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포도원 기행’은 와인에 대한 천편일률적 지식이나 이론 혹은 까다로운 예법을 따지는 기존 와인 이야기와는 다르다. 호주의 유명 와인 산지를 직접 찾아가, 그곳에서 만난 사람과의 인터뷰를 바탕으로 그들의 인생과 와인 이야기를 담았다. 전직이 판사, 의사, 신문기자, 화가, 항공기 조종사, 철학 교수인 양조장 주인으로부터 포도농장을 하게 된 동기, 그리고 와인에 대한 독특한 인생철학과 애환, 사랑 이야기를 직접 듣고 채록했다.
호주를 상징하는 붉은 모래흙이 깔린 빔바젠(Bimbadgen) 포도원에 들어서니 포도나무가 이룬 초록 바다가 나타났다. 언덕을 향해 굽이진 길을 헤쳐나가자 중세 사원을 연상케 하는 종탑이 멀리서 보였다. 처음 포도원을 세웠을 때 넓디넓은 포도밭 어느 귀퉁이에서 일하는 일꾼들을 불러 모으려고 종을 쳤는데, 그때 사용한 건물이다. 지금은 일 년에 한 번 추수를 끝낸 후 이 건물에 있는 종을 울린다.
빔바젠은 호주 원주민인 애버리지니 언어로 ‘기가 막히게 아름다운 풍경’이라는 뜻. 길 따라 더 깊숙이 들어가자 흰색 종탑이 멀리서 볼 때와는 다르게 햇빛을 튀기듯 반사하며 서 있었다. 그 뒤로 보이는 파란 하늘에는 오리와 양 모양을 한 뭉게구름이 동물농장을 펼친 듯 평화롭게 떠 있었다.
구릉을 따라 뻗어나간 포도밭은 바람이 불어올 때마다 파도처럼 꿈틀거렸고, 와인 창고 옆 버드나무는 술 취한 모습으로 가지를 축 늘어뜨린 채 흐느적거렸다. 와인 빛을 닮은 붉은 모래밭을 자박자박 밟으며 걸어가자 노랗게 핀 와틀꽃 울타리 뒤로 통나무집이 나타났다. 손수건만 한 창문을 통해 안을 기웃거리니 벽난로 옆으로 고혹적인 침실이 보였다. 샐비어가 늘어선 화단에서 풀을 뽑던 관리인이 “여기 통나무집들은 연인이 찾아와 하룻밤을 묶어가는 곳”이라고 덤덤하게 말했다. 지상에서 낙원을 찾는 이들에게 이처럼 완벽하게 조화를 이룬 곳이 또 어디 있을까.
종탑 옆에 붙은 시음장으로 들어서자 스튜어트라고 자신을 소개한 와인 컨설턴트가 2006년도 산 프리미엄급 시그니처 세미용을 내놓았다. 그런데 할리우드 영화배우처럼 잘생긴 컨설턴트가 따라준 와인 또한 조화로움의 산물이었다. 잔을 기울여 한 모금을 입에 담으니 진한 과일 향이 구강에서 비강을 관통했다. 목 넘김을 한 후 얼마 안 있으니 상큼한 레몬 맛이 혀에 잔 맛으로 남아 입안이 개운했다. 좋은 안주와 함께 지금 당장 마시고 싶은 마음이 굴뚝 같았다. 하지만 스튜어트는 “한 10년 정도 병에서 숙성시켰다 마시면 맛이 중후해져 최고에 이를 것”이라고 말했다. 애써 만든 와인을 병에 담아놓고 또 10년을 기다려야 한다니 입맛만 다실 수밖에.
