌀 재고 때문이다.
현 재고분을 수확기까지 처분하지 못하면 원주농협은 큰 손실을 감수해야 한다. 수확기가 되어 많은 물량이 쏟아져 나오면 구곡으로 변한 재고미는 헐값으로라도 처분해야 하는데 그것이 쉽지 않기 때문. 이 때문에 농협 내에서는 과장급 이상 직원에게 강제 할당, 이들이 알아서 처분하도록 하자는 아이디어까지 나온다고 한다.
원주농협에서 해마다 수매한 양은 2300t 안팎. 원주시민은 그동안 이를 충분히 소화해 주었기 때문에 올해와 같은 재고 걱정은 없었다. 더욱이 작년에는 줄어드는 쌀 소비량을 감안, 벼 수매량을 예년보다 100t 정도 줄이기까지 했다. 그런데도 재고 발생을 막지 못한 것은 원주산 쌀보다 값이 싼 호남 등 다른 지역농협들이 재고를 줄이기 위해 ‘덤핑’으로 방출한 물량이 원주에도 반입되었기 때문이다.
수확기를 앞둔 현재까지 재고를 안고 있는 농협은 비단 원주농협만이 아니다. 전국적으로 유명한 품질의 쌀을 생산하는 경기·강원 지역 일부 농협을 제외한 거의 모든 지역농협들이 재고로 골치를 앓는다는 게 농협 조합장들의 한결같은 얘기다.
그러다 보니 지역농협간 쌀 판매를 둘러싸고 ‘만인에 대한 만인의 투쟁’이 전개된다. 올 4월 전남 O농협과 S농협이 쌀 브랜드를 둘러싸고 소송을 제기하는 전례 없는 일이 일어난 것도 이런 상황과 무관치 않다. 분쟁은 S농협측이 O농협의 ‘꿈의 쌀’ 브랜드에 대해 무효소송을 제기하면서 시작했으나 O농협측도 이에 지지 않고 S농협을 상표법 위반으로 경찰에 고소, 한때 험악한 분위기로 치닫기도 했다.
O농협 O이사는 “두 농협이 각각의 납품처는 존중하기로 하고 소를 취하했다. 그러나 우리 농협이 97년에 출원해 99년 상표등록을 했기 때문에 상표권은 우리에게 있다”고 주장했다. 이에 대해 S농협 L과장은 “O농협보다 먼저 종자를 도입했고, 판매도 먼저 했다. 재래식 농법으로 생산하는 O농협과는 달리 무공해 농법으로 생산, 전국 50여 개 백화점에 납품하고 있다”고 자랑했다.
반면 지역농협끼리 쌀 판매를 거들다 뜻하지 않게 사고당한 경우도 있다. 전남 H농협은 경북 O농협의 서울 중곡동 직판장에 99년부터 쌀을 납품해 왔다. O농협은 고추를 주로 생산하는 농협. 고추는 9~11월에만 판매하는 계절상품이어서 전남 H농협의 쌀을 위탁판매해 주는 게 오히려 직판장 운영에 도움이 되었다.
그러나 H농협이 올 1~6월 납품 물량에 해당하는 값 7억 원을 결제해 주지 않는다며 O농협을 상대로 소송을 제기하면서 두 농협간 관계는 파탄났다. H농협 K조합장은 “O농협 쪽에서는 자신들과 직접 상관이 없다고 주장하지만 올 4월 O농협에서 발급한 잔액 증명서가 있기 때문에 승소를 확신한다”고 말했다. O농협 L 조합장은 “소송에서 지면 O농협은 바로 구조조정 대상이 될 것이다”며 걱정했다.
사실 가장 손쉬운 쌀 판매 확대방법 가운데 하나가 바로 쌀 외의 농산물을 생산하는 다른 지역농협의 협조를 구하는 것. H농협 K조합장은 “올 4월 조합장 취임 이후 5월 한 달 동안 전국 농협을 순례하면서 재고 처리에 힘쓴 결과 재고를 10만 가마(55kg 조곡 기준)에서 2만 가마로 줄였다”고 자랑했다. 과부 사정은 과부가 알아준다는 얘기가 결코 틀린 말은 아닌 셈이었다.
