웨이브온 정면(왼쪽). ㅇ커피 정면. [사진제공=이뎀건축사사무소]
건축계 표절 문제에 대한 이야기가 나올 때마다 등장하는 말이다. ‘아파트 공화국’에서 살아서 그런지 건축은 어차피 다 비슷비슷하거나 윗세대 누군가의 것을 베끼는 것 아니냐는 냉소적 반응이 나오기 일쑤다.
하지만 건축도 엄연히 저작권 보호의 대상이다. 저작권법 제4조 제1항 제5호는 “건축물, 건축을 위한 모형 및 설계도서 등”을 건축저작물로 규정한다. 건축이 음악 미술 문학처럼 창작물의 하나로 간주된다는 소리다. 또 특허권 상표권 디자인권 같은 산업재산권과 달리 등록 절차를 거치지 않아도 창작의 표현만으로 법률의 보호대상이 된다.
표절에 둔감한 한국 건축계
웨이브온 1층 홀 및 바테이블(왼쪽). ㅇ커피 1층 홀 및 바테이블. [사진제공=이뎀건축사사무소]
둘째 건축 저작권의 기준이 뚜렷이 명시돼 있지 않다. 음악의 경우 8소절 이상 유사성이 그런 기준의 하나로 감안되지만 건축의 경우엔 총체적 결과물의 유사성만을 본다. 단순 아이디어 차용만으로는 표절이 성립되지 않는다. 아이디어의 유사성뿐 아니라 결과물의 실질적 유사성, 원작물에 대한 접근성까지 종합해 판사의 재량에 의해 결정된다. 아파트, 공장, 창고처럼 건축계에서 관행으로 용인된 요소를 적용했을 경우 표절로 보지 않는 것도 이 때문이다.
셋째 국내 유명 건축가의 건축물 중 상당수가 해외 유명 건축가의 작품을 대놓고 모방한 경우가 많았다는 역사적 요소도 빼놓을 수 없다. 해외여행 자유화 전까지만 해도 직접 해외 건축을 본 사람이 많지 않아 이를 모르는 경우가 많았다. 알았다 하더라도 국내 건축 발전 과정에서 ‘창조의 어머니’로서 거쳐야할 통과의례쯤으로 눈감아 주는 문화도 있었다. 그래서 해외건축은 베껴도 되고 국내건축은 왜 안 되느냐는 심리도 없지 않았다. 하지만 건축을 재테크의 일환으로만 바라보는, 왜곡된 건축문화를 바로잡기 위해서라도 건축 표절 문제를 더 이상 묵인해선 안 된다는 목소리가 커지고 있다.
이런 분위기 속에 향후 건축 표절 문제에 대한 새 이정표가 될지도 모를 소송이 시작됐다. 부산 기장의 유명 카페 웨이브온을 설계한 이뎀건축사무소(소장 곽희수·이하 이뎀)와 이 카페를 운영하는 빈크러쉬컴퍼니(사내이사 허범규, 이하 빈크러쉬)는 지난해 12월 26일 울산 바닷가의 대형카페 o커피의 건축사무소와 건축주를 상대로 0커피의 철거와 업종 전환을 요구하며 각각 1억8200만원과 1억원의 손해배상 청구소송을 서울서부지원에 냈다. 2019년 7월 준공된 o커피 건축물이 그보다 2년6개월 앞선 2016년 12월 준공된 웨이브온의 건축저작권을 침해하고 부정경쟁방지법을 위반했다는 것이 소송 청구 이유다.
종전 건축계 표절 사례
웨이브온 2층 내부공간(왼쪽). ㅇ커피 2층 내부공간. [사진제공=이뎀건축사사무소]
이와 달리 별개의 2개 건축물 간 표절 사례도 있다. 삼각텐트를 형상화한 경기 용인의 한 펜션(2011년 12월 준공)의 독특한 외관을 모방한 강화도 펜션(2012년 8월 준공) 건축가에 대해 1000만원의 손해 배상금 지급을 판결한 2013년 서울중앙지법의 판례다. 당시 재판부는 원고가 설계한 펜션이 예술성이 높지 않은 기능적 저작물이라 밝혔다. 하지만 2006년 개정된 저작법이 저작물의 대상을 ‘문학·학술 또는 예술의 범위에 속하는 창작물’에서 ‘인간의 사상 또는 감정을 표현한 저작물’로 범위를 확대한 만큼 피고 측 펜션이 원고의 저작권 중 복제권과 성명표시권을 침해했다고 판결했다. 동심원 형태 물결파동을 음각한 서울 강남구 영동대로의 복합문화공간 크링(2008년 준공)의 독특한 외관을 제주도의 한 면세점 건축물(2014년 준공)이 모방한 사례도 있다. 이 사례는 소송으로 가기 전 양측 합의로 끝났다. 이처럼 건축 표절 문제는 판례로 기준이 확립되기 전에 합의로 무마되는 경우가 훨씬 더 많은 것으로 알려져 있다.
