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브라함은 아리따운 아내를 둔 탓으로 파란만장한 인생 역정을 겪었다. 그림은 아브라함과 세 천사.
유대인이 믿음의 조상으로 떠받들고 있는 아브라함 또한 참으로 아리따운 여인 사라를 아내로 삼고 있었다. 그들 부부의 원래 이름은 아브람과 사래였다. 한 가정의 아버지요, 어머니라는 뜻인 그들의 이름이 세상 만방의 아버지요, 어머니라는 뜻인 아브라함과 사라로 바뀌기까지 그들은 실로 파란만장한 인생역정을 겪었다.
본토와 일가친척을 떠나는 이별의 아픔도 겪고, 이방의 땅에서 가뭄을 맞아 생활고도 겪고, 전쟁도 겪고, 자식이 없는 서러움도 겪었다. 그런 어려움들 중에서도 그들이 가장 가슴 아파 한 사건은 부부가 생이별하는 일이었을 것이다. 그것도 다른 남자가 사라를 아내로 취함으로써 겪게 된 생이별이었다. 그들 부부 중 누가 더 마음이 아팠을까.
아브라함은 큰 축복의 약속에 의지하여 갈대아 우르를 떠나 여호와께서 지시한 땅 가나안으로 들어갔다. 그러나 축복받기는커녕 가뭄으로 말미암아 굶어 죽을 판이었다. 아브라함은 식솔들을 이끌고 남쪽 애굽으로 내려갔다. 나일강이 흐르는 애굽은 그 당시 풍요와 번영의 상징이었다.
그런데 애굽이 가까워지자 아브라함의 마음속에 불안이 싹트기 시작했다. 애굽 남자들이 사라의 미모에 반하여 자신을 죽이고 사라를 빼앗아가지 않을까 하는 불안이었다. 그 불안은 애굽 국경을 넘어서자 거의 공포로 바뀌었다. 자신의 불안과 공포를 어떻게 아내한테 이야기해야 하나, 아브라함은 고민하지 않을 수 없었다.
“당신을 내 누이라고 합시다” 비굴한 남편
결국 아브라함은 조심스럽게 아내에게 말을 꺼냈다.
“당신은 참으로 아리따운 여인이오.”
사라는 남편이 새삼스럽게 왜 이런 말을 하나, 의아해하면서도 은근히 기분이 좋아졌다. 그러나 곧 사라는 비참한 심정이 되고 말았다.
“애굽 남자들이 당신이 내 아내인 것을 알면 나를 죽이고 당신을 빼앗아갈 것이오. 그러니 당신은 내 아내라고 하지 말고 내 누이라고 하오.”
“누이라고 하면 애굽 남자들이 더 쉽게 나를 자신들의 아내로 삼으려고 하지 않을까요?”
“내 아내라고 하나 내 누이라고 하나 애굽 남자들이 당신을 자신들의 아내로 삼으려고 할 것은 틀림없는 사실이오. 내 말은, 내 아내라고 하면 나를 죽이고 당신을 빼앗아갈 것이지만 내 누이라고 하면 내 목숨만은 살려둘 거란 말이오. 내 부탁대로 하여 제발 내 목숨을 살려주시오.”
사라가 그토록 비굴한 남편의 모습을 보기는 처음이었다. 하지만 남편의 목숨이 위태롭다니 사라로서는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천사의 계시를 듣고 있는 아브라함과 그의 아내 사라(위). 메소포타미아 우르파에 있는 아브라함의 성소.
‘바로의 대신들도 그(사라)를 보고 바로 앞에 칭찬하므로 그 여인을 바로의 궁으로 취하여 들인지라.’
당시에는 한국판 요정 같은 것이 없었겠지만 그 비슷한 연회석상에서 바로와 대신들이 사라의 미모를 화젯거리로 삼았던 모양이다.
그런데 성경을 보면 그 다음 구절에서 바로가 사라 때문에 아브라함을 후대하여 양과 소와 노비와 암수 나귀와 약대를 선물로 주었다고 하였다. 바로가 그 선물들을 사라의 오라비라는 아브라함에게 혼인 예단으로 준 것일까. 아니면 첫날밤을 지낸 후에 며칠, 혹은 몇 달을 두고 아브라함을 후대하여 그 선물들을 준 것일까.
성경은 바로와 사라가 부부로서 교합한 사실을 차마 기록하지 못하고 건너뛰고 있다. 아브라함이 사라 덕분에 부자가 되었다는 구절 바로 그 다음에 ‘여호와께서 아브람의 아내 사래의 연고로 바로와 그 집에 큰 재앙을 내리신지라’하는 구절이 이어진다.
