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간동아 139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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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도체 제국’ 부활 꿈꾸는 日, 글로벌 7대 반도체 기업 불러들였다

日 기업들 반도체 제조회사 공동 출연… 반도체산업 기술 격차 따라잡기 나서

  • 이장훈 국제문제 애널리스트 truth21c@empas.com

    입력2023-05-28 10:00: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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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지난해 12월 28일 일본 구마모토현의 TSMC 반도체 공장 건설 현장. [동아DB]

    지난해 12월 28일 일본 구마모토현의 TSMC 반도체 공장 건설 현장. [동아DB]

    ‘라피더스(Rapidus)’는 지난해 11월 11일 도요타자동차와 키옥시아, 소니, NTT, 소프트뱅크, NEC, 덴소, 미쓰비시UFJ은행 등 일본 주요 대기업이 공동 출자한 반도체 제조회사다. 8개 기업이 70억 엔(약 667억 원)씩 출연했고, 일본 정부로부터 700억 엔(약 6666억 원)의 지원을 받았으며, 미국의 대표 빅테크 기업 IBM과도 제휴했다. 라피더스는 유럽 최고 반도체 연구개발 기관인 벨기에 종합반도체연구소(IMEC)와도 기술 협력을 맺기로 했다. 라피더스는 2㎚(나노미터: 1㎚=10억 분의 1m) 첨단 반도체 양산에 5조 엔(약 48조 원)을 투자해 2027년까지 양산할 계획이다.

    사명이 ‘라피더스’인 이유

    라피더스는 라틴어로 ‘빠르다’는 뜻이다. 한국·대만과의 반도체산업 기술 격차를 빠르게 따라잡겠다는 각오가 담긴 이름이다. 실제로 라피더스는 슈퍼컴퓨터와 자율주행, 인공지능(AI), 스마트시티 등 대량의 데이터를 빠른 속도로 처리하는 분야에 필수적인 첨단 반도체 기술을 개발, 양산한다는 목표를 세웠다. 라피더스가 홋카이도 지토세에 반도체 공장을 건설하기로 하자 일본 정부는 4월 2600억 엔(약 2조4800억 원)을 추가 지원하기로 했다.

    라피더스가 차세대 반도체 개발에 성공하면 참여 기업들은 이를 각 분야에 활용할 것으로 보인다. 도요타자동차는 세계 최대 자동차 회사고, 소니는 이미지센서 분야 세계 1위 기업이다. NTT는 일본 최대 통신기업이며, 키옥시아는 반도체 낸드플래시메모리 분야 세계 2위다. 소프트뱅크는 전 세계 수백 곳의 AI 스타트업에 투자하고 있다. 니시무라 야스토시 일본 경제산업상은 “반도체는 경제안보 관점에서 매우 중요하다”며 “일본 민관이 하나로 뭉쳐 반도체 경쟁력을 강화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일본 정부와 기업들이 1980년대 ‘반도체 전성시대’의 부활을 위해 총력전에 나서고 있다. 조 바이든 미국 대통령은 반도체를 “21세기 편자의 못”이라고 정의했다. 자동차와 가전제품은 물론, 각종 무기와 군수산업 등 첨단산업에서 반도체가 필수품이기 때문이다. 기업 간 경쟁을 넘어 각국 기술 패권 경쟁의 핵심이기도 하다.

    일본 반도체산업은 1980년대 후반 세계 시장을 석권했으나 지금은 시장점유율이 10% 미만으로 쪼그라들었다. 일본 정부와 기업들이 ‘과거 영광’을 재연하기 위해 반도체 개발에 박차를 가하는 이유다. 일본 경제산업성은 2030년까지 반도체산업 매출액을 2020년 대비 3배인 15조 엔(약 143조 원)으로 확대하는 내용의 ‘반도체·디지털 산업 전략’을 추진하기로 했다. 일본 정부가 경제는 물론, 국가안보에서 핵심인 반도체를 외국 기업에 의존할 경우 자칫 국력이 쇠퇴할 수 있다고 판단한 것이다. 일본 정부는 △자국 내 반도체 제조 거점 확보 △설계 기술 개발 △양자컴퓨터 등 미래 기술 연구를 핵심 과제로 선정했다.



