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정치민주연합 박영선 원내대표가 9월 17일 서울 여의도 국회 당대표회의실에서 입장표명 기자회견 후 고개 숙여 인사하고 있다.
# 박영선의 세 번째 오판
잠적 나흘 뒤인 9월 17일 박 원내대표는 “지금부터는 저에게 주어진 책임만 짊어지고 가겠다”며 당무 복귀를 선언했지만, 제1 야당 대표의 나흘간 잠적이 남긴 후폭풍은 거세다. 국민적 신뢰 붕괴는 물론, 고질적인 계파 갈등이라는 새정치연합의 시한폭탄이 차기 지도부를 선출할 전당대회 경선 룰을 결정하는 과정에서 언제든 터질 수 있다는 우려도 곳곳에서 흘러나온다. 정치권 지각변동은 ‘원포인트 릴리프’인 신임 문희상 비상대책위원장 손에 달렸다는 얘기가 나오는 이유다.
박 원내대표가 9월 11일 보수 성향 인사로 지난 대통령선거(대선)에서 새누리당 박근혜 대선후보를 도왔던 중앙대 이상돈 명예교수를 당 비대위원장으로 영입하려 한다는 소식이 전해지자 새정치연합은 벌집을 쑤셔놓은 것처럼 들썩였다. 강경파는 물론 중도 진영에서도 비판 목소리가 나왔지만, 박 원내대표 측은 “숨겨놓은 퍼즐 한 조각이 있다”며 자신만만한 표정이었다. 박 원내대표가 얘기한 퍼즐 한 조각은 다름 아닌 당내 최대 계파인 친노(친노무현) 진영과 가까운 서울대 안경환 명예교수의 영입. 보수 진영의 이 교수와 진보 진영의 안 교수 투톱 체제를 통해 ‘외연 확대와 당 혁신’이란 두 마리 토끼를 잡겠다는 포석이었던 것이다.
외부에서 비대위원장을 영입하겠다고 밝혔을 때만 해도 박 원내대표의 표정은 무척이나 밝았다. 이 교수의 영입건과 관련해선 친노계 좌장인 문재인 의원과도 사전에 협의했기 때문에 세월호 특별법 협상 과정에서 불거진 절차상의 문제가 제기되지는 않을 것으로 내다봤다. 하지만 결과적으로 박 원내대표의 판단은 두 차례 세월호 특별법 합의안에 이어 세 번째 오판으로 드러났다. 한 친노 의원은 “새정치연합은 박영선과 문재인의 사당(私黨)이 아니다”라며 직격탄을 날렸다.
“박 원내대표에게 ‘왜 이 교수 영입 얘기를 의원들에게 귀띔도 하지 않았느냐’고 물으니까 문 의원과 상의했다고 하더라. 문 의원이 얘기하면 우리가 다 동의해야 하나. 문재인, 김한길, 문희상 등 몇몇 사람만 모아놓고 얘기한다고 해결되는 문제가 아니다. 박 원내대표 본인은 여러 차례 언론 인터뷰에서 계파 정치가 문제라고 지적해놓고선 이번에는 계파를 이용해 당내 의사 통로를 막으려 했다.”
박 원내대표의 비대위원장 영입 내홍 속에 소속 의원들은 서로에 대한 불신과 ‘이대론 안 된다’는 위기감이 더욱 커졌다. 새정치연합 고위 당직자는 “이번 사태로 당은 깊은 생채기를 입었다”며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당내 강경파가 처음엔 박 원내대표를 밀었다가, 박 대표가 중도노선을 강화하려는 움직임을 보이자 반발한 게 이번 파동의 핵심 아닌가. 앞으로 누구를 당 얼굴로 세울지 모르지만 누가 되든 무슨 힘을 갖고 일을 하겠나. ‘이상돈, 안경환 영입 괜찮다’고 하는 온건 중도 인사는 찾아볼 수 없었다. 왜냐? 그 말 했다가는 (강경파에게) 물어뜯기니까. 강경파는 웃통 벗고 달려들지만 온건파는 싸움을 피한다. 그러니 침묵할 수밖에. 우리가 집권한 것은 DJP(김대중+김종필) 연합, 노무현과 정몽준의 단일화로 중도를 먹어서 가능하지 않았나. 중도 외연 확장에 반대하고 선명 야당을 주장하는 시민단체, 학생운동권 출신 강경파는 집권보다 국회의원 한 번 더하는 걸 원하는 것 같다. 호남세가 강한 수도권 지역구 의원은 지역구 골수 지지층을 보고 정치하면 되지만, 그럼 집권은 요원하다. 박 원내대표가 ‘탈당 카드’로 충격요법이라는 몸부림을 친 게 이해가 된다.”
