커밍아웃은 존재론적 문제다. 동성애자라고 밝히는 순간, 세상은 수많은 가치를 들이댄다. 적극 옹호하는 사람도 있지만 극렬히 반대하는 편견주의자도 많다. 그래서 커밍아웃은 단순한 취향의 고백이 아니라 존재론적 전회가 된다. 이런 관점에서 보면 이해영 감독의 ‘페스티발’ 역시 커밍아웃에 대한 영화라고 할 수 있다.
그의 첫 번째 작품 ‘천하장사 마돈나’는 커밍아웃을 정치적 구호나 선언이 아닌 생활적 수준으로 바라보았다. 주인공 오동구는 소박하게 자신의 취향을 고백한다. 엄청난 존재론적 전회를 사소한 체험으로 사건화함으로써 관객 역시 그 사소한 진정성에 동의하게 된다. 오동구의 힘은 무릇 그런 것이었다.
그런데 이번엔 정반대다. 성적 취향이란, 고백하지 않는 한 매우 사적인 영역이다. 사디스트든 마조히스트든 침대를 공개하지 않는 한 공론화될 일이 없다. 이 취향은 섹스 파트너와 단둘이 공유하는 비밀이자 코드다. 굳이 SM(사디스트, 마조히스트)이 사회적 인증을 받을 필요는 없다는 이야기다.
이 감독은 이 사적인 영역을 공적인 선언의 장으로 만든다. 영화 ‘페스티발’이 근본적으로 코미디인 까닭이 여기에 있다. 이 감독은 성적인 코드라는 작은 부분을 사회적 억압에 맞먹는 사건으로 침소봉대해서 웃음을 제공한다. 이런 과정을 통해 변태 딱지가 붙은 일련의 행위를 다양한 개인성의 공간으로 전복한다. SM이나 복장도착, 인형에 대한 집착 등을 전체성을 관통하는 구체적 개인성으로 다시 보는 셈이다.
‘페스티발’은 흔히 “변태”라고 부르는 도착적 성적 욕망이 어쩌면 억압의 결과일 수 있음을 보여준다. 이 결과물들은 특별히 이상한 사람들이 아니라 평범한 사람들의 가슴 한가운데에 매몰돼 있다. 우연히 봉합이 풀리는 순간 이 욕망은 마그마처럼 끓어넘치게 된다. 영화 속 주인공들이 다 그렇다.
고등학생 딸을 둔 과부는 자신의 새로운 성적 취향을 알게 된다. 이름도 몰랐던 SM이 자신의 적성에 꼭 맞는 것을 발견한다. 그녀는 SM이 지옥 갈 일이냐고 묻는다. 그러면서 당당히 거리로 나서자고 선동한다. 그녀의 말처럼 “엄마도 변태일 수 있다.” 마치 준수한 담임선생이 여자 속옷을 입고 만족을 느끼듯, 이건 그저 취향 문제일 뿐이다.
‘페스티발’은 섹시 코미디를 표방하지만 사실 성적 자유를 통해 전체주의의 획일성을 관통하고 싶은 선언적 영화에 가깝다. 시작은 우스꽝스럽지만 마무리는 사뭇 처연하고 비장하다. 이상의 소설 ‘날개’에 등장하는 정오의 사이렌처럼 엄정화의 노래 ‘페스티벌’이 울리면 사람들은 자아의 무장을 해제, 변태 복장을 하고 거리로 뛰어 나온다. 이런 세상에서 바보가 되고 변태로 취급받는 것은 바로 남근의 크기에 매달리는 제복 입은 경찰이다.
이 감독의 전언은 경찰 제복을 입은 마초와 속옷의 욕망이라는 이원 대립적 세계 안에서 펼쳐진다. 한편으론 수긍이 가지만 다른 한 편으론 성적 취향이라는 문제, 변태라는 레테르를 지나치게 극단화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라는 우려도 든다. 엇박자 유머 코드를 적절히 살려내는 배우들의 호연도 볼만하다. 프란체스카로 이미 우리에게 한 방 날린 심혜진의 능청이나 성동일의 의뭉스러움은 이 영화가 지향하는 ‘웃음’의 세계로 관객을 인도하는 데 성공한다.
하지만 코미디면 코미디답게 아예 머리를 화끈하게 어지럽혔으면 어땠을까. 래리 찰스 감독의 영화 ‘보랏’처럼 아주 불쾌하게 또는 과감하게 말이다. 섹스를 진짜 코미디로 만드는 순간 성적 자유로움이 제공될 수 있지 않을까. 정치적 구호와 연결된 섹스는 어쩐지 공익광고 속 윤리처럼 안쓰럽고 적막해 보이기도 한다.