쌀 판매전이 격화하는 것은 현재 지역농협이 안고 있는 재고미가 심각한 수준이기 때문이다. 농협중앙회에 따르면 지역농협 재고미를 포함, 전체 쌀 재고량은 양곡 연도 기준으로 96년 169만 석으로 떨어졌으나 이후 꾸준히 증가해 98년 559만 석, 99년 502만 석, 2000년 750만 석을 기록했다. 올 이월 재고량은 1118만 석으로 예상한다. 이에 따라 쌀값 폭락 등 ‘쌀 대란’이 우려된다.
쌀 재고가 이처럼 늘어난 것은 해마다 생산량이 수요량을 초과하는 수급구조를 형성해 왔기 때문. 공급 측면에서 보면 최근 5년 간 풍작으로 쌀 생산량이 3600만 석 안팎의 안정세를 유지한데다 MMA(최소시장 접근물량) 쌀(올해의 경우 105만 석)도 시장에 공급되었다. 반면 1인당 쌀 소비량이 96년 104.9kg에서 작년 94.0kg으로 감소한 데서 알 수 있듯 수요는 해마다 줄어드는 상황이다. 과거에는 쌀 재고량이 많아도 지금처럼 문제되지는 않았다. 가령 89~93년까지 5년 간 재고량이 1000만 석이나 되었지만 ‘쌀 대란’ 얘기는 나오지 않았다. 당시는 재고 대부분을 정부가 떠안을 수 있었기 때문이다. 91년의 경우 전체 재고량 1487만 석 가운데 정부가 1421만 석을 떠안았다. 정부 재정에는 부담이 되었지만 그 같은 조절 수단이 있어 올해와 같은 쌀값 폭락 우려는 없었다.
그러나 세계무역기구(WTO) 출범으로 정부 수매량을 제한하면서 사정이 달라졌다. 정부 수매 축소로 민간부문의 재고 부담이 가중하는 것이다. 농협중앙회는 작년 민간 재고는 전체 재고 750만 석 중 129만 석, 올해 민간 재고는 340만 석으로 대폭 늘어날 것으로 추정한다. 95~99년에 정부 수매량은 347만 석 감소한 반면, 같은 기간 RPC(Rice Processing Center: 미곡종합처리장)의 수확기 자체 매입량이 423만 석이나 증가한 데 따른 결과다.
95년 본격 도입한 ‘현대화한 방앗간’ RPC는 물벼를 건조, 저장, 가공해 판매까지 하므로 농민에게 없어서는 안 되는 시설로 자리잡았다. 뿐만 아니라 수확기에 쌀을 수매해 단경기 때 쌀을 방출하기 때문에 과거 정부가 맡은 시장유통 기능 일부까지 담당한다. 현재 쌀을 생산하는 800여 개 지역농협 가운데 경제사업으로 RPC를 운영하는 농협은 모두 199개(민간업자가 운영하는 것까지 포함하면 330개).
민간 부문의 이월 재고량이 증가한다는 것은 신곡을 출하한 후에도 아직 팔지 못한 전년산 구곡이 남아 있다는 의미. 쌀값은 생산량의 대부분을 일시에 출하하는 수확기보다는 전년도 생산량을 거의 소진한 수확기 직전이 비싸다(그 정도를 계절진폭이라고 한다). 그러나 최근 들어서는 민간 재고 급증으로 단경기에도 쌀값이 오르지 않는다. 작년의 경우 계절진폭이 93년 이후 최저 수준인 2.7%를 기록했다.
작년 농협 RPC의 수확기 원료곡 매입 자금은 개소당 평균 60억 원. 조달 금리는 조달 방법에 따라 5~10%로 차이가 났다. 결국 농협 RPC로서는 작년의 경우 계절진폭이 자금 조달 최저 금리에도 미치지 못했기 때문에 벼를 많이, 그리고 오래 가지고 있을수록 큰 손해를 봤다는 얘기가 된다. 실제 작년 농협 RPC는 모두 118억 원의 손실을 봤다. RPC 개소당 평균 6100만 원의 적자가 난 셈이다.
