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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이트진로는 1996년부터 2011년까지 ‘천연암반수 맥주’로 불리던 ‘하이트’로 국내 맥주 1위를 수성한 바 있다(당시 사명은 조선맥주였다 1998년 하이트맥주로 변경). 하지만 오비맥주의 저돌적인 마케팅으로 2012년 카스에 1위 자리를 빼앗겼다. 롯데주류가 2014년 ‘클라우드’를 출시, ‘물 타지 않은 맥주’라며 적극적인 마케팅을 펼쳤지만 카스의 아성을 무너뜨리진 못했다. 오비맥주는 카스를 비롯해 버드와이저, 스텔라 아르투아, 코로나 등을 수입·판매하는데, 이들 맥주 군단의 국내 시장점유율을 합하면 60%대에 달해, 2위 하이트진로의 시장점유율 30%를 2배 이상으로 따돌리고 있는 1위 맥주회사다.
그런데 테라가 등장하면서 국내 맥주시장 판도가 흔들리는 분위기다. 테라는 호주에서 청정지역으로 유명한 ‘골든트라이앵글’ 지역의 황금보리만 사용했다고 한다. 맥주병도 갈색인 기존 맥주들과는 다른 녹색을 택했다.
맥아 출처 밝히고, 녹색 병 택한 남다른 맥주
3월 출시돼 3개월 만에 1억 병 판매를 돌파한 하이트진로의 ‘테라’. [사진 제공 · 하이트진로]
테라가 기존 맥주와 차별화의 선을 긋는 대목은 우선 맥아다. 전 세계에서 미세먼지 농도가 가장 낮다는 골든트라이앵글 지역의 맥아만 사용하고, 발효 공정에서 나오는 자연 탄산으로 맛을 낸다고 한다. 사실 국내 대기업 맥주 가운데 맥아 생산지를 정확히 밝힌 것은 테라가 처음이다. 여기에는 리스크가 따른다. 흉년이나 재해로 원료가 원활하게 공급되지 않을 수도 있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원료 산지를 밝혔다는 것은 그 나름의 자신감으로 해석할 수 있다. ‘자연 탄산’도 마찬가지다. 기존 맥주는 출하 직전 한 번 더 ‘인공 탄산’을 주입한다. 그러나 테라는 발효 시 나오는 탄산만으로 맛을 낸다고 한다.
테라는 라틴어로 흙, 대지, 지구 등을 뜻한다. 즉 제품명을 통해 ‘미세먼지로 뒤덮인 한국에서 즐기는 청정 라거’라는 이미지를 주고자 한다. 녹색 병을 택한 것도 같은 맥락이다. 기존 맥주병이 대부분 갈색인 이유는 빛 투과를 막아 맥주 맛을 최대한 보존하려는 데 있다. 하지만 갈색 병은 ‘신선한 맛’이라는 느낌을 전달하기엔 부족한 색상이다. 또 갈색 병맥주는 ‘유흥’의 이미지가 강하다. 이에 테라는 청정 맥주, 신선한 맥주라는 차별적 이미지를 강화하고자 녹색 병을 선택했다.
카스, 알고 보면 테라와 한 家門
제2차 세계대전 이후 미국에서 ‘녹색 병 맥주’ 돌풍을 일으킨 하이네켄과 테라 출시 이전 국내 맥주시장을 삼분했던 하이트진로의 ‘하이트’, 롯데주류의 ‘클라우드’, 오비맥주의 ‘카스’(왼쪽부터).
테라는 처음부터 시장 타깃을 정확히 겨냥했다. 요식업시장, 그중에서도 ‘소맥’시장이다. 국내 맥주시장은 가정용과 업소용으로 나뉘는데, 매출 비중이 4 대 6 정도로 업소용시장이 더 크다. 그리고 이 업소용시장에서 가장 많이 소비되는 주종이 소맥이다. 하이트진로는 테라 출시와 동시에 테라에 ‘참이슬’을 섞어 마시는 ‘테슬라’라는 소맥 이름을 대대적으로 홍보하고 나섰다. 사람들은 자연스럽게 ‘테슬라’의 맛을, 또 카스로 만든 소맥과 테라로 만든 소맥 중 무엇이 더 맛있는지 궁금해하기 시작했다.