박 원내대표의 오판은 당의 유력 대선주자인 문 의원에게도 불똥이 튀었다. 박 원내대표와 문 의원, 그리고 이 교수 간 3자 회동 과정에서 있었던 대화 내용을 놓고 양측의 진실공방이 불거지면서 문 의원 역시 적잖은 정치적 타격을 받았다.
박 원내대표 측에선 “문 의원도 동의해놓고선 막판에 상황이 불리해지니까 발 빼기를 한다”며 불만을 터뜨렸고, 친노 진영에선 “어찌됐든 문 의원이 막후에서 이 교수 영입에 개입한 것은 부적절했다”는 반응이 나왔다.
문 의원이 당내 친노계 의원들로부터 비판받은 것은 이례적인 일이다. 문 의원이 제2차 남북정상회담 회의록 공개, 세월호 특별법 제정을 촉구하는 단식농성 등 굵직한 현안의 중심에 섰을 때마다 친노 진영에선 문 의원을 적극 엄호하고 나섰다. 문 의원이 당내 유력 대선후보인 만큼 지켜줘야 한다는 생각이 강했다.
# 문재인 책임론 부상
새정치민주연합 소장파 의원들이 9월 17일 서울 여의도 국회 의원회관에서 긴급 의원단 모임을 갖고 박영선 원내대표 거취 문제에 대해 심각한 표정으로 논의하고 있다.
또 다른 친노계 인사는 “언론에서 문 의원을 ‘친노의 좌장’이라고 표현하는데 엄밀히 말하면 문 의원은 ‘친노의 상징’에 가깝다”고 지적했다.
“문 의원은 지난 대선에서 48.0%를 득표했고 국회의원 임기 반환점을 돈 독립적인 정치인이다. 친노의 범주가 아니라 그 스스로가 친문(친문재인)계의 수장이며 노무현 전 대통령과 가까웠던 친노의 상징 인물에 가깝다. 오히려 친노의 좌장은 이해찬 전 대표라 할 수 있다. 이 전 대표가 문 의원과 안 지사 사이에서 어떤 정치적 태도를 취하느냐에 따라 범친노 진영도 요동칠 것으로 보인다.”
# 암중모색 안철수
새정치연합 안철수 전 공동대표는 7·30 재·보궐선거(재보선) 패배 이후 정중동 행보를 이어가고 있다. 안 전 대표는 9월 1일과 3일 국회 본회의에 참석한 뒤 공식 외부행사에는 모습을 드러내지 않고 있다. 그 대신 10월 국정감사에 맞춰 상임위원회인 보건복지위원회 현안을 점검하고 외부 교수들로부터 정책 자문을 받고 있는 것으로 전해졌다. 안 전 대표는 9월 16일에도 국회 의원회관에 들러 한 시간가량 머물면서 외부 인사들을 잇달아 만났다. 추석 연휴에는 미국으로 출국해 유학 중인 딸을 만난 뒤 지난 주말 귀국하는 등 개인 일정을 소화했다. 추석을 앞두고는 옛 대선캠프 인사들에게 한과 선물세트를 돌리기도 했다.