음식과 와인 완벽한 조화 ‘마리아주’
“와인은 조화(Harmony)의 가치를 귀하게 여기는 술입니다. 시간이나 세상과 결코 다투지 않아요. 느긋하게 참고 견디지 않으면 좋은 와인을 기대할 수 없죠. 그러니 조급하고 경솔한 사람은 그만큼 손해를 봅니다. 게다가 땅하고도 사이가 좋아야 해요. 빔바젠의 비탈진 포도밭은 밤에는 차가운 공기를 아래로 내려보내기 때문에 포도밭의 기온이 상승합니다. 그래서 이런 경사면에서 수확한 포도는 평지에서 자란 것보다 훨씬 더 짙은 향과 색깔을 지니죠. 물론 헌터밸리의 붉은 모래흙은 배수성이 좋아 레드 와인의 한 품종인 쉬라즈를 생산하는 데 아주 좋은 환경을 만들어줍니다.”
스튜어트는 와인 컨설턴트로 일하기 전에는 개인용 비행기를 모는 조종사였다. 고액 연봉을 받고 밤낮으로 호주대륙을 이쪽에서 저쪽으로 날아다녔다. 그러나 마법 같은 와인의 유혹을 뿌리칠 수 없어 조종사의 길을 접었다. 그런 그에게 “지금이 바로 죽기 전이라면 어떤 음식이 가장 먹고 싶으냐”고 물어보니 “빔바젠 에스테이트 쉬라즈와 육즙이 풍부한 티본 스테이크”라고 대답했다. 그러면서 그는 술과 음식의 조화에 대해 입맛을 다셔가며 설명했다.
“스파클링 와인은 새우나 칼라마리(오징어)와 잘 어울리고 세미용은 연어같이 부드러운 생선요리와 함께 먹으면 좋아요. 치킨을 먹을 때는 과일 향이 풍부한 샤도네이를 마시면 닭 냄새가 감소될 뿐 아니라 담백한 닭고기가 와인 맛을 상승시키므로 서로 잘 어울리는 파트너라고 생각합니다. 멀롯처럼 다소 부드럽고 달착지근한 와인에는 설익은 캥거루고기를 추천합니다.”
이렇게 음식과 와인의 완벽한 조화로움을 ‘마리아주’라고 하는데 각자의 개성을 끌어내 서로를 드높이는 것을 일컫는다. 마리아주는 불어로 결혼을 의미한다. 그래서 그런지 헌터밸리의 많은 와이너리는 결혼식을 거행할 수 있는 이벤트 홀을 별도로 갖추었다. 통통한 포도송이가 주렁주렁 달린 포도원에서 결혼식을 올린다는 것은 생각만으로도 가슴 벅차오르고 낭만적인 일이다. 향연을 열기에는 최적의 장소다. 스튜어트는 “결혼식을 앞두고 ‘처녀들의 파티’인 일명 암탉들의 파티(Hen’s Party)를 열기도 하는데 화끈하게 노는 모습을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참으로 재미있다”고 말했다.
하룻밤 완전히 망가지는 일탈
“결혼식이라는 대사를 앞둔 예비 신부가 스트레스를 풀고 친구들과 마지막 밤을 화려하게 보내고 싶어 하기 때문에 파티는 대부분 난장판이 되기 일쑤입니다. 보통 대여섯 명의 처녀가 몰려와 먹고 마시며 떠들어대죠. 그러다 밤이 이슥해지면 웃통을 벗어젖힌 반라 차림으로 달빛이 쏟아지는 잔디밭 여기저기를 휘젓고 다니죠. 단체로 샤워하고 노래 부르고 춤추고, 일부는 치마 속에 와인 병을 넣어 길쭉하게 남근 모양을 만든 뒤 제 앞에서 마구 흔들어댑니다.”
원래 질서와 조화를 뜻하는 코스모스는 혼돈을 의미하는 카오스와 한통속이 아니든가. 코스모스는 카오스가 전제돼야 하는 것이기에 더욱 그렇다. 그러니 암탉들의 파티도 ‘질서와 조화를 위한 일시적 혼돈’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한 병의 귀한 와인이 탄생하려면 포도송이가 밟히고 으깨지고 썩어야 하듯이, 새로운 인생의 마리아주를 위해 하룻밤 정도는 완전히 망가지는 것 또한 의미 있는 일이다. 기행을 일삼거나 일상에서 일탈한 방문객마저도 포용할 줄 아는 가슴 넓은 헌터밸리가 그래서 더욱 사랑스러운 것이다.
