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남산의 부장들’의 인기 독주를 이끄는 이병헌. [사진 제공=쇼박스]
‘남산의 부장들’은 1979년 10월 26일, 김재규 중앙정보부장이 박정희 대통령(이하 박통)을 암살하기까지 40일간의 기록을 그린 영화다. 김충식 가천대 교수가 ‘동아일보’ 기자 시절 2년 넘게 연재한 취재기를 엮은 동명의 책을 토대로 5·16 쿠데타를 함께 도모했던 인물들이 왜 비극적 결말을 맞이했는지에 초점을 맞췄다.
익히 알려진 사건을 다뤘음에도 영화는 관객과 평단으로부터 “새롭다”는 평을 듣고 있다. 한국 현대사의 변곡점인 10·26 사태와 그 배경을 김재규의 시점에서 재조명하고, 등장인물의 심리를 섬세하게 묘사한 점이 주효했다는 분석이 나온다. 특히 중앙정보부장 김규평 역을 맡은 이병헌(50)에 대한 찬사가 줄을 잇는다.
김재규를 모티프로 한 김규평은 영화 속에서 박통(이성민 분)을 보좌하는 경호실장 곽상천(이희준 분)과 끊임없이 대립각을 세운다. 부마항쟁에 참여한 시민들을 “탱크로 다 밀어버려야 한다”고 말하는 곽상천과 달리 그는 무력 진압을 반대하고 김영삼 의원 제명을 취소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이런 두 사람의 심리를 이용해 박통은 10·26 사태 40일 전, 미국 청문회를 통해 한국 정권의 실체를 고발한 전 중앙정보부장 박용각(곽도원 분)을 처리하는 문제를 두고 충성 경쟁을 부추긴다.
‘내부자들’에 이어 이번 작품에서 다시 이병헌과 손발을 맞춘 우민호 감독은 “김규평의 심리 묘사가 무엇보다 중요했는데 배우가 100% 이상의 빙의 연기를 보여주었다”며 만족감을 숨기지 않았다. “각하, 정치를 대국적으로 하십쇼” “사람에겐 인격이 있고, 국가에는 국격이라는 게 있어” 등 김규평의 대사도 화제다. 또 한 번, 결이 다른 연기로 이름값을 톡톡히 해낸 이병헌을 늦겨울의 한복판에서 만났다.
이병헌이 ‘남산의 부장들’ 촬영에 한창이다. [사진 제공=쇼박스]
개인적 감정과 생각 철저히 배제
-영화에 대한 반응이 뜨겁다. 어떤 점에 매료돼 출연을 결정했나.“작품을 선택할 때는 항상 그 안에서 벌어지는 이야기와 얽히고설킨 감정들이 주는 재미를 가장 중시한다. 이 이야기는 다른 작품에서도 많이 다룬 정치적 사건을 소재로 했지만 정치적인 시각으로 접근하지 않고 사람의 감정과 미묘한 관계에 포커스를 맞춘 것이 차별화된 매력 포인트였다.”
-전작 ‘백두산’을 찍을 때처럼 애드리브를 넣었나.
“‘백두산’은 팝콘 영화여서 배우가 상상력을 발휘해 재미있게 만들어나갈 수 있는 여지가 많았다. 그에 비해 이번 작품은 ‘남한산성’처럼 역사를 다뤘지만 누구나 다 아는 중대한 사건과 실존 인물 이야기라서 감정을 더 증폭시키거나 하지 않은 말을 애드리브로 하는 것은 굉장히 위험한 일이다. 개인적인 감정이나 생각을 철저히 배제하고 실존인물이 했던 말과 행동을 내 자신에게 온전히 설득시키려 했다. 내가 설득돼야 연기로 관객들을 이해시킬 수 있기 때문이다. 근현대사의 변곡점이 된 사건이다 보니 대통령 암살이 대의를 위해서였는지, 소의를 위해서였는지. 계획적이었는지, 우발적이었는지를 궁금해 하는 사람이 많은데 이처럼 역사적 미스터리로 남아있는 지점들을 영화가 살짝이라도 아는 것처럼 규정짓지 않도록 촬영 전부터 감독님과 누누이 이야기했다.”
-작품을 준비하는 과정에서 원작도 참고했나.
“제작발표회 때 원작을 봤다고 했는데 알고 보니 내가 본 책이 원작이 아니었다. 여러 책과 영상, 직간접적으로 그 사건에 대해 아는 분들과의 대화가 인물을 형상화하는 데 많은 도움을 주었다.”
