샤넬의 2009 가을/겨울 패션쇼에 온 바네사 티아라가 든 가방이 샤넬2.55입니다. 샤넬2.55는 가방의 소재와 체인의 디자인, 잠금장식 등이 바뀌면서 매년 새로운 모습으로 태어나고 있습니다. 물론 여전히 가장 인기 있는 디자인은 사진에서 보는 것과 같은 클래식한 형태입니다.
‘이렇게 둥글넓적하게 생기고 이렇게 한국말 잘하는 외국인 보신 적 있어요?’라고 대꾸하려다 꾹 참습니다.
“한국인 여권이면 3000달러가 넘어서 구입하실 수 없어요.”
그래도 한번 만져보게나 해달라고요, 어차피 3000달러도 없으니까요. 촉수엄금. 명품 가방의 윤기나는 실물을 만져보려던 시도는 이렇게 무산됩니다. 일단 가방을 가리키던 손가락을 언제 내릴지, 혹시 주위에 아는 사람은 없는지 눈을 가자미처럼 돌려봅니다. 출장길, 인천공항 면세점에서 있었던 일입니다. 출장을 다녀오니, 제가 들렀던 인천공항 면세점에서 몇 년 전 판매했다는 3000달러짜리 샤넬백이 엄청난 화제가 돼 있었고요.
해외 여행을 가거나 출장을 가는 ‘남모를’ 즐거움 중 하나는 면세 쇼핑에 있습니다. 한국 남성들은 발렌타인17, 여성들은 화장품을 주로 삽니다. 면세 쇼핑은 ‘해외에서 사용, 소비되거나 해외 친지의 선물 등으로 외국으로 가지고 나가는 것을 조건’으로 합니다.
하지만 2박3일 도쿄 여행 가서 스킨로션 300ml를 몽땅 얼굴에 바를 수 없고, 단체관광 가면서 연락 끊긴 ‘해외 친지’를 찾아 선물 건네줄 리도 없으니 발렌타인17도, 화장품도 국내에 다시 갖고 들어오기 위한 경우가 대부분이죠.
면세 쇼핑은 말 그대로 세금을 내지 않기 때문에 놓치지 말아야 할 ‘알뜰쇼핑 노하우’로 알려져 있고, 여행 후의 허전한 마음을 달래주는 전리품 같은 것이기도 합니다. 여성들 사이에서 친구가 자랑하는 면세 쇼핑 아이템은 이구아수 폭포 앞에서 찍은 사진보다 더 확실하고 부러운 여행의 추억이랍니다.
면세 조건은 나라마다 다른데 우리나라에선 우리 국민이 400달러 이상 면세 쇼핑을 하면 입국할 때 신고하고 세금을 내야 합니다. 3000달러 넘게는 아예 구입 불가입니다. 그런데 더도 덜도 아닌 딱 3000달러짜리 샤넬백을 살 확률은 글쎄요, 상당히 낮죠.
어쨌거나 천우신조, 3000달러짜리를 사서 출국했다가 누군가에게 주지 않고 다시 갖고 들어올 경우엔 공항에서 세관신고서를 쓰고 세금을 내야 합니다. 그럴 바엔 국내 매장에서 사지, 뭐 하러 빈약한 면세점에서 살까요? 운이 좋으면 세관신고서 쓰지 않고 살짝 갖고 들어올 수도 있기 때문이죠. 이걸 밀수라고 부르죠.
또는 우연히 공항에서 같은 비행기를 탄 사람이 “이렇게 만난 것도 인연인데, 기분이니 하나 사드릴게요. 마침 면세점에 3000달러짜리 백이 있군요. 하하!”라고 말할지도 모르잖아요.
샤넬백, 그중 다이아몬드(혹은 바둑판) 모양으로 누벼 박은 퀼팅백, 그중에서도 2.55라는 이름을 가진 숄더백은 한국에서 어떤 이너서클의 상징이 됐죠. 어엿한 집안 간의 혼사임을 과시하기 위해 며느리와 시어머니가 교환하는 ‘잇-혼수백’, 고급 사교계와 네트워킹돼 있다고 주장하는 신분증, 권력자의 부인에게 금전적 후원을 서약하는 진상품, 스포츠카를 타는 남자가 여자를 유혹하는 이벤트, 수상쩍은 여성 로비스트들이 예외 없이 들고 다니는 필수품, 여성 연예인들에게 중독적으로 소비되는 패션 아이템, 때로는 평범한 여직원이 카드 할부로 구입하는 궁극의 소비 등등.
샤넬2.55는 가브리엘 샤넬이 1955년 2월에 만든 가방이란 뜻에서 붙여진 이름이에요. 샤넬은 1939년 매장과 스튜디오를 폐업했다가 54년 ‘트위드 슈트’와 ‘투톤 펌프스’, 이어 ‘2.55’를 내놓으면서 화려하게 복귀합니다. 샤넬의 기념비적 3대 히트상품이죠.
여성들의 행동을 억압하는 복식상의 관행을 타파하려는 샤넬답게, 2.55는 어깨끈을 단 최초의 가방으로 여성의 손을 해방시켰다는 찬사를 듣습니다. 이런 탄생 배경을 가진 가방이 오늘날 가장 폐쇄적인 캐릭터의 패션 아이콘이 된 것도 흥미롭죠? 샤넬의 전설을 되살린 천재 디자이너 칼 라거펠트에 의해 계속 새로운 모습으로 태어나 부동의 ‘잇백’ 자리를 지키고 있는 이 가방 하나 가격이 3000달러 안팎이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