호주를 상징하는 붉은 모래흙이 깔린 빔바젠(Bimbadgen) 포도원에 들어서니 포도나무가 이룬 초록 바다가 나타났다. 언덕을 향해 굽이진 길을 헤쳐나가자 중세 사원을 연상케 하는 종탑이 멀리서 보였다. 처음 포도원을 세웠을 때 넓디넓은 포도밭 어느 귀퉁이에서 일하는 일꾼들을 불러 모으려고 종을 쳤는데, 그때 사용한 건물이다. 지금은 일 년에 한 번 추수를 끝낸 후 이 건물에 있는 종을 울린다.
빔바젠은 호주 원주민인 애버리지니 언어로 ‘기가 막히게 아름다운 풍경’이라는 뜻. 길 따라 더 깊숙이 들어가자 흰색 종탑이 멀리서 볼 때와는 다르게 햇빛을 튀기듯 반사하며 서 있었다. 그 뒤로 보이는 파란 하늘에는 오리와 양 모양을 한 뭉게구름이 동물농장을 펼친 듯 평화롭게 떠 있었다.
구릉을 따라 뻗어나간 포도밭은 바람이 불어올 때마다 파도처럼 꿈틀거렸고, 와인 창고 옆 버드나무는 술 취한 모습으로 가지를 축 늘어뜨린 채 흐느적거렸다. 와인 빛을 닮은 붉은 모래밭을 자박자박 밟으며 걸어가자 노랗게 핀 와틀꽃 울타리 뒤로 통나무집이 나타났다. 손수건만 한 창문을 통해 안을 기웃거리니 벽난로 옆으로 고혹적인 침실이 보였다. 샐비어가 늘어선 화단에서 풀을 뽑던 관리인이 “여기 통나무집들은 연인이 찾아와 하룻밤을 묶어가는 곳”이라고 덤덤하게 말했다. 지상에서 낙원을 찾는 이들에게 이처럼 완벽하게 조화를 이룬 곳이 또 어디 있을까.
종탑 옆에 붙은 시음장으로 들어서자 스튜어트라고 자신을 소개한 와인 컨설턴트가 2006년도 산 프리미엄급 시그니처 세미용을 내놓았다. 그런데 할리우드 영화배우처럼 잘생긴 컨설턴트가 따라준 와인 또한 조화로움의 산물이었다. 잔을 기울여 한 모금을 입에 담으니 진한 과일 향이 구강에서 비강을 관통했다. 목 넘김을 한 후 얼마 안 있으니 상큼한 레몬 맛이 혀에 잔 맛으로 남아 입안이 개운했다. 좋은 안주와 함께 지금 당장 마시고 싶은 마음이 굴뚝 같았다. 하지만 스튜어트는 “한 10년 정도 병에서 숙성시켰다 마시면 맛이 중후해져 최고에 이를 것”이라고 말했다. 애써 만든 와인을 병에 담아놓고 또 10년을 기다려야 한다니 입맛만 다실 수밖에.
음식과 와인 완벽한 조화 ‘마리아주’
“와인은 조화(Harmony)의 가치를 귀하게 여기는 술입니다. 시간이나 세상과 결코 다투지 않아요. 느긋하게 참고 견디지 않으면 좋은 와인을 기대할 수 없죠. 그러니 조급하고 경솔한 사람은 그만큼 손해를 봅니다. 게다가 땅하고도 사이가 좋아야 해요. 빔바젠의 비탈진 포도밭은 밤에는 차가운 공기를 아래로 내려보내기 때문에 포도밭의 기온이 상승합니다. 그래서 이런 경사면에서 수확한 포도는 평지에서 자란 것보다 훨씬 더 짙은 향과 색깔을 지니죠. 물론 헌터밸리의 붉은 모래흙은 배수성이 좋아 레드 와인의 한 품종인 쉬라즈를 생산하는 데 아주 좋은 환경을 만들어줍니다.”