-연기하면서 중점을 둔 부분이 있다면.
“관객들이 감정 이입돼 김규평의 심리를 따라가다가 그가 욱 하는 지점에서는 ‘왜 저렇게까지?’ 하는 느낌을 받기를 바랐다. 다혈질이라는 점도 슬쩍 슬쩍 비칠 수 있게…. 김규평이 억눌렀던 감정이 말미에 툭 하고 터질 때 이질감이 폭발하기를 바랐다고나 할까. 그러다 잠깐 자기를 객관화하는 순간이 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바닥에 흥건한 피에 미끄러질 때가 바로 그런 경우다. 그제서야 상황을 잠깐이나마 객관적으로 인지할 것 같더라. 차안에서 양말에 묻은 피를 보는 순간에는 또 다른 감정에 휩싸이고…. 그렇게 객관과 주관, 감정과 이성을 오가다 ‘어디로 갈까요?’라는 물음을 듣는 순간 혼돈의 끝과 같은 느낌을 보여주려고 했다.”
-배우들과의 연기 호흡은 어땠나.
“이성민, 곽도원, 이희준 씨 모두 처음으로 연기 호흡을 맞춘 배우들이다. 곽도원 씨가 ‘놈놈놈’이라는 영화에 단역으로 출연한 적이 있다고 하는데 그때는 호흡을 맞출 기회가 없었다. 다들 연기를 잘해 카메라 앞에서 마주할 때마다 긴장됐지만 또 한편으로는 영화에서 주거니 받거니 하는 감정들이 어떤 시너지 효과를 발휘할까 싶어 하루하루가 기대됐다. 특히 이성민 씨와 첫 리허설을 한 날을 잊을 수가 없다. 이성민 씨가 분장을 하고 나오는데 포스 자체가 압도적이라 절로 감탄사가 나왔다.”
'남산의 부장들' 촬영 중인 이병헌. [사진 제공=쇼박스]
계속 자가 발전하는 배우
-가장 기억에 남는 장면을 떠올린다면….“파리에서 끔직한 사건이 벌어지는 동안 이성민, 이희준 씨와 극장에 나란히 앉아 영화를 보는 장면이다. 숨소리마저 크게 들릴 정도의 정적이 흐르지만 머릿속은 어느 때보다 요란하게 요동치고 있는 것을 대사 없이 표현하기가 정말 힘들었다.”
-1991년 KBS 14기 공채 탤런트로 데뷔했다. 이후 TV와 스크린을 오가며 쉼 없이 활동했다. 그럼에도 지금까지 한번도 ‘자기 복제를 한다’는 평을 받은 적이 없다. 그 비결이 뭔가.
“자기 복제를 의식적으로 경계하며 작품을 선택한 적은 없다. 전작과 장르나 톤이 다른 작품을 차기작으로 선택한 덕분이 아닌가 싶다. 하지만 어떤 캐릭터를 맡든 내가 지닌 색깔이 묻어나지 않을 수는 없다. 자기 복제를 무조건 지양해야 한다고도 생각지 않는다. 어떤 그릇에 담기느냐에 따라 다른 모양으로 나타나는 물 같은 배우도 좋은 배우지만, 특유의 톤을 다음 작품에서 좀 더 깊이 있게 보여주는 배우 역시 훌륭하다고 생각한다.”
-볼 때마다 깊이를 더하는 배우가 누군가.
“이번 영화를 같이 한 배우들이 그런 경우다. 그동안 출연한 작품들을 많이 보지는 못했지만 촬영을 함께하면서 계속 자가 발전하는 배우라는 느낌을 받았다.”
-배우들 간에 경쟁의식이 생길 법도 한데….
“그런 마음이 생기더라도 배제해야 한다는 주의다. 전체적인 밸런스를 위해서다. 각 신마다 강해 보여야 하는 캐릭터가 있다. 그런데 다른 배우가 더 세게 존재감을 드러내려 하면 감독이 의도한 밸런스가 깨진다. 전체적인 균형이 어그러지면 관객이 좋게 평가할 리 없다. 그게 더 큰 손해다.”
-이번 영화를 정치적으로 해석하는 시선도 있다. 총선을 석 달 남짓 앞두고 개봉돼 더 그런 듯하다.