농협 RPC 운영 전국협의회 이봉주 회장(충남 논산시 연무농협)은 “농협중앙회가 올 6월 말 기준으로 가결산을 해본 결과 농협 RPC 적자가 작년 말보다 배 이상 늘어난 총 320억 원, 개소당 평균 1억6100만 원을 기록한 것으로 나왔다. 자칫하다가는 지역농협이 농민 편의를 위해 시작한 사업 때문에 농협 자체가 무너지게 생겼다”고 주장했다. 수확기를 앞두고 일부 농협 RPC에서 수매 거부 결의 논의가 있던 것은 이런 절박한 사정 때문이라는 설명이다. 정부가 지난 8월29일 쌀값 안정을 위한 대책을 발표한 것도 이런 사정을 인식했기 때문. 정부는 이날 올 수확기에 예년보다 200만 석 많은 1325만 석을 정부와 농협, RPC가 매입할 계획이라고 밝혔다. 이 가운데 정부가 직접 수매하는 물량은 575만 석. WTO 규정상 가능한 한 최대 물량이다. 정부는 이와 함께 정부 벼 공매를 최소화해 가능한 한 재고 부담을 정부가 떠안음으로써 민간 유통을 활성화한다는 방침이다.
그러나 정부가 이런 대책을 세웠는데도 올 가을 ‘쌀 대란’은 피할 수 없을 것이라는 비관적인 전망이 나온다. 농협중앙회 고영곤 조사부장은 “쌀값 지지를 위해 필요한 예산을 정부가 충분히 마련하지 못한 것 같다. 공급 과잉 상황에서 쌀값 약세는 필연적인 것으로 보인다”고 말했다. 전국농민단체연합회 김인기 간사는 “정부 대책 발표 이후 올 수확물에 대한 가격이 작년보다 80kg 한 가마당 5000~6000원씩 떨어진다”고 전했다.
전문가들은 WTO 체제하에서 쌀값은 떨어질 수밖에 없다고 말한다. 그렇다고 ‘식량 안보’ 등 이유 때문에 쌀을 포기할 수 없는 상황이라면 쌀값 폭락에 따른 피해를 농민이 고스란히 떠안아서는 안 되는 일. 결국 농가가 쌀 농사를 하면서도 소득을 안정적으로 확보할 수 있는 소득안전망 구축이 필요하다는 얘기다. 농가소득을 직접 지지하기 위한 논농사 직불제 예산 확충이 시급하다는 주장이 나오는 것도 이 때문이다.
미국의 경우 작년에 정부가 직접 농가에 보조해 준 금액은 1호당 1만2000달러. 반면 우리는 이제 겨우 1ha당 50만 원의 직불제 예산 확보가 목표다. 왜 농민단체들이 정부의 적극적 농정을 요구하며 목소리를 높이는지 이해되는 대목이다.
현 재고분을 수확기까지 처분하지 못하면 원주농협은 큰 손실을 감수해야 한다. 수확기가 되어 많은 물량이 쏟아져 나오면 구곡으로 변한 재고미는 헐값으로라도 처분해야 하는데 그것이 쉽지 않기 때문. 이 때문에 농협 내에서는 과장급 이상 직원에게 강제 할당, 이들이 알아서 처분하도록 하자는 아이디어까지 나온다고 한다.
원주농협에서 해마다 수매한 양은 2300t 안팎. 원주시민은 그동안 이를 충분히 소화해 주었기 때문에 올해와 같은 재고 걱정은 없었다. 더욱이 작년에는 줄어드는 쌀 소비량을 감안, 벼 수매량을 예년보다 100t 정도 줄이기까지 했다. 그런데도 재고 발생을 막지 못한 것은 원주산 쌀보다 값이 싼 호남 등 다른 지역농협들이 재고를 줄이기 위해 ‘덤핑’으로 방출한 물량이 원주에도 반입되었기 때문이다.
수확기를 앞둔 현재까지 재고를 안고 있는 농협은 비단 원주농협만이 아니다. 전국적으로 유명한 품질의 쌀을 생산하는 경기·강원 지역 일부 농협을 제외한 거의 모든 지역농협들이 재고로 골치를 앓는다는 게 농협 조합장들의 한결같은 얘기다.
그러다 보니 지역농협간 쌀 판매를 둘러싸고 ‘만인에 대한 만인의 투쟁’이 전개된다. 올 4월 전남 O농협과 S농협이 쌀 브랜드를 둘러싸고 소송을 제기하는 전례 없는 일이 일어난 것도 이런 상황과 무관치 않다. 분쟁은 S농협측이 O농협의 ‘꿈의 쌀’ 브랜드에 대해 무효소송을 제기하면서 시작했으나 O농협측도 이에 지지 않고 S농협을 상표법 위반으로 경찰에 고소, 한때 험악한 분위기로 치닫기도 했다.