스튜어트는 와인 컨설턴트로 일하기 전에는 개인용 비행기를 모는 조종사였다. 고액 연봉을 받고 밤낮으로 호주대륙을 이쪽에서 저쪽으로 날아다녔다. 그러나 마법 같은 와인의 유혹을 뿌리칠 수 없어 조종사의 길을 접었다. 그런 그에게 “지금이 바로 죽기 전이라면 어떤 음식이 가장 먹고 싶으냐”고 물어보니 “빔바젠 에스테이트 쉬라즈와 육즙이 풍부한 티본 스테이크”라고 대답했다. 그러면서 그는 술과 음식의 조화에 대해 입맛을 다셔가며 설명했다.
“스파클링 와인은 새우나 칼라마리(오징어)와 잘 어울리고 세미용은 연어같이 부드러운 생선요리와 함께 먹으면 좋아요. 치킨을 먹을 때는 과일 향이 풍부한 샤도네이를 마시면 닭 냄새가 감소될 뿐 아니라 담백한 닭고기가 와인 맛을 상승시키므로 서로 잘 어울리는 파트너라고 생각합니다. 멀롯처럼 다소 부드럽고 달착지근한 와인에는 설익은 캥거루고기를 추천합니다.”
이렇게 음식과 와인의 완벽한 조화로움을 ‘마리아주’라고 하는데 각자의 개성을 끌어내 서로를 드높이는 것을 일컫는다. 마리아주는 불어로 결혼을 의미한다. 그래서 그런지 헌터밸리의 많은 와이너리는 결혼식을 거행할 수 있는 이벤트 홀을 별도로 갖추었다. 통통한 포도송이가 주렁주렁 달린 포도원에서 결혼식을 올린다는 것은 생각만으로도 가슴 벅차오르고 낭만적인 일이다. 향연을 열기에는 최적의 장소다. 스튜어트는 “결혼식을 앞두고 ‘처녀들의 파티’인 일명 암탉들의 파티(Hen’s Party)를 열기도 하는데 화끈하게 노는 모습을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참으로 재미있다”고 말했다.
하룻밤 완전히 망가지는 일탈
“결혼식이라는 대사를 앞둔 예비 신부가 스트레스를 풀고 친구들과 마지막 밤을 화려하게 보내고 싶어 하기 때문에 파티는 대부분 난장판이 되기 일쑤입니다. 보통 대여섯 명의 처녀가 몰려와 먹고 마시며 떠들어대죠. 그러다 밤이 이슥해지면 웃통을 벗어젖힌 반라 차림으로 달빛이 쏟아지는 잔디밭 여기저기를 휘젓고 다니죠. 단체로 샤워하고 노래 부르고 춤추고, 일부는 치마 속에 와인 병을 넣어 길쭉하게 남근 모양을 만든 뒤 제 앞에서 마구 흔들어댑니다.”
원래 질서와 조화를 뜻하는 코스모스는 혼돈을 의미하는 카오스와 한통속이 아니든가. 코스모스는 카오스가 전제돼야 하는 것이기에 더욱 그렇다. 그러니 암탉들의 파티도 ‘질서와 조화를 위한 일시적 혼돈’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한 병의 귀한 와인이 탄생하려면 포도송이가 밟히고 으깨지고 썩어야 하듯이, 새로운 인생의 마리아주를 위해 하룻밤 정도는 완전히 망가지는 것 또한 의미 있는 일이다. 기행을 일삼거나 일상에서 일탈한 방문객마저도 포용할 줄 아는 가슴 넓은 헌터밸리가 그래서 더욱 사랑스러운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