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진 제공 · ㈜엣나인필름]
1994년, 88 서울올림픽을 치르고 선진국 대열에 들어설 것이라는 희망과 인정 욕구로 한국 사회는 한창 들떠 있었다. 전 국민이 서울 강남을 열망하며 대단지 아파트로 이사 가고 싶어 했다. 북한 김일성이 사망했고, 전쟁이 날까 불안했다. 사상 최악의 더위를 시원한 레게음악으로 이겨보려고도 했다. 그해를 살아간 중2, 14세 은희는 지독한 성장통을 겪는다.
떡집을 운영하는 부모 슬하에서 강남의 제법 괜찮은 아파트에 살고 있는 은희네는 보편적인 중산층 그 자체다. 특출한 것도, 내세울 것도 없다. 많이 배우지는 못했지만 꽤 많은 현금을 만지는 부모는 세 자녀의 교육에 최선을 다한다. 하지만 고교생 언니(박수연 분)는 대치동 학원을 빼먹으며 연애를 하고 있고, 중학교 3학년 오빠(손상연 분)는 벌써부터 서울대를 목표로 공부하느라 신경이 날카롭다. 춤을 연마하는 아빠(정인기 분)는 아마도 누군가를 만나는 모양이고, 엄마(이승연 분)는 멍하니 허공을 바라보곤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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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는 평범한 소녀의 성장담 위로 1994년의 거대한 사건을 겹쳐놓는다. 성수대교가 붕괴했다. 우리나라도 선진국이라는 들뜬 분위기를 단숨에 잠재운 이 안타깝고도 원통했던 기억은 은희의 개인사에 촘촘히 박혀 거대한 상흔으로 남는다.
영화에서 개인의 특수한 경험은 보편적인 모두의 기억으로 남는다. 영화를 보면서 나의 1994년이 하나씩 떠올랐다. 우리 모두가 이상하게 들뜨다 추락하고 말았던 그때 말이다. 영화가 촘촘하게 엮어내는 사회상 속에서 은희라는 낯선 아이를 따라 나의 젊은 모습으로 들어가 서성이고 있었다. 은희와 함께 애도하며 울었다.
대단한 영화고, 놀라운 예술가적 재능이다. 특정 시기의 집단 기억과 상흔이 서사적 완성도 안에 단단히 자리 잡고 있다. 학원 선생님과 중학생이 만들어내는 여자 대 여자의 멘토링 관계는 영화사상 가장 이상적이고도 아름다운 여자들 간 연대일 것이다. 김보라 감독의 차기작이 벌써 궁금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