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공화국 비자금’ 의혹이 한창 제기되던 1995년 10월 29일 동아일보 “김옥숙 씨 ‘별도 주머니’ 소문” 제하 기사의 한 대목이다. 노태우 전 대통령의 부인 김옥숙 여사를 둘러싼 비자금 의혹은 당시에도 ‘소문’으로만 회자됐다. 하지만 최근 딸 노소영 아트센터 나비 관장과 최태원 SK그룹 회장 간 이혼소송 항소심을 계기로 의혹이 다시 불거지고 있다. 29년 만에 이른바 ‘청와대 안방 비자금’ 의혹이 다시 소환된 것이다.
노태우 전 대통령의 부인 김옥숙 여사. [뉴스1]
항소심에서 ‘300억 비자금’ 제기한 노소영
두 사람 간 이혼소송 항소심에서 노 관장 측이 1조3808억 원의 재산분할 판결을 이끌어낸 건 SK㈜ 지분 등 최 회장이 선친으로부터 상속받은 재산 상당수가 노 관장의 아버지 노태우 전 대통령의 기여로 형성된 것이라는 주장이 받아들여졌기 때문이다. 노 관장 측은 1심에서 공개하지 않았던 ‘300억 원 비자금’ 주장을 항소심 공판 과정에서 처음 제기했다. “아버지 노태우 전 대통령이 1991년쯤 비자금 300억 원을 최종현 전 회장에게 건네고 어음을 담보로 받았다”고 주장한 것으로, 이는 1995년 ‘노태우 비자금’ 수사와 이듬해 대법원 판결에서도 드러나지 않았던 내용이다.항소심 재판부는 노 관장 측 주장을 받아들이면서 이 자금이 최종현 전 회장의 자금과 섞이면서 선경의 태평양증권 인수 및 최태원 회장의 대한텔레콤 지분 확보에 쓰였다고 판단했다. 최 회장의 SK그룹 지분 형성 과정에 노 씨 일가의 도움이 있었다고 명시한 것이다.
하지만 법조계 일각에서는 항소심 판단에 대해 의구심이 나오고 있다. 노 관장 측이 제시한 ‘300억 원 비자금’의 근거가 김 여사의 시기 불명 ‘선경 300’ 메모, 50억 원 어음 사진 일부 및 노 관장의 진술뿐이기 때문이다. 해당 금액이 구체적으로 어떤 경로를 통해 선경에 제공됐는지는 규명되지 않았으며, 어음 행방조차 불확실한 상태다. 노 관장 측은 2013년 추징금 납부를 위해 100억 원을 마련하고자 50억 원짜리 어음 2장을 SK에 건네는 데 썼다고 주장했지만, SK는 사실무근이라고 반박하고 있다.
‘300억 원 비자금’ 주장은 오히려 새로운 논란을 불러일으키고 있다. 그동안 ‘추징금 완납’을 주장해온 노 전 대통령 일가에 역풍으로 작용할 수 있다는 것이다. 나아가 29년 전 대대적인 검찰수사와 재판에서도 실체가 규명되지 않았던 ‘안방 비자금’의 실마리를 풀 단초가 될 수 있다는 시각도 있다.
노 전 대통령 재임 당시부터 김 여사가 별도로 조성해 관리하는 비자금이 있다는 소문이 무성했다. 1995년 10월 국회 대정부 질문에서 박계동 당시 민주당 의원의 폭로로 본격화된 6공 비자금 의혹은 김 여사에게로 옮겨붙었다. 노 전 대통령이 대규모 비자금을 실토하며 대국민 사과를 할 당시 세간에 알려진 비자금 1조 원과 실제 밝혀진 액수 간 차이가 상당하자 김 여사가 따로 챙긴 ‘안방 비자금’에 대한 의혹이 제기된 것이다. 6공 비자금 의혹이 제기된 직후 언론 지면에는 “노태우 정부 청와대에서 이른바 ‘내실(內室)’이라 일컫는 김옥숙 씨 거처는 노 전 대통령의 ‘집무실’보다 강하다는 얘기가 정설” “매우 ‘가정적’이던 노 전 대통령은 김 씨의 행태에 별다른 제동을 걸지 않았다”는 말이 회자됐다. 당시 민주당 비자금 진상조사위원장이던 강창성 의원은 “김옥숙 여사의 친인척이 관리하는 것(비자금)은 전혀 노출되지 않는다”면서 “김 여사가 비자금 2000억 원을 별도 관리하고 있다”고 주장하기도 했다.
이후 노 전 대통령 비자금 의혹에서 김 여사의 이름은 지속적으로 거론됐다. 2005년 대검 중앙수사부는 약 12억 원이 입금된 김 여사 명의 예금계좌 2개를 추가로 발견해 추징했다. 김 여사는 가족이 별도로 관리해오던 돈이라고 해명했지만 검찰은 비자금으로 추정했다. 비자금 여부에 대한 강도 높은 조사가 계속되자 김 여사는 “정 그렇다면 가져가라”며 마지못해 납부 의사를 밝혔고, 검찰은 “비자금이라는 강한 의심이 있지만 추징에 응한 이상 자금 출처는 따로 조사하지 않겠다”고 밝힌 바 있다.
이후 김 여사는 비자금 추징 과정에서 친인척과의 소송전 전면에 나서기도 했다. 당시 소송의 뼈대는 “노 전 대통령이 맡긴 비자금을 돌려달라”는 것으로, 이와 관련해 새로운 부동산과 차명계좌가 폭로되는 등 이전투구 양상을 띠었다. 2009년 노 전 대통령이 동생 재우 씨와 조카 호준 씨를 상대로 “비자금으로 설립한 회사를 돌려달라”고 낸 소송에선 김 여사가 직접 증인으로 나서는 등 적극적인 태도를 보였다. 전직 대통령 부인이 민형사소송에서 법정에 출석한 첫 사례였다.
김 여사는 2013년 검찰에 “친인척에게 차명으로 맡긴 비자금을 국가가 환수해주면 미납 추징금 231억 원을 모두 납부하겠다”며 탄원서를 내기도 했다. 당시 노재우 씨 측 변호인은 방송 인터뷰에서 “김 여사가 소송전을 주도하고 있다”고 밝힌 바 있다.
최태원 SK그룹 회장(왼쪽)과 노소영 아트센터 나비 관장이 4월 16일 서울 서초구 서울고법에서 열린 이혼소송 항소심 공판에 출석했다. [뉴스1]
은닉 비자금 드러나면 ‘추징금 완납’ 퇴색될 수도
향후 최 회장과 노 관장의 이혼소송 상고심에선 노 관장 측이 제시한 김 여사 메모 등의 증거 능력 인정 여부가 핵심 쟁점이 될 것으로 보인다. 이 과정에서 노 관장 측은 증거 신빙성을 입증하는 동시에 어머니를 둘러싼 새로운 비자금 의혹에 대해서도 규명해야 할 것으로 보인다. 그간 노 전 대통령 일가는 2013년 추징금 2628억 원을 완납하는 등 6공 시절 과오를 씻는 데 적극적이라는 평가를 받았다. 이런 이미지와 달리 또 다른 은닉 비자금이 있던 것으로 확인된다면 이혼소송과 별개로 노 전 대통령 일가에 대한 대중의 기억은 29년 전 모습으로 되돌아갈 수 있다는 지적이 나오는 이유다.김우정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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