테라는 기존 하이트와 달리 탄산이 강하고 뒷맛에서 깨끗함이 느껴진다. 이것이 테라의 승부처다. 즉 기존 국산 맥주 가운데 가장 카스를 닮은 맛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니까 테라는 애초에 ‘카스를 극복하자’는 목표 아래 개발된 제품으로 보인다. 그래서 나온 신조어 ‘카스텔라’(카스와 테라를 합한 말)가 술자리에서 거론된다. 카스를 이겨보자고 나온 테라가 카스를 홍보하고 있는 셈이다.
진로쿠어스가 ‘카스’를 출시한 것을 계기로 판도가 달라진 국내 맥주시장을 전하는 1994년 5월 21일자 동아일보 기사와 오비맥주의 진로쿠어스 인수로 다시 오비맥주와 하이트맥주의 양자 대결로 바뀌었음을 전하는 1999년 8월 18일자 동아일보 기사. 테라와 참이슬을 섞어 마시는 소맥 ‘테슬라’가 최근 술자리의 화제다(왼쪽부터).
두 번째 삼파전은 진로쿠어스의 등장으로 벌어졌다. 1980년대 국내 맥주시장은 오비맥주와 ‘크라운맥주’를 판매하는 조선맥주가 8 대 2 구도를 이뤘다. 수도권에서는 9 대 1이라고 할 정도로 오비맥주가 압도적으로 시장을 장악했다. 그런데 1991년 오비맥주 계열사인 두산전자에 의해 낙동강 페놀 오염 사건이 벌어지자 오비맥주의 신뢰까지 나락으로 떨어졌다. 이런 여건에서 1993년 조선맥주가 지하 150m 천연 암반수로 만들었다는 하이트를 출시했고, 3년 후 1위 맥주에 등극할 정도로 크게 성공한다.
이러한 혼돈의 시기에 1994년 진로가 미국 쿠어스사와 합작해 진로쿠어스를 설립한 뒤 카스를 출시한다. ‘비열처리 맥주’를 슬로건으로 신선함을 강조한 카스는 개별 브랜드로 시장점유율 15% 전후를 달성해 양대 거대 맥주회사를 상대로 선전한다. 하지만 외환위기 때 유동성 위기에 직면한 진로그룹이 1999년 진로쿠어스를 오비맥주에 매각함으로써 두 번째 맥주 삼파전은 5년 만에 막을 내리게 된다. 국내 맥주사(史)로 보자면 테라가 그토록 이기고 싶어 하는 카스가 알고 보면 같은 가문(하이트진로)이라는 아이러니가 있는 셈이다.
혹자는 롯데주류의 클라우드에 의해 현재 세 번째 맥주 삼파전이 벌어지고 있다고 보지만, 롯데주류의 시장점유율은 5% 미만으로 다소 아쉬운 성적이다.
하이트 같은 돌풍 기대하기 어렵더라도
테라의 상승세가 앞으로도 이어진다면 카스의 영광을 상당 부분 빼앗아올 수 있을 것 같다. 하지만 한계도 분명하다. 맛 자체가 카스와 유사하고, 카스처럼 소맥을 주요 매출처로 삼은 만큼 1993년 출시된 하이트처럼 시장을 ‘뒤엎는’ 돌풍이 되긴 어려워 보인다. 다만 신제품 출시에 인색했던 국내 맥주산업에 모처럼 신제품 테라가 좋은 영향을 미친 것은 사실이다. 특히 필라이트, 필굿 등 저렴한 발포주만 새로 내놓아 저가로 치닫던 시장에 주류(主流) 맥주에 충실한 새 제품이 소비자들로부터 사랑받는다는 것은 좋은 시그널이라고 볼 수 있다.하지만 소맥 테슬라를 강조하는 점은 아쉽다. 술문화가 소맥 회식에서 벗어나 집에서 편안하게 즐기는 ‘홈술’ ‘혼술’ 시장으로 바뀌어가고 있기 때문이다. 어쨌든 테라가 국내 맥주업계가 꾸준히 신제품을 내놓는 계기가 됐으면 좋겠다. 이왕이면 차별화된 맛과 철학을 가진 한국 맥주가 새롭게 등장하길 기대해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