물밑에선 다양한 그룹의 당내 인사를 만나면서 정치 전면에 복귀할 시기를 저울질하는 모습도 포착된다. 최근 중진급 의원들을 만난 데 이어 9월 19일쯤에는 7·30 재보선 당선인들과 오찬회동도 예약했다.
하지만 최근 당의 극심한 내홍에 대해선 극도로 말을 아끼고 있다. 일부 측근이 “비대위원장 영입 등과 관련해 박 원내대표의 결정에 힘을 실어줘야 한다”고 제안했지만, 안 전 대표가 받아들이지 않은 것으로 전해졌다. 안 전 대표 측 관계자는 “섣불리 전면에 나설 경우 의도치 않게 권력투쟁에 휘말릴 수 있다”며 “지금은 과거를 복기하면서 성찰의 시간을 가질 때”라고 설명했다.
안 전 대표는 9월 16일 국회 의원회관에서 본보 기자와 만난 자리에서도 “현재로선 입장을 내놓을 게 없다”고 밝혔다.
# 야당發 정계 개편 꿈틀
9월 18일 오후 서울 여의도 국회에서 열린 새정치민주연합 비상대책위원장 추천 회의에서 비대위원장으로 추대된 문희상 의원(왼쪽)이 박영선 원내대표와 악수하고 있다.
박 원내대표가 복귀 명분으로 의원 전수조사를 했다는 주장도 나온다. 강경파에게 휘둘릴 수 있는 의원총회보다 상대적으로 안전한 전화조사를 통해 국회 복귀 명분을 확보했다는 것이다.
그렇다고 해도 문희상 비대위원장이 넘어야 할 산은 한두 가지가 아니다. 조직강화특별위원회(조강특위) 구성을 더는 미룰 수 없는 탓에 새로운 비대위는 무엇보다 조강특위 구성에 전념해야 하는 상황이다. 조강특위는 전당대회에서 당대표 선출권을 갖는 대의원을 선정하는 일에 관여하는 지역위원장을 임명할 수 있어 각 계파 간 치열한 다툼이 예상된다. 당 관계자는 “당내 분란을 막기 위해 조강특위 구성이 계파 나눠 먹기로 갈 경우 혁신은 물 건너가게 된다”고 말했다.
조경태 의원은 “비대위원장과 당대표 선출에서 또다시 계파 갈등이 재현될 게 뻔한 상황이다. 차라리 당을 해체해 헤쳐 모여 하는 게 낫다. 이런 생각에 동조하는 분도 꽤 있다”고 말했다. 이에 대해 영남의 한 지역위원장은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박 원내대표의 나흘간 잠적이 ‘분당(分黨)’ ‘탈당(脫黨)’을 심각하게 고민하게 하는 계기가 된 건 사실이다. 영남 지역에선 ‘선명 야당’보다 중도 외연 확장을 요구하는 목소리가 높은데, 중도 확장을 하려는 지도부를 저렇게 흔들면 어떻게 수권정당이 가능하겠나. 국민도 세월호 특별법 때문에 꽉 막힌 정국을 풀어나갈 합리적인 중도 야당의 탄생을 기대하는 거 같다. 당장 국고보조금 등 재정 문제가 있지만 다음 당대표 선출 과정에서 또 한 번 계파 갈등이 불거지면 ‘이대론 안 된다’는 의원들이 ‘행동’할 수도 있다. 물론 영입 인물과 세를 봐야 하지만…. 어쨌든 의원총회에서나 SNS(소셜네트워크서비스)에서나 막말, 고성, 몸싸움을 하는 강경파 의원은 국민과의 의사소통을 가로막는 걸림돌이라는 것을 새삼 깨달았다. 이런 의원들은 국회의원 품위 유지 차원에서라도 당 윤리위원회에서 당원권을 정지하고 공천에 불이익을 줘야 중도 온건파가 민심을 전달할 수 있다.”
새정치연합의 내홍은 일단 봉합됐지만, 문 비대위원장이 도처에 숨겨진 지뢰를 어떻게 제거할지 지켜볼 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