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르메스 버킨백. [구글]
영화 ‘기생충’의 장르를 묻는 질문에 대한 봉준호 감독의 답이다. 봉 감독의 말대로 ‘기생충’에는 두 가족이 등장한다. 가난한 김기택(송강호 분) 가족과 부자인 박 사장(이선균 분) 가족.
여러 사업에 도전했지만 실패해 현재 백수인 아버지와 그의 가족은 반지하 집에 살고 있다. 전원이 백수로 살길이 막막하지만 사이좋은 가족이다. 어느 날 김기택의 장남 기우(최우식 분)는 명문대생 친구가 고액 과외 자리를 연결시켜줘 글로벌 IT(정보기술) 기업의 젊은 CEO(최고경영자)인 박 사장의 집을 방문하게 된다.
처음 방문한 박 사장 집은 그야말로 ‘저택’이었다. 박 사장의 아내는 그의 실력을 보기 위해 첫 수업을 참관했고, 성공적으로 수업을 마친 기우는 정식 채용된다. 기우의 고액 과외를 시작으로 기택의 온 가족이 박 사장 집에 기생하게 된다.
봉 감독이 자신의 작품에서 박 사장 가족처럼 부유한 계층의 생활상을 보여준 것은 ‘기생충’이 최초다. 하지만 ‘봉테일’이라는 별명답게 부유함을 잘 보여주고자 여러 가지 소품을 활용했다. 그는 한 인터뷰에서 “이번이 부자들과 부잣집을 찍는 최초의 경험이었고, 그래서 아주 흥미로웠다. 잘 모르는 세계라 상의도 많이 하고 공부도 많이 했다”고 말했다.
영화 ‘기생충’에서 연교(조여정 분)가 운전기사 기택(송강호 분)과 같이 장보러 가는 장면에 등장하는 버킨백(왼쪽)과 그녀의 드레스룸에 진열돼 있는 버킨백. [영화 ‘기생충’ 화면 캡처]
‘기생충’에 등장하는 박 사장 집은 실제가 아닌 세트다. 건축가들에게 자문 받아 부잣집을 실감나게 재현했다. 외장재 하나하나에도 신경 썼다. 의자가 2500만 원, 식탁이 500만 원이었다고 한다. 봉 감독은 인터뷰에서 이런 말도 했다.
“쓰레기통이 250만 원인데, 페달을 밟아도 뚜껑에서 소리가 안 난다. 이런 가구가, 이런 벽지가, 이런 쓰레기통이 있구나. 나는 그런 세계가 있는지 몰랐는데 너무 신기하더라. 그거 반납할 때 달달달 떨면서 했다.”
박 사장의 아내로 나오는 배우 조여정의 차림새는 고급스럽고 부티가 흘렀다. 그녀의 부와 럭셔리함을 한번에 보여주는 소품이 운전기사인 송강호와 함께 장보러 가는 장면에서 등장한다. 바로 에르메스 버킨백이다.
명품업계를 피라미드로 그리면 프랑스 브랜드 에르메스는 단연 그 정점에 있다. 처음부터 끝까지 사람 손으로만 제품을 만드는 장인정신으로 명품 중 명품으로 꼽힌다. 조여정의 캐릭터를 완성시키기 위한 봉테일의 현명한 선택이라 할 수 있다.
말안장 만들며 탄생한 에르메스
메종 에르메스 도산 파크. [에르메스 홈페이지]
에르메스는 탄생 당시 말안장과 마구용품을 만들었다. 그러면서 승마를 즐기는 왕족, 귀족 사이에서 점점 인지도가 높아지기 시작했다. 브랜드의 지평을 넓힌 것은 1900년대 초반으로, 티에리 에르메스의 아들과 손자가 브랜드에 합류하면서 여행용 가방, 실크 등으로 제품군을 넓혀갔다. 장인이 만들어내는 높은 품질의 브랜드라는 이미지가 각인되면서 전 세계에 알려지기 시작했다. 현재까지 6대에 걸쳐 가족기업의 형태로 사업을 이어오고 있다. 브랜드를 대표하는 베스트셀러가 ‘켈리백’과 ‘버킨백’이다.
