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월22일 대국민 사과 및 퇴진 성명을 발표하는 ‘제우스’ 이건희 삼성그룹 회장. 그의 ‘테티스’와 ‘아이가이온’은 누구일까.
‘삼성신화 계속’ ‘삼성신화를 파헤친다’ ‘삼성신화는 깨지나’ ‘삼성신화 해체’ ‘무노조 삼성신화’….
삼성그룹을 이야기할 땐 늘 ‘신화’라는 단어가 따라붙는다. 그냥 ‘삼성’이라고만 하면 뭔가 빠진 것 같다. 왠지 ‘신화’가 들어가야 자연스럽다. 그래서 토론회 단골 주제도 ‘한국사회와 삼성신화’다. 서점에서 잘나가는 책들도 ‘삼성신화의 원동력 특급 인재경영’ ‘삼성신화는 없다’식으로 꼭 ‘삼성신화’를 걸고 넘어간다.
삼성그룹은 그리스 신화와 닮은꼴이다. 제우스는 아버지 크로노스와 10년 전쟁을 벌인 끝에 ‘신들의 제왕’이 된다. 크로노스도 그의 아버지 우라노스에게서 권력을 찬탈했다. 이는 신들의 세계에서도 ‘권력이양 과정은 순탄치 않다’는 것을 뜻한다.
이건희 회장은 삼성그룹의 제우스다. 그는 1993년 “삼성은 이미 1986년에 망한 회사”라며 ‘신경영’을 선언한다. 과거 아버지 시대와 분명하게 선을 긋겠다는 것이다. 그는 “삼성전자는 암 2기, 삼성중공업은 영양실조, 삼성건설은 영양실조에 당뇨병, 삼성종합화학은 선천성 불구기형으로 처음부터 잘못 태어난 회사, 삼성물산은 전자와 종합화학을 합쳐서 나눈 정도의 병”이라고 병명까지 언급한다.
변신능력은 시대변화 최선의 생존전략
제우스가 아버지 ‘티탄시대’를 마감하고 올림포스의 새 시대를 선포한 것과 유사하다. 이 회장이 취임한 1987년부터 ‘신경영’ 1단계 사업이 마무리된 시점인 1996년까지의 기간도 제우스가 구세대 티탄족과 싸운 10년 전쟁과 일치한다.
이 회장의 신경영 핵심은 ‘마누라와 자식 빼고는 다 바꾸라’는 것이다. 그는 먼저 자신부터 변하라고 주문했다. 변하기 싫은 사람은 변하지 않아도 좋은데 ‘남들 뒷다리만 잡지 말아달라’고 했다.
제우스도 변신의 귀재다. 그는 마음에 드는 여자가 있으면 그 현란한 변신의 재주로 그녀의 마음을 사로잡았다. 그녀가 좋아하는 것이라면 백조, 황소, 여자의 남편, 심지어는 황금 소나기로도 변신했다. 제우스의 다양한 변신능력은 바로 변화를 향한 갈망을 상징한다.
고려 태조 왕건은 지방호족들을 우호세력으로 만들기 위해 20여 명이나 되는 아내를 얻었다. ‘인도유럽어족의 이방신(神)’ 제우스도 토착신을 흡수·통합하기 위해서는 수많은 여인을 아내로 맞이할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제우스의 변신능력은 바로 시대변화에 대응하는 최선의 적응능력이자 생존전략이었다.
제우스는 하늘의 신이다. 그의 아버지 크로노스도 하늘의 신 우라노스의 아들이다. 3대가 모두 하늘을 지배하는 신이다. 제우스의 무기는 번개와 천둥이다. 그만큼 제우스는 결단력이 빠르다. 한번 결심하면 번개처럼 실행한다. 제우스의 새인 독수리도 그의 단호한 성격을 대변한다. 독수리는 조용히 하늘을 선회하다 먹이를 발견하는 순간 쏜살같이 하강해 낚아챈다.
