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서 전 대표처럼 숫자 하나하나까지 대통령 지시를 받아서 타협하면 못 풉니다. 대통령이 한번 지침을 주시면 대표가 알아서 잘 풀어야 합니다. 이번에 대통령께서 어느 액수까지 양보할 수 있는지 지침을 내려주셨고, 나는 수시로 대통령과 전화 등으로 의논해서 타결했습니다. 대통령은 대표가 중심이 되어 풀어나가라고 힘을 주고 계십니다. 날 보고 기회주의자 어쩌고 하는데… 당이 변할 것입니다.”
김대표 발언의 행간을 읽어보면 그가 지향하는 ‘당의 쇄신’에 대한 밑그림을 어느 정도 엿볼 수 있다. 우선 ‘실세 대표론’이다. 김대통령과의 관계는 그가 생각하는 실세 대표 여부의 첫번째 시금석이다. 김대표는 “숫자 하나하나까지 대통령의 지시를 받지는 않겠다”고 말한다. “대통령이 지침을 주면 대표가 알아서 한다”는 것이다. 즉 김대통령이 어느 사안에 대해 ‘가이드 라인’을 제시하면 그 범위 내에서 일을 푸는 것은 대표의 권한이라는 것.
김대표는 “수시로 대통령과 전화 등으로 의논해 타결했다”고 했다. 그만큼 김대통령과 ‘직접적인 통로’가 형성돼 있고, 언제든지 김대통령의 의중을 전달받을 수 있다는 자신감을 표현한 것이다. 과거 서 전 대표는 김대통령과 수시로 통화할 수 있는 입장이 아니었다. 청와대 한광옥 비서실장이나 남궁진 정무수석, 또 김대통령의 교감 하에 움직여온 권노갑 전 최고위원을 통해 간접적으로 김대통령의 숨은 의중을 전달받는 입장이었다. 하지만 김대표는 청와대 비서실장 시절부터 김대통령과 맺어온 끈끈한 인연을 활용해 언제든지 전화기를 들 수 있는 입장이다. 자연 김대표에게 힘이 실릴 가능성이 높아졌다.

이같은 이니셔티브는 당정간의 관계에서도 그대로 드러난다. 당이 힘과 논리를 가지고 개혁 프로그램을 밀어붙일 수 있을 정도의 위상을 가지고 있어야 한다. 또 당-정부-청와대와의 관계에 있어서도 어느 정도 독립성을 유지하며 당-청와대를 견인해 낼 수 있는 추동력을 갖춰야 한다.
하지만 98년 정권교체 이후 여권 내 모든 권력은 청와대, 그것도 김대통령 한 사람에 집중돼왔다는 것이 집권당의 비극이었다. 김대통령이 청와대로 자리를 옮긴 뒤 당은 ‘공동화 현상’이 심화했고 ‘되는 일도 안 되는 일도 없는’ 무기력한 정당이 되고 말았다. 몇몇 핵심 측근이나 실세들이 비선 조직을 통해 김대통령의 명(命)을 받들고, 당 대표 등 공조직은 겉도는 형국이 계속됐다.
집권당의 비극은 또 있다. 김대통령의 하명(下命)을 수행하는데 익숙한 측근들은 전략과 전술을 창출해낼 수 있는 마인드를 갖추지 못했다. 그나마 전략적 마인드를 갖춘 몇 안 되는 인사들은 힘이 없었다. ‘실세들은 전략이 없고, 전략이 있는 사람은 힘이 없는’ 구조가 계속되면서 당이 사분오열되는 궤멸상태에 빠져들었다.
따라서 김대표 체제의 당 쇄신 방향은 자연스럽게 청와대로부터 독립적인 위상을 지닌 힘있는 여당의 면모를 갖추는 것이다. 과연 김대표 체제는 그같은 과제를 충실히 수행해낼 수 있을까. 우선 김대표가 주창하는 ‘실세 대표론’은 어느 정도 타당성을 갖추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그가 말하는 ‘당 우위론’ 역시 마찬가지다. 김대표는 취임 기자회견에서 “초기 단계에서부터 당정간에 조율이 있어야 한다. 최종 단계에서 당이 결정을 뒤집으면 관료들이 반발한다. 앞에서는 면종복배(面從腹背)하지만 뒤에서는 욕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실력을 갖춰야 한다. 그래야 당이 우위에 설 수 있다”고 강조했다.
