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품의 주인공

도둑 손에 들어간 보석 패닉 버튼 하나 없어서

세계 최고 보물을 모아놓은 곳의 세계 최고로 허술한 보안이 빚어낸 대참사

  • 민은미 주얼리칼럼니스트 mia.min1230@gmail.com

    입력2019-12-07 10:00: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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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독일 작센 경찰이 공개한, 도난당한 보물의 사진. [사진 제공 · 독일 작센 경찰]

    독일 작센 경찰이 공개한, 도난당한 보물의 사진. [사진 제공 · 독일 작센 경찰]

    어두운 실내로 손전등을 든 괴한 2명이 슬그머니 들어왔다. 괴한 1명이 진열장 유리를 마구 때려 부수자 유리가 순식간에 박살났다. 그들은 진열장 안 보석을 싹쓸이해 유유히 달아났다. 유리를 부수는 데 사용한 것은 손도끼였다. 총기류나 진열장 유리를 커팅하는 특수 장비를 사용한 게 아니었다. 그만큼 범행 수법은 단순하고 대담했으며, 순식간이었다. 보석을 강탈해 도주하는 데 걸린 시간은 4~5분. 

    영화의 한 장면 같지만 독일 드레스덴 그뤼네 게뵐베 박물관(그린볼트 박물관) ‘보석의 방’ 전시실에서 11월 25일(현지시각) 새벽에 발생한 실제 사건이다. 폐쇄회로(CC)TV 화면에 범행 장면이 선명히 남아 있었다. 

    그뤼네 게뵐베 박물관은 ‘유럽의 보석상자’로 불린다. 괴한들이 손도끼 하나로 훔쳐 달아난 물건은 ‘보석의 방’에 전시된 국보급 보석 100여 점. 가치가 1조3000억 원에 이른다. 인간의 상상력으로 만든 영화 ‘오션스8’ 속 다이아몬드 목걸이의 도난 금액이 1500억 원대였다. 그런데 현실에서 1조3000억 원대 보석 도난사건이 발생한 것이다. 1조 원대의 도난사건은 전 세계적으로도 유례없는 일이라 독일 전체가 큰 충격에 빠졌다. 독일 ‘빌트’는 ‘제2차 세계대전 이후 최악의 도난사건’이라고 평했다.

    메르켈-오바마 정상회담이 열린 곳

    1 괴한이 부순 독일 그뤼네 게뵐베 박물관의 ‘보석의 방’ 진열장. 2007년 12월 촬영한 사진. 2 그뤼네 게뵐베 박물관.3 도난사건이 일어난 박물관과 화재가 발생한 장소. [EPA-EFE, gettyimages, BBC]

    1 괴한이 부순 독일 그뤼네 게뵐베 박물관의 ‘보석의 방’ 진열장. 2007년 12월 촬영한 사진. 2 그뤼네 게뵐베 박물관.3 도난사건이 일어난 박물관과 화재가 발생한 장소. [EPA-EFE, gettyimages, BBC]

    범인 2명은 창문을 깨부수고 박물관 내부로 진입했다. ‘보석의 방’은 그뤼네 게뵐베 박물관 1층에 있다. 범인들은 박물관 내 전시실 가운데 유일하게 ‘보석의 방’만 타깃으로 삼았다. 손도끼로 진열장을 깨고 보물들을 챙긴 후 박물관 외부에 세워둔 아우디 A6 차량을 타고 달아났다고 한다. 독일 경찰은 박물관 밖에 공범 2명이 대기하고 있었던 것으로 보고 용의자를 4명으로 추정했다. 

    사건 당시 공교롭게도 인근 변전시설에 화재가 일어나 박물관은 정전 상태였다. 경찰은 이 화재와 도난사건의 연관성도 추적하고 있다. 독일 언론은 처음에는 범행 순간 정전 때문에 도난경보가 울리지 않았다고 보도했으나 다음 날 경보는 울렸다고 정정 보도했다. 당시 경비원들이 상해를 우려해 몸을 사린 채 경찰이 출동할 때까지 기다렸다는 정황도 드러나고 있다. 