바로가 사라와 교합하기 직전 바로의 집에 재앙이 내렸다고 보기는 어려울 것 같다. 뒤에 이어지는 바로의 말에서도 알 수 있듯이 바로는 사라를 아내로 취하여 몸을 섞었음이 분명하다.
‘네가 어찌 그를 누이라 하여 나로 하여금 그를 취하여 아내를 삼게 하였느냐?’
낯선 땅으로 갈 때마다 두려워 실수 되풀이
바로에게 아내를 상납한 아브라함은 밤마다 얼마나 괴로웠을까. 물질적으로는 풍요로워지고 편안해지긴 하였지만 그 마음은 시커멓게 타들어갔을 것이다. 그가 여호와를 알지 못하는 자였다면 여종의 몸을 희롱하며 학대하였을지도 모르고, 애굽의 매춘굴을 헤매며 괴로운 심사를 달랬을지도 모른다.
사라는 밤마다 바로의 몸을 받아들이면서 또 얼마나 많은 눈물을 흘렸을까. 왕후로서의 안락함과 호화로움 같은 것은 사라에게 전혀 위로가 되지 못하였을 것이다. 사라가 ‘금병매’에 나오는 반금련처럼 교활한 여자였다면 바로에게 아브라함이 자신의 남편이라고 고백하여 아브라함을 죽이도록 한 후에 왕후로서 살아갔을지도 모른다. 자기 목숨 구하겠다고 아내를 누이라고 속인 남자와 다시 살아보았자 무슨 낙이 있겠느냐고 자신을 합리화하면서 말이다.
사라가 바로의 궁에 있는 날이 길어지면 아브라함의 가정은 그야말로 파탄에 이를 것이므로 여호와께서 급히 개입하여 바로와 그 집에 큰 재앙을 내려 사라를 다시 아브라함한테 돌려보내게 하였다.
그런데 소돔과 고모라의 심판이 있은 연후에 아브라함은 애굽에서 저질렀던 잘못을 또 되풀이한다. 그때 아브라함은 남방으로 이사하여 가데스와 술 사이 그랄에 거주하였는데 이와 같이 남쪽으로 내려갈 때마다 그런 잘못을 저질렀다. 아브라함이 남쪽 남자들을 다른 지역 남자들보다 더 두려워한 것일까.
아브라함이 사라를 자기 누이라고 하였으므로 이번에는 그랄 왕 아비멜렉이 사라를 취하여 아내로 삼으려고 하였다. 아마도 첫날밤을 보내려 한 날 밤이었을 것이다. 아비멜렉은 혼인잔치를 하며 술을 많이 마셨는지 사라와 교합을 하기도 전에 곯아떨어진 모양이다. 그때 여호와께서 꿈속에 나타나 아비멜렉에게 무서운 경고를 하였다. 사라의 몸을 범하면 죽여버리겠다고 겁을 준 것이다. 아비멜렉은 아무 잘못도 없는 자를 죽이시는 법이 어디 있느냐고 항변하면서도 다음날 이른 아침에 사라를 아브라함에게 돌려보낸다.
아비멜렉이 자신을 속인 데 대해 항의하자 아브라함이 한 말이 걸작이다.
‘이곳에서는 하나님을 두려워함이 없으니 내 아내로 인하여 사람이 나를 죽일까 생각하였음이요, 또 그는 실로 나의 이복누이로서 내 처가 되었음이니라.’
말하자면 아내를 누이라고 한 것은 사람들을 속인 행위가 아니라는 것이다. 왜냐하면 사라는 아내이면서 누이이기 때문이다.
아리따운 여인을 아내로 둔 자가 낯선 땅으로 가게 될 때 본능적으로 위험을 감지하고 살 길을 찾았다는 것은 그 시대가 얼마나 험악했는지를 말해준다. 그리고 그런 시대에는 가장 권력이 강한 자가 가장 아리따운 여인을 아내로 삼았음은 두말할 필요가 없다.
요즘 시대에는 아리따운 여자를 아내로 둔 남자를 공공연히 죽이지는 않지만 정치권력과 자본권력을 지닌 자들이 아리따운 여인들을 독점하려는 경향이 있는 것만은 부인할 수 없다. 그런 와중에 실제로 아리따운 여인을 잃은 남자들이 폐인이 되어 죽기도 하니 지금도 아브라함의 불안과 두려움은 여전히 유효하다 할 것이다. 불안한 아브라함들은 여호와를 의지할지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