O농협 O이사는 “두 농협이 각각의 납품처는 존중하기로 하고 소를 취하했다. 그러나 우리 농협이 97년에 출원해 99년 상표등록을 했기 때문에 상표권은 우리에게 있다”고 주장했다. 이에 대해 S농협 L과장은 “O농협보다 먼저 종자를 도입했고, 판매도 먼저 했다. 재래식 농법으로 생산하는 O농협과는 달리 무공해 농법으로 생산, 전국 50여 개 백화점에 납품하고 있다”고 자랑했다.
반면 지역농협끼리 쌀 판매를 거들다 뜻하지 않게 사고당한 경우도 있다. 전남 H농협은 경북 O농협의 서울 중곡동 직판장에 99년부터 쌀을 납품해 왔다. O농협은 고추를 주로 생산하는 농협. 고추는 9~11월에만 판매하는 계절상품이어서 전남 H농협의 쌀을 위탁판매해 주는 게 오히려 직판장 운영에 도움이 되었다.
그러나 H농협이 올 1~6월 납품 물량에 해당하는 값 7억 원을 결제해 주지 않는다며 O농협을 상대로 소송을 제기하면서 두 농협간 관계는 파탄났다. H농협 K조합장은 “O농협 쪽에서는 자신들과 직접 상관이 없다고 주장하지만 올 4월 O농협에서 발급한 잔액 증명서가 있기 때문에 승소를 확신한다”고 말했다. O농협 L 조합장은 “소송에서 지면 O농협은 바로 구조조정 대상이 될 것이다”며 걱정했다.
사실 가장 손쉬운 쌀 판매 확대방법 가운데 하나가 바로 쌀 외의 농산물을 생산하는 다른 지역농협의 협조를 구하는 것. H농협 K조합장은 “올 4월 조합장 취임 이후 5월 한 달 동안 전국 농협을 순례하면서 재고 처리에 힘쓴 결과 재고를 10만 가마(55kg 조곡 기준)에서 2만 가마로 줄였다”고 자랑했다. 과부 사정은 과부가 알아준다는 얘기가 결코 틀린 말은 아닌 셈이었다.
쌀 판매전이 격화하는 것은 현재 지역농협이 안고 있는 재고미가 심각한 수준이기 때문이다. 농협중앙회에 따르면 지역농협 재고미를 포함, 전체 쌀 재고량은 양곡 연도 기준으로 96년 169만 석으로 떨어졌으나 이후 꾸준히 증가해 98년 559만 석, 99년 502만 석, 2000년 750만 석을 기록했다. 올 이월 재고량은 1118만 석으로 예상한다. 이에 따라 쌀값 폭락 등 ‘쌀 대란’이 우려된다.
쌀 재고가 이처럼 늘어난 것은 해마다 생산량이 수요량을 초과하는 수급구조를 형성해 왔기 때문. 공급 측면에서 보면 최근 5년 간 풍작으로 쌀 생산량이 3600만 석 안팎의 안정세를 유지한데다 MMA(최소시장 접근물량) 쌀(올해의 경우 105만 석)도 시장에 공급되었다. 반면 1인당 쌀 소비량이 96년 104.9kg에서 작년 94.0kg으로 감소한 데서 알 수 있듯 수요는 해마다 줄어드는 상황이다. 과거에는 쌀 재고량이 많아도 지금처럼 문제되지는 않았다. 가령 89~93년까지 5년 간 재고량이 1000만 석이나 되었지만 ‘쌀 대란’ 얘기는 나오지 않았다. 당시는 재고 대부분을 정부가 떠안을 수 있었기 때문이다. 91년의 경우 전체 재고량 1487만 석 가운데 정부가 1421만 석을 떠안았다. 정부 재정에는 부담이 되었지만 그 같은 조절 수단이 있어 올해와 같은 쌀값 폭락 우려는 없었다.
그러나 세계무역기구(WTO) 출범으로 정부 수매량을 제한하면서 사정이 달라졌다. 정부 수매 축소로 민간부문의 재고 부담이 가중하는 것이다. 농협중앙회는 작년 민간 재고는 전체 재고 750만 석 중 129만 석, 올해 민간 재고는 340만 석으로 대폭 늘어날 것으로 추정한다. 95~99년에 정부 수매량은 347만 석 감소한 반면, 같은 기간 RPC(Rice Processing Center: 미곡종합처리장)의 수확기 자체 매입량이 423만 석이나 증가한 데 따른 결과다.