    1980년대 일본 정부는 막대한 보조금 지급과 저금리 융자, 연구개발(R&D) 예산 지원 등으로 반도체산업을 적극 육성했다. 그 결과 일본 반도체 기업들의 D램 시장점유율은 1980년 25%에서 1987년 80%로 급증했다. 세계 10대 반도체 기업에 일본 기업이 6개(NEC·도시바·히타치·후지쯔·미쓰비시·마쓰시타)나 포함된 적도 있었다. 당시 미국 언론들이 일본의 D램 장악을 ‘제2 진주만 공습’이라고 불렀을 정도다. 미국의 세계적인 반도체 제조사 인텔이 일본 공세에 밀려 1984년 D램 사업을 접기도 했다.

    미국도 가만있지는 않았다. 당시 로널드 레이건 미국 대통령은 1985년 상무부에 일본 반도체 기업의 덤핑 여부를 조사하라고 지시했다. 미국 반도체 제조사 마이크론은 NEC·히타치·미쓰비시·도시바 등 일본 7개 반도체 기업을 상대로 반덤핑 소송을 내기도 했다. 미국의 전방위적 공세에 일본은 백기를 들고 말았다. 일본 정부는 1986년 미국 정부와 자국 시장에서 10% 수준이던 미국산 반도체를 20%로 확대한다는 내용의 ‘미·일 반도체 협정’을 맺었다.

    미국 정부는 더 나아가 1987년 일본이 제3국에서 덤핑 문제를 일으켜 반도체 협정을 위반했다며 통상법 제301조를 앞세워 추가 보복 조치를 단행했다. 일본 반도체산업은 쇠락의 길을 걸을 수밖에 없었다. 미국 인텔은 1992년 일본 NEC가 차지해오던 세계 반도체 1위 기업이라는 타이틀을 빼앗아왔다. 공교롭게도 1992년은 ‘일본의 잃어버린 30년’이 시작되는 해였다.

    각 분야 최고 반도체 기업 유치한 日

    일본 정부는 자국 내 반도체 생산과 연구개발 거점 마련을 위해 외국 기업들의 투자를 적극 유치해왔다. 기시다 후미오 일본 총리가 5월 18일 경계현 삼성전자 반도체(DS) 부문장, 류더인 TSMC 회장, 팻 겔싱어 인텔 최고경영자(CEO) 외에도 IBM·마이크론·어플라이드 머티어리얼즈 등 세계 7개 반도체 기업 대표를 총리 관저로 초청해 대일(對日) 투자를 요청한 것이 대표적이다. 일본 ‘니혼게이자이 신문’은 “세계 주요 반도체 대기업 대표들이 한자리에 모인 것은 이례적”이라며 “기시다 총리는 각 기업 대표에게 보조금 지급 등 적극적인 지원을 약속하면서 대일 투자를 확대해줄 것을 호소했다”고 보도했다.

    마이크론이 가장 먼저 통 큰 투자 계획을 내놓았다. 산제이 메로트라 마이크론 CEO는 2025년까지 일본에 5000억 엔(약 4조8000억 원)을 투자해 히로시마 공장을 증설하기로 했다. 그는 초미세 반도체 공정에 필수적인 네덜란드 ASML의 최첨단 극자외선(EUV) 노광장비를 도입해 차세대 메모리칩을 생산하겠다고 밝히기도 했다. 일본 정부는 보조금 2000억 엔(약 1조9000억 원)을 지원할 예정이다.

    삼성전자도 가나가와현 요코하마에 300억 엔(약 2858억 원)을 투입해 3D 반도체 시제품 라인 등 R&D 시설을 만들 계획이다. 일본 정부는 보조금 100억 엔(약 953억 원)을 제공하기로 했다. 인텔은 일본 반도체 소재·장비 업체와 제휴를 강화하겠다는 방침을 밝혔다. TSMC는 일본에 두 번째 반도체 공장을 건설할 계획이다. TSMC는 이미 총 86억 달러(약 11조3400억 원)를 들여 구마모토현 기쿠요마치에 반도체 공장을 건설하고 있다. 이 공장은 2024년 말 가동을 목표로 하고 있으며 일본 정부로부터 지원금 4760억 엔(약 4조5336억 원)을 받았다.

