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간동아 29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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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자친구가 강도라니…”

  • < 신을진 기자 > happyend@donga.com

    입력2005-01-12 13:55: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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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여자친구가 강도라니…”
    영화가 시작되면 비 오는 밤거리에 처참한 모습으로 쓰러진 한 남자가 등장한다. 라디오에서는 경쾌한 음악소리가 들려오고…. 전후사정을 알 리 없는 관객들은 이 장면이 무엇을 뜻하는지 자못 궁금해진다. 그리고 누군가는 생각할 것이다. ‘가만, 저거 어디서 본 장면 같은데….’ 무성영화에서 유성영화로 옮겨가던 시절, 잊힌 배우로 전락한 늙은 여배우와 젊은 시나리오 작가의 이야기를 다룬 영화 ‘선셋대로’(빌리 와일더 감독). 이 유명한 영화의 마지막 장면에서 죽은 채 수영장에 떠오른 남자 주인공의 모습과 이를 비춘 카메라의 눈길이 지금 보고 있는 영화의 그것과 흡사하다는 사실을 떠올릴 수 있다면 당신은 진정한 영화광이다.

    그리고 이야기는 6개월 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빗속에 쓰러진 남자의 이름은 ‘브랜단’. 밤이면 혼자 극장에서 영화를 보고, 직접 요리를 하고, 주일이면 성가대에서 경건한 모습으로 노래하는 이 남자의 직업은 교사. 내성적이고 고지식한 그는 사람과 어울리지 못하고 학교에서도 ‘왕따’당하며 고독하게 살아간다.

    자신이 좋아하는 영화와는 달리, 그저 고요한 호수 같기만 하던 이 남자의 일상에 어느 날 한 여자가 뛰어든다. 그녀의 이름은 ‘트루디’. 너무도 거침없고 생기발랄한 그녀는 브랜단의 일상에 엄청난 변화를 가져온다. 두 사람은 장 뤽 고다르의 영화 ‘네 멋대로 해라’의 한 장면처럼 거리를 질주하고, 침대에서도 영화 속 대사로 사랑의 밀어를 속삭이며 짜릿한 사랑의 기쁨을 만끽한다.

    하지만 그녀를 사귈수록 뭔가 미심쩍은 구석들이 드러나면서 브랜단은 혼란에 빠진다. 직업이 몬테소리 교사라는 트루디는 밤이면 외출했다가 새벽이면 이곳저곳에 상처를 입은 채 돌아오고, 그녀의 서랍에는 무시무시한 연장들이 가득 차 있는 것이 아닌가. 공교롭게도 TV에서는 남자만 골라 살해한 후 거세하는 엽기살인마에 대한 사건이 보도된다. 잔뜩 겁에 질린 브랜단이 여자를 의심하기 시작하자 트루디는 자신의 정체를 밝힌다. “나, 도둑이야.” 그리고 내친김에 소심한 브랜단을 절도행각에 동참시킨다.

    “어때? 짜릿하지?” 라고 부추기면서…. 남자의 가족과 만남이 있던 날, 브랜단의 누나는 트루디의 신경을 거슬리게 하고 화가 난 트루디는 절교를 선언한다. 브랜단은 트루디의 마음을 돌리려고 ‘선셋대로’의 윌리엄 홀든 흉내(영화의 첫 장면)까지 내보지만 그녀는 “이번엔 또 무슨 영화지? ‘플러버’? ‘타이타닉’?”이라며 남자를 머쓱하게 한다.



    ‘브랜단 앤 트루디’는 전체적으로 보면 영화밖에 모르는 소심한 남자가 대담한 여도둑의 강도행각에 동참하는 이야기지만, 그 안에 눈여겨볼 만한 여러 장치를 깔고 있다. 영화광이 아니라면 쉽게 눈치챌 수 없지만 수많은 영화의 패러디, 또는 오마주(Hommage)가 등장해 보는 재미를 주고, 영화에 심취한 주인공이 사랑에 빠지면서 실제 삶을 생생하게 경험해 가는 과정을 통해 ‘영화적 현실’과 ‘실제 현실’을 고찰한다.

    달콤한 남녀의 사랑 이야기 속에 컴퓨터로 대변하는 기술의 문제, 중산층의 위선과 허위의식, 난민문제 등을 자연스럽게 녹여내 그저 가벼운 소품이길 거부한 재기 넘치는 이 영화는 영국 영화의 멋과 지성을 느끼게 해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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