그의 첫 번째 작품 ‘천하장사 마돈나’는 커밍아웃을 정치적 구호나 선언이 아닌 생활적 수준으로 바라보았다. 주인공 오동구는 소박하게 자신의 취향을 고백한다. 엄청난 존재론적 전회를 사소한 체험으로 사건화함으로써 관객 역시 그 사소한 진정성에 동의하게 된다. 오동구의 힘은 무릇 그런 것이었다.
그런데 이번엔 정반대다. 성적 취향이란, 고백하지 않는 한 매우 사적인 영역이다. 사디스트든 마조히스트든 침대를 공개하지 않는 한 공론화될 일이 없다. 이 취향은 섹스 파트너와 단둘이 공유하는 비밀이자 코드다. 굳이 SM(사디스트, 마조히스트)이 사회적 인증을 받을 필요는 없다는 이야기다.
이 감독은 이 사적인 영역을 공적인 선언의 장으로 만든다. 영화 ‘페스티발’이 근본적으로 코미디인 까닭이 여기에 있다. 이 감독은 성적인 코드라는 작은 부분을 사회적 억압에 맞먹는 사건으로 침소봉대해서 웃음을 제공한다. 이런 과정을 통해 변태 딱지가 붙은 일련의 행위를 다양한 개인성의 공간으로 전복한다. SM이나 복장도착, 인형에 대한 집착 등을 전체성을 관통하는 구체적 개인성으로 다시 보는 셈이다.
‘페스티발’은 흔히 “변태”라고 부르는 도착적 성적 욕망이 어쩌면 억압의 결과일 수 있음을 보여준다. 이 결과물들은 특별히 이상한 사람들이 아니라 평범한 사람들의 가슴 한가운데에 매몰돼 있다. 우연히 봉합이 풀리는 순간 이 욕망은 마그마처럼 끓어넘치게 된다. 영화 속 주인공들이 다 그렇다.
고등학생 딸을 둔 과부는 자신의 새로운 성적 취향을 알게 된다. 이름도 몰랐던 SM이 자신의 적성에 꼭 맞는 것을 발견한다. 그녀는 SM이 지옥 갈 일이냐고 묻는다. 그러면서 당당히 거리로 나서자고 선동한다. 그녀의 말처럼 “엄마도 변태일 수 있다.” 마치 준수한 담임선생이 여자 속옷을 입고 만족을 느끼듯, 이건 그저 취향 문제일 뿐이다.
‘페스티발’은 섹시 코미디를 표방하지만 사실 성적 자유를 통해 전체주의의 획일성을 관통하고 싶은 선언적 영화에 가깝다. 시작은 우스꽝스럽지만 마무리는 사뭇 처연하고 비장하다. 이상의 소설 ‘날개’에 등장하는 정오의 사이렌처럼 엄정화의 노래 ‘페스티벌’이 울리면 사람들은 자아의 무장을 해제, 변태 복장을 하고 거리로 뛰어 나온다. 이런 세상에서 바보가 되고 변태로 취급받는 것은 바로 남근의 크기에 매달리는 제복 입은 경찰이다.
이 감독의 전언은 경찰 제복을 입은 마초와 속옷의 욕망이라는 이원 대립적 세계 안에서 펼쳐진다. 한편으론 수긍이 가지만 다른 한 편으론 성적 취향이라는 문제, 변태라는 레테르를 지나치게 극단화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라는 우려도 든다. 엇박자 유머 코드를 적절히 살려내는 배우들의 호연도 볼만하다. 프란체스카로 이미 우리에게 한 방 날린 심혜진의 능청이나 성동일의 의뭉스러움은 이 영화가 지향하는 ‘웃음’의 세계로 관객을 인도하는 데 성공한다.
하지만 코미디면 코미디답게 아예 머리를 화끈하게 어지럽혔으면 어땠을까. 래리 찰스 감독의 영화 ‘보랏’처럼 아주 불쾌하게 또는 과감하게 말이다. 섹스를 진짜 코미디로 만드는 순간 성적 자유로움이 제공될 수 있지 않을까. 정치적 구호와 연결된 섹스는 어쩐지 공익광고 속 윤리처럼 안쓰럽고 적막해 보이기도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