‘별 셋’을 뜻하는 ‘삼성’이라는 그룹 이름도 하늘이 배경이다. 하늘의 신 제우스처럼 이 회장도 기회가 왔다고 생각하면 독수리같이 놓치는 법이 없다. 그는 틈만 나면 사원들에게 ‘5~10년 후에 무엇을 먹고 살 것인지 고민하라’고 외쳤다. ‘기회를 선점하라’고 다그쳤다. 이른바 스피드 경영이다.
이 회장은 1991년 과감하게 LCD 사업을 미래사업으로 설정하고 반도체 사업으로 남긴 이윤을 그쪽에 쏟아부었다. 하지만 LCD 가격이 절반으로 내려가 적자가 눈덩이처럼 불어났다. 그래도 그의 ‘LCD 프렌들리’ 정책은 변하지 않았다. 결국 LCD 사업은 1997년까지 만성적자에 허덕일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LCD 사업은 외환위기가 터지면서부터 대박이 났다. 만들기 바쁘게 팔려나가 엄청난 이익을 남기기 시작한 것이다. 제우스의 결단력과 추진력을 연상케 하는 대목이다.
제우스의 아버지 크로노스는 우라노스가 낳은 12명의 아들 중 막내다. 제우스도 크로노스가 낳은 삼형제 중 막내다. 삼형제가 등장하는 동화책을 보라. 막내는 항상 처음에는 온갖 천대와 질시를 받는다. 하지만 끝내는 위기에 빠진 형제와 가족을 구한다. 제우스도 그랬다. 크레타 섬에서 부모 없이 유모 밑에서 어린 시절과 청년기를 보낸 제우스는 결국 형제자매를 구하고 신들의 제왕으로 우뚝 선다.
이 회장도 삼형제 중 막내다. 그는 갓난아이 때는 자기를 키워준 친할머니를 엄마라고 부르며 유모의 손에서 자랐다. 국내에서 무려 다섯 곳의 초등학교를 다니다가 5학년 때는 일본으로 유학 갔다. 그는 그곳에서 둘째 형, 일본인 가정부와 함께 지냈다. 그의 아버지인 고(故) 이병철 회장도 막내다. 이것도 우연일까.
한때 ‘내려놓음’이라는 말이 유행한 적이 있다. 하지만 내려놓는 것은 결코 쉬운 게 아니다. 이 회장은 아버지가 세상을 떠난 지 8년 만에 형제자매와 아무 잡음 없이 재산분할을 끝냈다. 그건 과감하게 욕심을 버린 이 회장의 양보가 있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1997년 외환위기가 닥치자 이 회장의 ‘내려놓음’은 한층 업그레이드된다. 세계적인 투자회사 골드먼삭스의 존 코자인 회장이 그를 찾아와 협상을 벌인다. 그때 그는 과감하게 ‘삼성전자와 핵심 전자 계열사, 삼성생명을 제외하고 어떤 회사를 처분해도 좋다’고 말한다. 삼성이 외환위기를 훌륭하게 극복할 수 있었던 것은 이렇듯 이 회장이 ‘버림의 미학’을 실천했기에 가능했다.
테티스가 낳은 아들은 힘과 지혜 등 모든 면에서 아버지를 능가할 것이라는 예언을 듣고는 사랑하던 테티스를 하루아침에 깨끗이 단념한다. 사랑마저도 초개처럼 버릴 수 있었다.
그리스 반도로 남하한 제우스가 맨 처음 한 일은 지금의 국가정보원격인 신탁소를 장악하는 것이었다. 그는 태양신 아폴론에게 대지의 여신 가이아의 성소(聖所)였던 델피 신탁소를 접수하도록 명령한다. 모든 권력은 결국 정보를 장악하는 자가 승리한다. 아폴론은 무력으로 델피 신탁소에 침입해 그곳을 지키고 있던 가이아의 충복인 왕뱀 피톤을 활로 쏘아 죽이고 자신의 심복 피티아를 여사제로 삼는다.
이 회장도 정보를 장악하는 데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 그는 취임 초기인 1987년 “그룹 경영의 40%가 비서실에 달려 있다”고 말할 정도로 비서실을 중시했다. 삼성그룹 비서실이 그에게 하루 보고하는 정보는 100여 쪽이나 된다. 청와대 비서진이 ‘대통령에게 보고하는 정보와 비교해도 손색이 없었다’고 한다.