    ‘보석의 방’은 작센왕국 시절의 보석과 장신구를 진열해놓은 곳이다. 작센왕국은 18세기까지 독일 선제후(選帝侯·중세 독일에서 황제의 선거권을 가졌던 제후)였다 독립 이후 1806년부터 1918년까지 독일 중부에 들어선 왕국으로, 영역은 현재의 작센주와 비슷하고 수도는 드레스덴이었다. 

    ‘드레스덴을 방문한다면 그뤼네 게뵐베로 불리는 보물창고를 가장 먼저 가봐야 한다.’ 

    18세기 후반 널리 읽혔던 유럽 여행 안내서에 작가이자 역사학자인 카이슬러가 쓴 문구다. 수백 년이 지난 오늘날까지도 이 문구는 유효하다. 2010년 버락 오바마 당시 미국 대통령이 처음 독일을 국빈 방문해 앙겔라 메르켈 총리와 정상회담을 열었던 장소도 바로 그뤼네 게뵐베 박물관이다. 


    미국 뉴욕 메트로폴리탄 박물관 ‘Making Marvels’ 전시회에 진열 중인 드레스덴 그린(왼쪽 가운데)과 전시회 포스터. [유튜브 화면 캡처]

    미국 뉴욕 메트로폴리탄 박물관 ‘Making Marvels’ 전시회에 진열 중인 드레스덴 그린(왼쪽 가운데)과 전시회 포스터. [유튜브 화면 캡처]

    사건이 발생한 ‘보석의 방’ 소장품 중 ‘드레스덴 그린’과 ‘드레스덴 화이트’는 박물관의 큰 자랑거리다. 드레스덴 화이트는 49캐럿 D컬러, 무색 다이아몬드가 세팅된 장신구로 1728년 ‘강건왕’ 아우구스트(August II the Strong·재위 1694~1733)가 직접 구입한 것이다. 그는 예술을 후원했고 드레스덴을 18세기 유럽 바로크 예술의 중심지로 이끌었다. 드레스덴 화이트는 강건왕 시대의 찬란함을 말해주는 보물인 셈이다. 

    드레스덴 그린은 박물관에서 가장 유명한 보물이다. 강건왕 아우구스트의 아들인 아우구스트 3세(재위 1733~1763)가 구입해 작센의 보물 컬렉션 전체의 가치를 드높인 귀중품이다. 41캐럿의 그린 다이아몬드가 세팅된 장신구로, 세계 최고 자연산 그린 다이아몬드라는 평가를 받는다. 

    그뤼네 게뵐베 박물관 측은 당초 2개의 보물이 모두 미국 뉴욕 메트로폴리탄 박물관에 있어 강탈을 면했다고 밝혔다. 현재 메트로폴리탄 박물관에는 16~18세기 유럽의 경이로운 공예품들을 볼 수 있는 ‘Making Marvels: Science and Splendor at the Courts of Europe’ 전시가 11월 25일부터 열리고 있다. 하지만 박물관 측은 하루 만에 발표를 뒤집었다. 드레스덴 그린은 다행히 사건 당시 메트로폴리탄 박물관에 임대돼 화를 면했으나 드레스덴 화이트는 도난 물품에 포함돼 있다고 밝혔다. 

    강건왕 아우구스트의 최고 보물까지 2인조 괴한의 수중으로 넘어간 것이다. 미카엘 크레취머 작센주 총리는 “우리 작센주가 도둑맞은 것이나 다름없다”고 탄식했다. 그뤼네 게뵐베 박물관 측도 “18세기에 만들어진 보석류의 역사적·문화적 가치는 환산하기 어렵다”고 전했다. 