“이 영화는 사실 ‘백두산’보다 먼저 촬영이 끝났다. 원래 작년 여름이나 가을에 개봉될 예정이었다. 그런데 후반 작업에 공을 들이고 경쟁작들이 쏟아져 나오는 시기를 피하다 보니 그 시기가 미뤄져 1월 22일 개봉하게 된 것이다.”
할리우드의 꾸준한 러브콜을 받는 이병헌은 올해 체력 관리에 더욱 힘쓸 계획이다. [사진 제공=쇼박스]
체력관리에 더 신경 쓸 계획
-인터뷰를 할 때마다 다른 느낌을 받는다. 작품에서 살아낸 인물의 감성이 인터뷰 중에도 묻어난다고 할까.“배우와 작품 속 캐릭터는 유기적 관계다. 작품을 통해 계속 다른 인물과 새로운 이야기를 만나면서 배우의 인격도 완성되는 것 같다. 자신이 연기한 캐릭터의 닮고 싶은 부분을 흡수해 차곡차곡 쌓아가기 때문이다. 어릴 적 나를 돌아보면 지금과 많은 점이 달랐다. 그때는 성질 급하고 덤벙거리고 누구보다 멋있어 보이려 했던 것 같다(웃음).”
-오랜 연기 경험과 그 노하우를 디딤돌 삼아 영화감독으로 데뷔한 배우가 꽤 있다. 그런 꿈을 품어본 적이 있나.
“감독 일을 해보고 싶다는 욕망을 행동으로 옮기는 용감함과 자기만의 어떤 세계가 있다는 자체가 부럽다. 그런 능력이 있으면 얼마나 좋을까 하는 생각을 해본 적은 있지만 잘 해낼 자신이 없다. 자신 없는 일을 막연한 기대감으로 시도하고 싶진 않다.”
-대중은 물론 후배들 사이에서 ‘연기의 신’으로 통한다. 자신의 연기에 대한 높은 기대치가 부담스럽지는 않나.
“나를 생각해주는 그 고마운 마음만 받고, 부담감이나 책임감은 머리나 마음에 담아두지 않는다. 그건 배우에게 좋은 태도가 아닌 것 같다. 부담감이나 책임감이 어깨를 짓누르면 연기가 경직될 수밖에 없다. 오히려 그런 감정들을 털어냈을 때 창의적이고 자유로운 연기가 나온다.”
-권상우 씨가 “정우성, 이병헌 형과 함께 ‘오션스11’ 같은 영화를 찍고 싶다”고 최근 한 인터뷰에서 밝혔다. 본인 생각은 어떤가.
“‘오션스11’가 엄청 좋아하는 영화는 아니지만 배우들이 저마다 자기 욕심을 조금씩 내려놓고 작품만을 생각해 참여하면 재미있는 작품이 탄생될 것 같다.”
-새롭게 경험하고 싶은 역할이 있다면.
“새롭게 해보고 싶은 감정 상태는 있지만, 앞으로 도전하고 싶은 직업군이나 캐릭터가 따로 있지는 않다. 지금까지 느껴본 적 없는 감정이나 아직 사용하지 못한 감정을 만날 수 있는 작품이 들어오면 관심이 갈 것 같다.”
-할리우드 활동이 최근 들어 뜸해진 것 같다.
“출연 제의는 꾸준히 들어오는데 촬영 일정을 맞추기가 어렵다. 국내 작품의 촬영 스케줄과 번번이 겹쳐 엄두를 내지 못하고 있다. 그래서 중국이나 일본 배우들은 아예 활동을 접고 현지에 가 있기도 한다.”
-할리우드 입성에 도전한 배우는 많지만 꾸준히 러브콜을 받는 경우는 흔치 않다. 그런 면에서 할리우드 진출에 성공한 배우로 첫손에 꼽힌다. 연예계에서는 뛰어난 연기력과 언어 구사 능력이 뒷받침이 됐다고 분석한다. 본인이 생각하는 성공 비결은 뭔가.
“아직 할리우드 입성에 성공했다고 생각지 않는다. 좀 더 나를 대표할 만하다고 판단되는 작품이 나왔을 때 만족스러운 감정이 들 것 같다. 할리우드에서 나를 계속 찾는 건 좋은 무술감독쯤으로 생각해서가 아닐까 싶다. 하하하. 올해부터 체력 관리에 더욱 신경 쓸 계획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