95년 본격 도입한 ‘현대화한 방앗간’ RPC는 물벼를 건조, 저장, 가공해 판매까지 하므로 농민에게 없어서는 안 되는 시설로 자리잡았다. 뿐만 아니라 수확기에 쌀을 수매해 단경기 때 쌀을 방출하기 때문에 과거 정부가 맡은 시장유통 기능 일부까지 담당한다. 현재 쌀을 생산하는 800여 개 지역농협 가운데 경제사업으로 RPC를 운영하는 농협은 모두 199개(민간업자가 운영하는 것까지 포함하면 330개).
민간 부문의 이월 재고량이 증가한다는 것은 신곡을 출하한 후에도 아직 팔지 못한 전년산 구곡이 남아 있다는 의미. 쌀값은 생산량의 대부분을 일시에 출하하는 수확기보다는 전년도 생산량을 거의 소진한 수확기 직전이 비싸다(그 정도를 계절진폭이라고 한다). 그러나 최근 들어서는 민간 재고 급증으로 단경기에도 쌀값이 오르지 않는다. 작년의 경우 계절진폭이 93년 이후 최저 수준인 2.7%를 기록했다.
작년 농협 RPC의 수확기 원료곡 매입 자금은 개소당 평균 60억 원. 조달 금리는 조달 방법에 따라 5~10%로 차이가 났다. 결국 농협 RPC로서는 작년의 경우 계절진폭이 자금 조달 최저 금리에도 미치지 못했기 때문에 벼를 많이, 그리고 오래 가지고 있을수록 큰 손해를 봤다는 얘기가 된다. 실제 작년 농협 RPC는 모두 118억 원의 손실을 봤다. RPC 개소당 평균 6100만 원의 적자가 난 셈이다.
농협 RPC 운영 전국협의회 이봉주 회장(충남 논산시 연무농협)은 “농협중앙회가 올 6월 말 기준으로 가결산을 해본 결과 농협 RPC 적자가 작년 말보다 배 이상 늘어난 총 320억 원, 개소당 평균 1억6100만 원을 기록한 것으로 나왔다. 자칫하다가는 지역농협이 농민 편의를 위해 시작한 사업 때문에 농협 자체가 무너지게 생겼다”고 주장했다. 수확기를 앞두고 일부 농협 RPC에서 수매 거부 결의 논의가 있던 것은 이런 절박한 사정 때문이라는 설명이다. 정부가 지난 8월29일 쌀값 안정을 위한 대책을 발표한 것도 이런 사정을 인식했기 때문. 정부는 이날 올 수확기에 예년보다 200만 석 많은 1325만 석을 정부와 농협, RPC가 매입할 계획이라고 밝혔다. 이 가운데 정부가 직접 수매하는 물량은 575만 석. WTO 규정상 가능한 한 최대 물량이다. 정부는 이와 함께 정부 벼 공매를 최소화해 가능한 한 재고 부담을 정부가 떠안음으로써 민간 유통을 활성화한다는 방침이다.
그러나 정부가 이런 대책을 세웠는데도 올 가을 ‘쌀 대란’은 피할 수 없을 것이라는 비관적인 전망이 나온다. 농협중앙회 고영곤 조사부장은 “쌀값 지지를 위해 필요한 예산을 정부가 충분히 마련하지 못한 것 같다. 공급 과잉 상황에서 쌀값 약세는 필연적인 것으로 보인다”고 말했다. 전국농민단체연합회 김인기 간사는 “정부 대책 발표 이후 올 수확물에 대한 가격이 작년보다 80kg 한 가마당 5000~6000원씩 떨어진다”고 전했다.
전문가들은 WTO 체제하에서 쌀값은 떨어질 수밖에 없다고 말한다. 그렇다고 ‘식량 안보’ 등 이유 때문에 쌀을 포기할 수 없는 상황이라면 쌀값 폭락에 따른 피해를 농민이 고스란히 떠안아서는 안 되는 일. 결국 농가가 쌀 농사를 하면서도 소득을 안정적으로 확보할 수 있는 소득안전망 구축이 필요하다는 얘기다. 농가소득을 직접 지지하기 위한 논농사 직불제 예산 확충이 시급하다는 주장이 나오는 것도 이 때문이다.
미국의 경우 작년에 정부가 직접 농가에 보조해 준 금액은 1호당 1만2000달러. 반면 우리는 이제 겨우 1ha당 50만 원의 직불제 예산 확보가 목표다. 왜 농민단체들이 정부의 적극적 농정을 요구하며 목소리를 높이는지 이해되는 대목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