왕비의 가방, 켈리백
켈리백은 1935년 출시됐지만, 그 원형은 1837년 창립 당시로 거슬러 올라간다. 기수들이 사냥을 나갈 때 마구(馬具)를 넣던 큰 주머니를 ‘새들 캐리어(saddle carrier)’라고 불렀다. 이것을 여성들이 사용할 수 있도록 작은 크기로 만든 것이 켈리백이다. 켈리백은 또 다른 베스트셀러인 버킨백의 원형이 됐다.1956년 모나코 왕비인 그레이스 켈리가 임신한 것을 기리기 위해 빨간색 악어가죽으로 만든 에르메스의 ‘쁘띠 삭 오뜨 아 크루아’(핸드백 제품명)를 들고 사진을 찍었고 이것이 ‘라이프(Life)’ 잡지 표지에 실리면서 왕비 이름을 따 ‘켈리백’으로 불리게 됐다. 이에 로베르 뒤마(3대 회장인 에밀 모리스 에르메스의 사위)가 직접 모나코 왕실로 찾아가 이 가방의 이름을 켈리라고 지어도 된다는 허락을 받아 그 후 계속 사용하게 됐다.
부의 상징, 버킨백
켈리백을 든 그레이스 켈리(왼쪽)와 버킨백을 든 제인 버킨. [GettyImages]
버킨백의 탄생에는 에피소드가 있다. 1984년 에르메스의 5대 회장 장 루이 뒤마는 비행기 옆자리의 여성이 가방에서 뭔가를 찾으려다 가방 안에 있는 소지품들을 몽땅 떨어뜨리는 것을 봤다. 그는 “내가 당신을 위해 유용한 가방을 만들어주겠습니다”라 말했고, 수납이 잘 되는 검은색 가죽 가방을 제작했다. 그때 비행기 옆자리에 앉았던 여성의 이름이 바로 ‘제인 버킨(Jane Birkin)’이었다.
제인 버킨은 샹송 가수이자, 프랑스의 유명 음악가 겸 예술가인 세르주 갱스부르의 전 부인으로, 1970년대 중반 멋스러운 편안함과 자유분방함을 대표하는 패션 아이콘이었다. 버킨백은 그녀의 이름을 따서 만들어졌다.
“It’s not a bag. It’s a Birkin.”
미국 드라마 ‘섹스 앤 더 시티’에서 에르메스 매장 내 버킨백을 바라보고 있는 사만다(왼쪽)과 캐리. [섹스 앤 더 시티 화면 캡처]
“It’s not a bag. It’s a Birkin(이건 가방이 아니에요. ‘버킨’이죠).”
켈리백과 버킨백은 세계 각국 부호와 할리우드 스타의 애장품이다. 주문 후 2년 이상을 기다려야 이 백을 손에 쥘 수 있는데도 주문이 밀려든다고 한다. 켈리백과 버킨백은 최저 가격이 1000만 원대일 정도로 ‘지나치게’ 비싸지만 일부 사람들 사이에선 다른 소비를 줄여서라도 갖고 싶은 명품으로 평가받는다.
100여 개의 버킨백을 소장한 빅토리아 베컴. [GettyImages]
에르메스의 모든 가방에는 장인의 데스크 번호와 제작연도가 찍힌다. 수년, 혹은 수십 년 후 수선이 필요하면 가방을 만든 장인이 직접 고친다. 가죽은 연도별, 색상별, 종류별로 보관해두고 수선 시 제작연도와 가장 가까운 때의 가죽을 사용한다. 이 때문에 제품이 ‘반영구적’이며 대를 이어 사용할 수 있다.
한국 영화 ‘기생충’은 칸영화제 작품상인 황금종려상을 수상하는 쾌거에 이어 한국 영화 최초로 미국 골든글로브 시상식에서도 외국어 영화상을 수상했다. 봉 감독은 황금종려상 수상 당시 “기생충이라는 영화는 큰 모험이었다. 작품을 같이 했던 모두가 장인(匠人)”이라고 강조했다. 봉테일은 배우뿐 아니라 조여정의 소품까지도 장인정신을 기준으로 고른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