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간동아 8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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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후 안전판 이젠 손대지 마!

7월부터 퇴직금 중간정산 금지

  • 김동엽 미래에셋투자교육연구소 은퇴교육센터장 dy.kim@miraeasset.com

    입력2012-05-29 10:38: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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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노후 안전판 이젠 손대지 마!
    “중간정산 받은 퇴직금 다 어디로 갔어?”

    경기 수원시의 한 중소기업에 다니는 김정철(45) 씨는 3년 전 퇴직금을 중간정산했다. 나중에라도 회사에서 퇴직연금제도를 도입하면 중간정산이 불가능하다는 얘기를 듣고, 딱히 목돈이 필요한 건 아니었지만 앞으로 무슨 일이 일어날지 모르니 일단 목돈을 챙겨두자는 생각에서였다. 그런데 생활비와 자녀 학비로 그 돈을 다 써버린 지금 김씨는 “노후주머니가 텅 비었다고 생각하니 막막한 심정”이라며 “중간정산하지 말고 그냥 두는 게 나을 뻔했다”고 후회했다.

    근로자 대부분 퇴직연금 전환 전 중간정산

    퇴직연금제도를 도입한 지 7년이 돼간다. 제도 도입 목적 가운데 하나는 퇴직금을 근로자들의 노후생활 재원으로 사용하자는 것이었다. 이를 위해 퇴직연금제도를 도입한 기업에서는 중간정산을 엄격히 제한했다. 그러나 모든 일이 처음 의도대로 진행되지는 않는 법. 중간정산을 퇴직금의 장점으로 생각하는 근로자들이 퇴직연금제도 도입을 반길 리 없었다. 퇴직금제도를 그대로 두면 중간정산을 할 수 있지만, 퇴직연금제도로 전환하는 순간 법에서 정하는 사유 외에는 중간정산이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근로자의 노후생활 재원 마련이라는 좋은 취지로 시작한 퇴직금 중간정산 제한이 도리어 퇴직연금 도입에 걸림돌로 작용하는 모양새다. 퇴직금제도를 시행하는 128만 개 사업장 가운데 9.4%인 14만 곳만이 퇴직연금제도를 도입한 현실에서 이 점이 잘 드러난다. 퇴직연금제도를 도입한 사업장에서마저 근로자 대부분이 퇴직연금으로 전환하기 전 퇴직금을 중간정산했다.



    미래에셋퇴직연금연구소가 2007년 퇴직연금제도 도입 사업장을 대상으로 조사한 바에 따르면, 근로자 가운데 44.3%가 퇴직연금제도를 도입하기 전 퇴직금을 중간정산한 것으로 나타났다. 근로자의 노후생활 재원 마련을 위해 도입한 퇴직연금제도 때문에 퇴직금을 헐어 쓰는 사람이 많아졌다니 아이러니가 아닐 수 없다.

    노후 안전판 이젠 손대지 마!

    퇴직연금 상품 설명회.

    따라서 퇴직연금을 본래 취지대로 노후생활 재원으로 활용하려면 중간정산을 둘러싼 퇴직금과 퇴직연금의 규제 격차부터 해소해야 한다. 이런 내용이 이번에 개정한 ‘근로자퇴직급여보장법’ 시행령과 시행규칙에 담겼다. 7월 26일부터 이번 개정안을 적용하면 퇴직금 중간정산이 원칙적으로 금지된다. 퇴직연금제도를 도입한 기업이나 그렇지 않은 기업 모두 퇴직금 중간정산이 금지된다는 얘기다.

    원칙적으로는 퇴직금 중간정산을 금지하지만, 급하게 자금이 필요할 경우엔 엄격한 요건 으로 중간정산을 할 수 있다. 무주택자가 본인 명의로 주택을 구입한다든지, 전세자금이 필요한 경우 중간정산을 허용한다. 단, 전세자금 목적으로는 한 직장에서 한 번만 중간정산이 가능하다. 이 밖에도 근로자 또는 부양가족이 질병이나 부상으로 6개월 이상 요양이 필요한 경우, 최근 5년 안에 파산선고를 한 경우, 개인회생절차 개시 결정을 받은 경우에도 중간정산을 할 수 있다.