김대표 취임 후 당내 분위기도 어느 정도 달라지고 있다. 최고위원회의나 당 4역회의 등에서도 긴장감이 돌고 있고, 박상규 사무총장이나 남궁석 정책위의장이 ‘경쟁의 원리’‘경영 마인드’를 부르짖으면서 당료들도 바짝 긴장하는 분위기다. 대통령이 김대표에게 보내는 신뢰나 김대표의 대통령에 대한 ‘독점욕’ 등을 감안할 때도 분명 이전보다는 ‘힘있는 대표’가 될 가능성이 높다. 김대통령과의 관계도 전례없이 끈끈하다. 대통령 앞에서 속 있는 얘기를 못하는 ‘얼굴 마담형’이 아니라 대통령의 속마음까지 읽을 수 있는 비서실장 출신의 대표이기 때문에 당에 대한 개혁 바람에 힘을 받을 수 있다.
하지만 의문은 남는다. ‘힘있는 대표’가 된다고 해서 이것이 곧 ‘여당의 위상강화’의 충분조건이라고 볼 수는 없기 때문이다. 오히려 김대표의 출현으로 대통령에 대한 당의 종속화가 더욱 가속화할 것이라는 우려도 적지 않다. 김대표의 ‘힘’이 다름아닌 ‘대통령과의 관계’에서 발원하고 있다는 사실에 동의하는 인사들도 많다. 김대표 체제가 김대통령의 친정체제를 강화하는 듯한 인상을 주는 것도 이 때문이다. 청와대 관계자들도 이런 점을 굳이 부인하지 않는다. 김대표는 당의 자율성을 주장할 수 있겠지만 김대표의 말대로 이는 ‘김대통령의 지침’에서다.
문제는 김대통령이 민심을 거스를 경우 얼마나 직언할 수 있고, 또 이를 바로잡을 수 있는지다. 집권 여당에 대한 국민의 가장 큰 불만은 “대통령에게 할 말을 못한다”는 것이었다. 민주당 내부에서는 “억울하다”고 얘기할 수 있지만 적어도 국민의 시각에서는 그렇지 못했다.
또 한 가지 우려는 김대표에게 힘이 쏠리는 것과 비례해 동교동계나 당 중진들의 불만이 커질 수 있고, 이것이 또 다른 내분의 씨앗이 될 수 있다는 사실이다. 벌써부터 청와대 관계자들 중에는 김대표의 독주를 우려하는 목소리가 나오고 있다. 차기 대권주자의 한 사람인 김대표가 힘있는 여당을 외치며 자신의 독점적 지위를 더욱 강화하려 한다면 다른 주자들, 예를 들어 노무현 해양수산부장관이나 개혁세력의 대표주자인 김근태 최고위원 등으로부터도 반발을 초래할 수 있다.
한화갑 최고위원 등 동교동계 신주류를 제외한 나머지 동교동계 인사들이나 중진들은 김대표의 일거수 일투족을 예의 주시하며 견제구를 던질 채비를 하고 있다. 만일 김대표가 조금이라도 사심(私心)을 드러낸다면 ‘당 쇄신노력’은 ‘대표직을 이용한 사전 선거운동’으로 격하할 것이다.
이 때문에 김대표가 지금은 당내 독점적 지위를 목표로 할 게 아니라 반대 세력과의 철저한 균점과 공생을 모색해야 한다는 제안도 나오고 있다.
‘인치’(人治)가 아닌 ‘시스템에 의한 국정운영’ 여부도 아직은 지켜봐야 할 것 같다. 시스템이 가동하려면 당-정부-청와대 간의 유기적 협조관계가 형성돼야 하지만 한광옥 비서실장이나 남궁진 정무수석 등 동교동계가 버티고 있는 청와대와 ‘점령군’인 김대표 사이의 정서적 간극을 어떻게 극복해야 할지도 과제가 되고 있다. 특히 ‘사령관은 있는데 사령부가 없다’는 여권 인사들의 자조를 털어내고, ‘김대중 사령관’을 정점으로 당과 청와대 정부 국가정보원 사이의 협력과 건강한 견제관계를 구축할 수 있을지 주목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