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료칸. 2 롯코산 로프웨이.
일본 오사카 간사이 지방 고베의 롯코산 산속마을 아리마도 그랬다. ‘일본으로 겨울 여행을 왔는데 온천을 빠뜨리고 가는 것은 예의가 아니지’라며 온천에 방점을 찍고 찾아갔다. 이상한 나라에 들어간 동화의 주인공 앨리스처럼 마을을 구석구석 헤매고 다녔다.
고베에서 전철로 30분이면 갈 수 있다는 아리마 온천. 그러나 이번 여행길은 순탄치 않았다. 우연히 보게 된 아리마 온천에 대한 여행 정보지가 발단이었다. 롯코산에서 아리마 온천까지 연결하는 로프웨이가 있다는 것. 게다가 정보지에는 ‘롯코산에서 공중산책을 즐기면서 아리마 온천에 갈 수 있다’고 적혀 있었다.
그러나 로프웨이만 타면 되는 게 아니라는 것을 롯코산 입구에 가서야 알게 됐다. 이미 고베에서 전철과 버스를 갈아타고 왔는데, 로프웨이를 타기 위해서는 케이블카와 버스를 또 타고 가야 한다는 것이었다.
행복은 마음먹기에 달린 것이라고 스스로를 다독이며 기왕 벌어진 일, 롯코산 유람이라 생각하자고 마음을 바꾸자 모든 것이 아름답게 보이기 시작했다.
롯코산 입구에서 케이블카를 타고 정상으로 향했다. 롯코산 구석구석 아직까지 숨어 있는 단풍이 나뭇가지 사이에서 수줍게 얼굴을 내밀고 있었다. 한겨울인데도 단풍색이 선명했다. 잠시 후 케이블카는 롯코산초 역에 도착했다. 이곳에는 롯코 힐탑 갤러리와 전망대가 자리잡고 있다. 고베항이 한눈에 들어왔다. 이곳은 야경이 매우 아름다워 하코다테, 나가사키와 함께 일본 3대 야경의 하나로 꼽히는데 낮에 보는 풍경도 훌륭했다.
페루의 공중도시 마추픽추처럼 한참을 올라와 만난 이곳에는 새로운 세상이 펼쳐져 있었다. 오르골박물관과 인공스키장, 롯코산 목장, 롯코 가든 테라스의 아름다운 정원까지 깊은 산속에 즐길 만한 곳이 이어져 있었다.
하늘에 둥둥 떠서 내려다본 롯코산은 아찔했다. 그러나 아찔함도 잠시, 촘촘히 박힌 초록에 마음까지 시원해졌다. 20분쯤 걸렸을까. 눈앞에 작은 마을이 들어오기 시작했다. 고베에서 출발한 지 4시간 만에 드디어 아리마 온천에 도착했다.
1200년 역사 자랑 … 곳곳에 온천수 콸콸
8세기에 문을 연 아리마 온천은 1200년 이상의 역사를 자랑한다. 일본에서 오래된 온천 중 하나로 땅을 파는 기술이 없었던 시대부터 온천수가 나왔다. 마을 어디에 가나 온천수가 흐르는 것을 볼 수 있으며 일본의 고서에 등장할 만큼 역사적으로 많은 권력자가 이곳의 온천을 즐겼다. 도요토미 히데요시도 아리마 온천을 좋아하는 부인 네네와 함께 자주 방문했다고 한다.
이곳에서 가장 유명한 온천은 킨노유(金の湯)와 긴노유(銀の湯). 교토에 금각사와 은각사가 있는 것처럼, 아리마 온천에는 킨노유(금탕)와 긴노유(은탕)가 있다. 킨노유는 철분 성분이 많아 공기에 닿으면 붉게 산화하고, 탄산을 함유한 긴노유는 무색 투명하다.