    일본은 지금까지 파운드리(TSMC), D램(마이크론), 후공정·패키징(TSMC·삼성전자·인텔) 등 반도체 각 분야 최고 기업을 모두 유치했다. 일본 기업들은 이미 생산 중인 낸드플래시(키옥시아)와 자동차용 반도체(르네사스)까지 포함하면 모든 종류의 반도체 생산 거점을 확보한 셈이다. 일본 정부의 반도체산업 부활 계획이 기대 이상 성과를 거두고 있다고 봐야 한다.

    반도체산업의 주요 축인 한국과 대만이 지정학적 문제로 어려움을 겪을 경우 일본이 이를 대체할 수도 있다. 반도체 기업 입장에서 일본은 최고 ‘테스트베드’다. 소니, 닌텐도, 도시바, 교세라 같은 정보기술(IT) 기기 업체와 NTT, 소프트뱅크 등 통신업체는 물론, 최근 반도체 수요가 급격히 늘어난 자동차 대기업들도 있다. 특히 일본은 반도체 장비와 소재, 부품 분야에서 강국이다. 반도체 장비 시장점유율이 35%로 미국(40%)에 이은 세계 2위고, 반도체 소재는 55%로 1위다.

    공고해지는 미·일 반도체 동맹

    조 바이든 미국 대통령(왼쪽)과 기시다 후미오 일본 총리가 5월 18일 일본 히로시마에서 열린 주요 7개국(G7) 정상회담에 앞서 인사를 나누고 있다. [AP]

    조 바이든 미국 대통령(왼쪽)과 기시다 후미오 일본 총리가 5월 18일 일본 히로시마에서 열린 주요 7개국(G7) 정상회담에 앞서 인사를 나누고 있다. [AP]

    일본의 뒤에는 미국이 있다. 일본 반도체산업을 몰락시켰던 미국은 아이러니하게도 반도체를 비롯해 첨단기술 분야에서 일본과 협력을 강화하고 있다. 미국과 일본이 중국을 견제하려고 손을 잡은 것이다. 일본 정부는 올해 미국 정부와 합의에 따라 첨단 반도체 연구 거점인 ‘최첨단반도체기술센터(LSTC)’를 설립할 예정이다. LSTC는 미국 국가과학기술위원회(NSTC)와 함께 첨단 반도체 개발 연구를 공동으로 수행할 것으로 전망된다. 일본 정부는 LSTC에 3500억 엔(약 3조3333억 원)을 지원하기로 했다.

    미·일 반도체 동맹은 갈수록 힘을 받는 모양새다. 최근 소프트뱅크 산하 세계적인 반도체 설계 회사인 ARM이 인텔과 전략적 협력 관계를 맺었다. IBM, 구글은 미국 시카고대와 일본 도쿄대의 양자컴퓨터 공동연구를 위해 1억5000만 달러(약 1978억 원)를 지원하기로 했다. 두 대학은 10년 안에 10만 큐비트의 양자컴퓨터를 개발할 계획이다. 양자컴퓨터는 데이터를 동시다발로 처리할 수 있어 현존하는 전통 컴퓨터로는 해결 불가능한 문제 풀이에 이용될 전망이다.

    이 같은 움직임의 이면에는 최근 군사적 목적으로 양자컴퓨터에 집중 투자하는 중국을 견제하려는 목적도 있다. 바이든 대통령과 기시다 총리는 일본 히로시마 주요 7개국(G7) 정상회의에 앞서 별도의 정상회담을 갖고 반도체와 AI, 양자컴퓨터 등 최첨단기술 분야에서 협력을 강화하기로 합의했다. 일본이 앞으로 ‘반도체 제국’의 명성을 되찾을 수 있을지 주목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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