    박물관 측은 도난 물품 목록을 상세히 밝히지 않고 있고 독일 경찰이 도난품의 일부만 공개한 상태다. 드레스덴 화이트 이외에 대표적인 도난품은 아우구스트 3세가 어린 시절 폴란드로부터 ‘흰독수리 훈장’을 받은 것을 기념하고자 궁중 보석세공사에게 제작을 지시한 흰독수리 공예품이다. 이 공예품은 독수리의 몸을 물방울 다이아몬드로 만든 값진 보물이다. 

    아우구스트 3세가 딸 마리아 공주의 탄생을 기념해 1782년 제작한 리본 모양의 다이아몬드 장식 역시 도난 목록에 들어 있다. 장식에는 총 614캐럿에 달하는 다이아몬드 660여 개가 촘촘히 박혀 있다. 작센왕국의 문양이 새겨진 훈장도 도난당했다. 훈장은 20캐럿 다이아몬드와 루비로 장식돼 있다. 경찰이 어떤 보물이 사라졌는지 자세히 공개하지 않았지만 유추해볼 수는 있다. 


    2017년 9월 19일~11월 26일 국립중앙박물관에서 열린 ‘王이 사랑한 보물’展 포스터. [사진 제공 · 국립중앙박물관]

    2017년 9월 19일~11월 26일 국립중앙박물관에서 열린 ‘王이 사랑한 보물’展 포스터. [사진 제공 · 국립중앙박물관]

    2017년 9월 19일~11월 26일 우리나라 국립중앙박물관에서는 ‘王이 사랑한 보물-독일 드레스덴박물관연합 명품전’이 열렸다. 드레스덴박물관연합의 대표 소장품 130점이 당시 국내 최초로 전시됐다. 당시 국내에 전시됐던 보물들이 도난당했을 공산이 크다.

    강건왕 아우구스트의 보물들

    1 로즈컷 다이아몬드 장식 세트 중 작은 검과 칼집, 1782~1789년경, 그뤼네 게뵐베 박물관. 2 강건왕 아우구스트의 군복, 1700년경, 무기박물관.
3 강건왕 아우구스트의 생김새를 본뜬 태양 가면, 1709년, 무기박물관. 4 타원형의 뚜껑이 있는 잔, 1587년, 그뤼네 게뵐베 박물관. 5 아테나, 1650년경, 그뤼네 게뵐베 박물관. 6 여성 형상의 술잔, 1603~1608년경, 그뤼네 게뵐베 박물관.
7 두 점의 중국 관음상과 
마이센 복제품(오른쪽), 17세기 후반, 1675~1720년경. 
1713~1720년경, 도자기박물관.

    1 로즈컷 다이아몬드 장식 세트 중 작은 검과 칼집, 1782~1789년경, 그뤼네 게뵐베 박물관. 2 강건왕 아우구스트의 군복, 1700년경, 무기박물관. 3 강건왕 아우구스트의 생김새를 본뜬 태양 가면, 1709년, 무기박물관. 4 타원형의 뚜껑이 있는 잔, 1587년, 그뤼네 게뵐베 박물관. 5 아테나, 1650년경, 그뤼네 게뵐베 박물관. 6 여성 형상의 술잔, 1603~1608년경, 그뤼네 게뵐베 박물관. 7 두 점의 중국 관음상과 마이센 복제품(오른쪽), 17세기 후반, 1675~1720년경. 1713~1720년경, 도자기박물관.

    15개 박물관으로 구성된 드레스덴박물관연합은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박물관 연합체 가운데 하나다. 그뤼네 게뵐베 박물관이 그 연합의 중심에 있다. 당시 전시된 보물은 어떤 것들일까. 