킨노유는 생각보다 아담했다. 입구에 들어서니 뜨거운 김이 와락 얼굴을 덮쳤다. 왼쪽에는 진흙을 풀어놓은 것처럼 진한 적갈색의 탕이 있다. 진흙이 만져질 듯한데, 손에는 정작 아무것도 잡히지 않았다. 탕에 들어가 일본 여인들처럼 타월을 접어서 머리 위에 올려놓고 눈을 감았다.
탕에서 나오니 몸도 마음도 매끈해진 것 같았다. 겨우 한 번의 온천으로 두꺼비 피부가 백옥처럼 변할 리 없겠지만, 약이라도 바른 것처럼 잠시 피부가 부드러워졌다. 무거웠던 머리도 한결 가벼워졌다.
3 족욕을 하는 사람들. 4 마실 수 있는 온천수. 5 아리마 마을 풍경. 6 길거리에서 펼쳐진 원숭이 쇼. 7 인형 붓을 만들고 계신 할머니.
아리마 여행을 더욱 신나게 만들어준 것은 작은 마을의 정겨움이었다. 아리마는 조금은 엄하면서도 소박하게 하루하루를 사는 기품 있는 할머니의 모습을 닮았다. 마을 전체가 평화롭고 여유로운 모습이라 걷는 즐거움을 만끽할 수 있었다.
오래된 일본식 집이 빼곡히 서 있는 언덕을 오르다 보면, 아리마의 특산물 중 하나인 센베 공장을 만날 수 있다. 하얀 모자를 쓰고 분주히 움직이는 사람들을 창 너머로 몰래 구경하다 보니, 마치 일본 소설의 한 페이지에 들어간 듯한 기분이 들었다.
아리마 센베는 퐁퐁 솟아오르는 탄산수에 밀가루를 풀고 설탕과 소금으로 간을 해서 만든 과자로 1907년부터 생산, 역사와 전통을 자랑하는 아리마의 명물이다.
골목길 정육점도 많은 사람의 발길을 모으는 곳이다. 우리나라 정육점이 식당을 겸한 경우 보통 고기가 많이 들어간 김치찌개가 유명하지만, 아리마 정육점은 김치찌개가 아닌 고기를 듬뿍 넣은 크로켓을 팔고 있다. 따끈한 크로켓을 한 입 베어 물으니, 크로켓인지 스테이크인지 구분이 안 갈 정도였다.
아리마 온천 마을에서 가장 오래 머물렀던 곳은 붓을 만드는 가게였다. 붓은 붓인데, 평소 보지 못했던 특이한 붓이다. 특히 인형 붓은 글자를 쓰려고 붓을 들면 인형이 얼굴을 내민다. 가게 입구에서부터 TV와 각종 신문·잡지 인터뷰 기사가 붙어 있었고 안쪽에는 수십 년간 인형 붓을 직접 만든 할머니가 작업을 하고 계셨다. 세월이 흘러가든, 사람이 왔다 가든 안경 너머로 계속 붓을 만들고 계신 할머니의 모습이 아리마 마을과 많이 닮았다.
마을 입구에는 하천을 따라 산책할 수 있는 산책로가 잘 조성돼 있다. 마을 곳곳에는 사찰도 있다. 특히 사람들의 병이 치유되기를 기원하는 온천사라는 절이 눈길을 끌었다.
그렇다고 마을에 정적인 모습만 있는 것은 아니다. 마을 공터에서는 원숭이 쇼가 한창이었다. 둥그렇게 서서 원숭이 쇼를 보는 사람들의 얼굴에서는 재미가 저절로 묻어나왔다. 원숭이 재주도 재주였지만, 조련사의 신나는 입담에 사람들이 즐거운 웃음을 토해냈다.
아주 소박한 것 하나를 보면서도 이렇게 즐거울 수 있는데, 나는 그동안 위만 바라보면서 힘들게 살아왔던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아리마 온천에서 기대 이상의 행복을 만난 올해, 작은 마을에서 소소한 즐거움을 발견하는 여행이 이어질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