이른바 ‘가신그룹’으로 불리는 비서실은 구조조정본부를 거쳐 전략기획실로 이름을 바꿔가면서 전 세계의 모든 정보를 수집하고 선별해 이 회장에게 보고했다. 전략기획실 이학수 실장은 이 회장의 ‘복심(腹心)’이자 ‘그룹 2인자’로 바로 삼성의 아폴론이다.
티탄신족(族)을 물리치고 신들의 왕위에 오른 뒤에도 제우스는 크고 작은 내우외환에 시달린다. 가이아는 자기 자식인 티탄신들을 자신의 몸 가장 깊은 곳인 타르타로스에 가둔 손자 제우스가 못마땅했다. 티탄신들이 아무리 못된 짓을 저질렀어도 가이아 자신이 배 아파 낳은 자식들 아닌가. 가이아가 몇 번이나 그들의 조건 없는 석방을 부탁해도 제우스는 꿈쩍도 하지 않았다.
분노한 가이아는 혼자서 24명의 거인족 기간테스를 낳아 제우스를 습격한다. 제우스는 이들의 공격으로 궁지에 몰리기도 하지만 구원투수 헤라클레스의 도움으로 위기를 벗어난다. 그러자 가이아는 이번에는 타르타로스와 어울려 괴물 티폰을 낳아 제우스를 압박한다. 티폰은 지상의 어떤 산보다도 거대한 몸으로 머리가 하늘의 별들과 부딪힐 정도였다. 제우스는 그들의 힘에 밀려 한때 포로가 되기도 하지만 헤르메스의 도움으로 탈출한 뒤, 번개를 날려 티폰을 에트나산 밑에 처박아버린다.
제우스에게 치명상을 입힌 아내 헤라. 양심선언을 한 김용철 변호사는 제우스(이건희 회장)의 헤라일까.
제우스에게 가장 치명상을 입힌 것은 아내 헤라가 아폴론과 포세이돈을 부추겨 일으킨 쿠데타였다. 워낙 급작스럽고 은밀하게 모의한 쿠데타여서 제우스는 그들의 포로가 된다. 100군데나 매듭이 묶여 포박된 채 감옥에 갇힌 신세가 된다. 쿠데타가 성공한 줄 알고 안심한 신들은 권력배분 방식을 놓고 토의하다 급기야 싸움을 벌인다. 시끄럽게 싸우는 소리를 듣고 달려온 바다의 여신 테티스가 우연히 사태를 눈치챈다. 그녀는 재빨리 타르타로스에 있던 손이 100개나 달린 아이가이온을 데려와 제우스를 구해준다. 테티스는 한번 버림받은 경험이 있는데도 제우스가 퍽이나 좋았던 모양이다.
기간테스와 티폰의 습격 장면에서 외환위기 등 그동안 삼성이 겪었던 여러 가지 내우외환을 떠올리게 된다. 특히 헤라의 쿠데타는 김용철 변호사의 양심선언을 연상시킨다. 그는 왜 자신이 모시던 ‘가장(?)’을 고발했을까? 왜 삼성과 ‘평생 싸우겠다’고 하는 것일까? 그의 분노의 뿌리는 과연 뭘까? 헤라가 쿠데타를 일으킨 동기는 제우스의 그칠 줄 모르는 바람기 때문이었다고 전해진다.
최근 이 회장이 이학수 부회장과 함께 모든 사태에 책임을 지고 동반 사퇴한다고 발표했다. 그리스 신화 속 아폴론은 두 번이나 신들이 세운 ‘올림포스 헌법’을 어기고 하늘궁전에서 추방당한다. 하지만 얼마 안 있어 화려하게 복귀한다. 제우스도 숱한 곤경에 처해서도 한 번도 좌절하거나 넘어지지 않고 오뚝이처럼 일어섰다.
과연 이 회장은 이대로 사라질까? 그의 말대로 경영일선에서 완전히 퇴장할까? 아니면 아폴론처럼 언젠가 화려하게 복귀할까? 제우스처럼 훌훌 털고 일어설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