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태어나기도 한참 전인 시대에 홀로 남은 선호는 통금에 걸리고 신분증이 없어 경찰서에서 곤경을 겪는다. 그런 그를 박인환(1926~56)과 전혜린(1934~65) 패가 구해준다. 갈 곳 없는 선호는 명동 로망스 다방에서 아르바이트하며 현대로 돌아갈 방법을 찾고자 고군분투한다. 그림을 그만두려는 무명 화가 이름이 이중섭(1916~56)인 걸 알게 된 선호는 그가 그림을 다시 그릴 수 있도록 독려하고, 실제로도 애주가였던 박인환과 함께 술잔을 기울인다. 전혜린과는 미묘한 기류를 형성한다.
그 시대를 아는 만큼 보이는 작품이다. 1956년 명동 사람들은 커피를 내리는 게 아니라 끓여 마시고, 국내 제조업의 시작을 알린 최초의 자동차 ‘시발’을 연호하며 감동한다. 전쟁이 끝나고 새로운 삶에 대한 희망으로 가득한 56년 명동에서 예술가들은 어떤 일을 해도 허락되는 일종의 특권층이었다. 시간여행을 통해 과거로 간 주인공이 당대 유명 예술가들과 교류한다는 점에서 작품은 영화 ‘미드나잇 인 파리’를 연상하게 한다. 박인환은 자신의 시가 2015년에도 기억되는지 궁금해하며 시를 읊지만 ‘애니팡 시인’ 하상욱의 시밖에 모르는 선호의 모습에 좌절하고, 대한민국 최초 패션디자이너 노라노는 21세기에서 날아온 그의 폴리에스테르 재질 셔츠를 만져보며 독특한 질감에 감탄한다.

배우들의 가창력은 나무랄 데 없지만 한 번에 기억되는 곡이 없는 건 아쉽다. 뮤지컬이 아니라 연극이었어도 충분히 힘 있는 이야기가 됐을 것 같다. 가장 기억에 남는 곡은 박인환이 죽기 직전 했던 말을 가사로 살린 ‘생명수’. 그러나 마지막 장면이 주는 감동을 깨고 싶지 않다면 생명수의 정체는 공연을 본 뒤 찾아보기를 권한다.
2016년 1월 3일까지, 서울 충무아트홀 소극장 블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