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여러 한계를 안고 끙끙거리며 산다. 우리를 알게 모르게 얽매는 한계들을 ‘굴레(bondage)’라고 하자. 굴레는 개인적 속성에서 발생하는 것과, 다른 인간이나 집단과 관계에서 발생하는 것으로 나눌 수 있다. 하지만 양자 간 명확한 경계선을 긋기 어렵다. 가난이나 질병 문제도 개인적 차원에서뿐 아니라 사회 전체가 함께 해결해야 한다는 게 근현대사회에 이르기까지 인류가 쌓은 지혜 가운데 하나다.
우리 사회에는 우리를 얽매는 많은 굴레가 있고, 그것이 야기하는 사회갈등 현상이 도를 넘고 있다. 양극화 문제에 따른 빈부 격차 확대, 사회적 사다리의 상실, 을을 대상으로 한 갑의 횡포 등 생각하기만 해도 마음 불편해지는 현상이 산재해 있다.
많은 사람이 아직도 대학 하면 고상하고 공정하며 고도의 지성에 순치된 목가적 풍경을 연상한다. 다른 나라에서 보기 어려운 문민사회의 오랜 역사적 전통, 군사부일체 같은 유교적 사고의 잔존 등이 여전히 작용하는 탓이리라. 하지만 이는 실상과는 괴리가 너무 크다. 대부분은 환상이다. 지금 대학 사회는 어느 곳을 가도 민주주의 사회 기준에서는 도저히 용납하기 어려운 굴레가 발목을 잡는다. 워낙 덩치가 커 제대로 파악하기조차 힘든 사학 비리를 제외하고서도 말이다.
우리의 대학은 대단히 불공정한 사회다. 한국 사회에서 정규직과 비정규직 차별이 가장 심한 곳이 그곳이다. 한 통계에 따르면 시간강사 급여는 정규 교수의 4%에 불과하다고 한다. 급여만이 아니다. 그들은 신분이 아예 다르다고 할 수 있다. 한편, 훌륭한 교수도 있지만 적잖은 교수가 ‘1인 성주(城主)’의 타성에 젖어 오만한 자세로 학생들 위에 군림한다. 학부 학생과는 직접적 접촉이 적지만, 석 · 박사 과정에 있는 대학원생들에게 부당한 착취와 인격 유린으로 일관하는 교수가 없지 않다. 극히 일부 교수에 한정된 일이지만 도덕적 · 법적 일탈 행위로 대학 구성원들의 입에 오르내리는 이도 적잖다.
얼마 전 한 대학에서 ‘텀블러 폭탄’ 사건이 발생했다. 처음 언론보도는 이를 ‘폭탄 테러’ 사건으로 다뤘다. 피의자인 대학원생을 테러범으로 몰며 비난한 것. 하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언론보도는 그와 지도교수 사이에 발생한 갈등의 원인을 찾는 방향으로 확장됐다. 그 학생은 과학고를 조기 졸업하고 학부에서 동아리 회장을 맡는 등 활발한 성격이었고, 그 교수 또한 평판이 나쁘지 않았지만 서로 갈등을 빚었다. 대학 내부 시스템에 뭔가 문제가 있었던 듯 보인다.
“스승에게 감히 그런 짓을 해?” 하는 태도로 학생을 일방적으로 꾸짖는다고 좋아지는 건 하나도 없다. 학생 처지에서도 사태의 전말을 살펴보고, 또한 그런 일이 생긴 원인을 사회적 차원에서 분석해보려는 논리적 이행은 무척이나 바람직한 일이다.
현재 우리의 대학은 결코 상아탑도, 지성의 전당도 아니다. 내부 모순을 감당하지 못한 채 비틀거리고 있을 따름이다. 이럴 때 우리는 지금까지 인류가 축적한 지혜를 활용해야 한다. 공동체의 개입을 통해 해결하려는 노력을 기울여야 한다.
가장 보편적 방법은 법 규범 제정이다. 학생의 인권을 보장하고, 학생들을 대상으로 한 교수의 갑질을 막으며, 대학 내 극단적이고 잔인한 차별 구조를 완화하는 내용의 입법이 시급하다. 굴레에서 벗어날 수많은 얼굴이 애를 태우며 간절한 마음으로 쳐다보고 있는 듯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