    전시 제1부는 아우구스트에게 붙는 ‘강건왕’의 의미와 그 양면성을 설명하는 내용이었다. 태양 마스크, 의례용 검, 사냥도구, 해체된 군복 등을 진열했다. 전시 제2부가 바로 도난사건과 직결된다. 제2부는 강건왕 아우구스트가 드레스덴을 유럽 예술의 중심지로 만들길 꿈꾸며 최고 수준의 예술품을 수집해 만든 보물의 방 ‘그린볼트’의 보물을 소개하는 자리였다. 특히 총 911여 개의 다이아몬드로 장식된 ‘로즈컷 다이아몬드 장식 세트 중 작은 검과 칼집’이 당시에도 가장 눈길을 끌었다. 

    길이 96cm, 무게 553g의 작은 검이지만 칼 손잡이에는 9개의 큰 다이아몬드를 포함해 799개의 다이아몬드가 박혀 있다. 이것은 검은 신발 장식, 무릎 조임쇠, 조끼, 외투 단추, 견장과 한 세트다. 불행히도 이번 도난사건에서 도둑들에게 도난당한 보물 가운데 하나로 보인다. 

    전시 제3부에는 강건왕 아우구스트가 수집, 제작한 도자기들을 진열했다. 당시 자기는 유럽에서 ‘하얀 금’으로 불리던, 귀하고 인기 있는 물건이었다. 

    필자는 두 곳의 주얼리 회사에서 근무한 경험이 있어 이번 사건 보도를 접하고 더욱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 보석이나 주얼리를 취급하는 매장은 언제나 강도범 또는 절도범의 타깃이 될 수 있다. 그만큼 위험한 상황에 놓일 가능성이 잠재돼 있어 고객에게는 보이지 않는 다양한 보안시설이 매장 곳곳에 숨어 있다. 주얼리 회사 또한 보안장치에 상당한 비용을 투자한다. 한 예로 고가의 주얼리를 취급하는 매장에는 ‘패닉 버튼’으로 불리는 장치, 혹은 유사한 장치가 있다. 비상상황 발생 시 패닉 버튼을 누르면 매장의 모든 출입구가 삽시간에 봉쇄된다. 

    하지만 세계 최고 보물들이 모여 있는 그뤼네 게뵐베 박물관의 보안은 사설 주얼리 회사만도 못했다. 만약 그뤼네 게뵐베 박물관에 이런 보안장치가 있었다면…. 경호원들이 손도끼를 든 괴한에게 맞서지는 못했더라도 비상경보와 동시에 패닉 버튼을 눌러 출입구를 봉쇄했다면 범인들이 그토록 유유히 사라질 수 있었을까. 

    더욱이 소장품들에 대한 보험도 가입하지 않았다고 한다. 보험을 들지 않은 이유로 지방 정부의 예산 부족을 들었다. 사건 발생 일주일이 지난 지금도 경찰은 범행과 관련해 유용한 단서를 찾지 못하고 있다. 다만 2017년 베를린 보데 박물관에서도 금화 100kg이 도난당한 사건이 발생했는데, 경찰은 이번 사건과 유사점이나 연관성을 찾고자 베를린 경찰과 공조하고 있다고 한다. 보데 박물관 도난사건과 관련해선 지금 4명의 용의자가 붙잡혀 재판을 받고 있지만 금화의 행방은 아직 묘연한 상태다. 

    도난 자체보다 더 큰 문제는 역사적인 보물의 훼손과 다시는 볼 수 없다는 사실이다. 그뤼네 게뵐베 박물관의 보물들은 워낙 세계적으로 널리 알려진 것들이라 합법적인 유통 경로로는 처분이 불가능하다는 게 전문가들의 의견이다. 따라서 범인들이 이를 팔아치우려면 귀중한 보물들의 보석류, 즉 다이아몬드나 루비 등을 떼어내 분해하고 녹이거나 파괴하는 선택을 할 가능성이 아주 높다. 인류 문화유산이기도 한 보물이 하나하나 뜯겨져 나가는 장면은 상상만 해도 끔찍하다. 세계 최고 보물을 모아놓은 곳의 세계 최고로 허술한 보안이 빚어낸 대참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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