    임금피크제가 적용되는 경우에도 중간정산이 가능하다. 현행 법률상 퇴직금은 퇴직 직전 급여와 근무연수를 기준으로 결정한다. 임금피크제를 적용하면 매년 급여가 줄어들기 때문에 퇴직금도 적어질 수밖에 없다. 따라서 근로자 처지에선 불이익을 막으려고 임금이 피크에 이르렀을 때 중간정산하는 것이 유리하다.

    근로자는 먹던 사탕을 빼앗긴 아이 같은 기분이 들 수 있다. 답답한 마음에 “왜 내 돈 내 마음대로 못 찾아 쓰나”라고 볼멘소리를 하는 이들도 많다. 하지만 미래에 더 큰 이익을 누리려면 눈앞의 이익 실현을 뒤로 미뤄야 할 필요도 있다. 대표적인 예가 마시멜로 실험이다.

    노후 안전판 이젠 손대지 마!
    마시멜로를 덮은 종이

    스탠퍼드대에서 마시멜로라는 아주 간단한 소품을 사용해 네 살배기 아이들을 대상으로 욕구지연에 대한 연구를 진행한 바 있다. 실험자는 “15분 동안 마시멜로를 먹지 않고 기다리면 두 개의 마시멜로를 주겠다”고 말한 뒤 아이들 앞에 마시멜로를 두고 방에서 나왔다. 당신이라면 어떻게 했을까. 아이 대부분은 몇 분이 지나지 않아 마시멜로를 집어들었다. 몇 년 뒤 실험에 참가한 아이들을 추적 조사해보니, 냉큼 마시멜로를 집어든 아이일수록 대학입학시험(SAT) 성적이 낮았고, 정학이나 퇴학을 당한 확률도 높았다.

    퇴직금 중간정산 금지처럼 자기 돈을 일정 기간 찾아 쓰지 못하게 한 일이 국민연금에도 있었다. 국민연금 가입자가 노령연금을 수령하려면 10년 이상 연금 보험료를 납부해야 한다. 만약 이 기간을 채우지 못하면 어떻게 될까. 1999년 이전만 해도 연금을 받을 수 있는 요건을 채우지 못한 상태에서 가입자가 실직하면, 그때까지 불입한 연금 보험료와 이자를 합해 일시금으로 받을 수 있었다. 하지만 1999년 관련 법률을 개정하면서 사정이 달라졌다. 연금 수령 요건을 갖추지 못한 근로자가 원금과 이자를 돌려받으려면 60세까지 기다려야 하는 것이다.

    처음 이 법을 시행했을 때만 해도 “왜 내 돈을 내 마음대로 찾아 쓰지 못하느냐”는 불만이 많았다. 요즘은 좀 다르다. 국민연금공단에 따르면, 은퇴를 앞둔 베이비붐세대가 늘어나면서 예전에 받은 반환일시금을 돌려줄 테니 연금으로 받게 해달라고 요청하는 사례가 증가하고 있다. 국민연금을 부활해주지 않는다고 불만을 제기하는 사람도 많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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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미래에 더 큰 이익을 누리려면 눈앞의 욕구를 참아야 할 때가 종종 있다. 하지만 마시멜로를 눈앞에 둔 아이들이 그랬던 것처럼, 당장의 이익을 외면하기가 말처럼 쉽지 않다. 그래서 장치가 필요한 것이다. 마시멜로 실험을 하면서 마시멜로 위에 종이를 살짝 덮어뒀더니 마시멜로를 집어드는 아이 수가 크게 줄었다고 한다. 근로자들의 풍족한 노후를 위해 이번 퇴직금 중간정산 금지 결정이 마시멜로를 덮은 종이 기능을 하리라 본다.

    * 미래에셋 투자교육연구소 은퇴교육센터장으로 일반인과 근로자를 대상으로 한 은퇴교육과 퇴직연금 투자교육을 실시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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