용인 펜션과 크링을 표절한 사례의 경우 외관의 유사성이 주로 문제가 됐다. 하지만 웨이브온과 o커피의 경우는 외관뿐 아니라 내부구조까지 닮았다는 데 있다. 게다가 웨이브온은 ‘콘크리트의 마술사’로 불리는 건축가 곽희수의 대표작 중 하나로 2017년 제24회 세계건축(WA)상, 2018년 한국건축문화대상 국무총리상을 수상해 국내외에 그 예술성을 높이 인정받은 건축이다. 그 독특한 건축미로 웨이브온은 연간 90만 명이 찾는 부산의 명소가 됐다.
외형은 물론 내부 공간구성까지 빼닮아
웨이브온 3층 내부공간(왼쪽). ㅇ카페 3층 내부공간. [사진제공=이뎀건축사사무소]
웨이브온의 독특한 내부 공간 구성은 가운데를 텅 비워둔 도넛 형태에 있다. 한국 카페의 방문객이 대부분 창가를 따라 가장자리 자리를 선호하기 때문에 정작 한가운데는 휴면공간이 되는 것에 착안해 가운데를 텅 비우거나 계단 공간으로 활용했다. 곽 소장은 이를 “가운데 귓구멍은 비었지만 그 주변을 이루는 귓바퀴가 소리의 공명을 돕는 귀의 구조”라고 설명했다. o커피의 내부를 보면 1층 바 테이블과 홀 구조는 물론 2, 3층의 공간구성까지 거의 같다. 심지어 2층 발코니의 경우 콘크리트 구조물 사이로 빛이 들게 한 것도 같고 천장에 사각형으로 음각 설치한 조명의 형태까지 닮았다. 이는 설계도면에서도 고스란히 확인된다.
이로 인해 o커피를 방문한 고객이 소셜미디어에 남긴 소감을 찾아보면 “울산의 웨이브온”, “부산 기장까지 갈 필요가 없어요”, “사장님이 같은가?”, “웨이브온 C급 짝퉁” 같은 내용이 가득하다. 웨이브온과 똑같은 공간으로 커피와 음료를 판매하는 바람에 영업상의 손실이 발생했다며 부정경쟁방지법 위반으로 함께 소송을 제기한 이유다. 무엇보다 o커피 건축물을 용인할 경우 웨이브온의 독창성이 훼손될 수밖에 없기 때문에 건축물의 철거와 업종전환까지 요구하고 나선 것이다.
웨이브온 지붕층(왼쪽). ㅇ커피 지붕층. [사진제공=이뎀건축사사무소]
이에 대해 원고 측 소송대리를 맡은 법무법인 리우의 정경석 대표변호사는 “원고 측이 소송을 제기한 것은 이 문제를 개인 대 개인의 문제로 풀기 위함이 아니라 유명 건축물 표절에 둔감한 건축계 전체에 경종을 울리기 위한 것”이라고 설명했다. 곽희수 소장은 “건축에도 단어와 문장, 문단이 존재하는데 o카페의 경우는 단어와 문장 수준이 아니라 책 전체를 베끼다시피 했다”면서 “지금도 아무런 죄의식 없이 제 작품을 도용한 건축모형을 홈페이지에 걸어두거나 심지어 대놓고 설계도면을 요청하는 건축사사무소가 있어 건축계의 자성을 촉구하기 위해 소송에 나섰다”라고 말했다.
웨이브온 2층 발코니(왼쪽). ㅇ커피 2층 발코니. [사진제공=이뎀건축사사무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