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01 학생 “EBS 교재·인강 시간도 없는데 뭐하려고 교과서 봐요?”
학생들의 낙서로 도덕이 ‘도적’으로, 국사가 ‘순대국밥 사줘요’로 바뀌었다.
“교과서만 공부해서 좋은 대학에 갔다? 정말 말도 안 되는 소리예요. 교과서로 수업하는 과목이 손에 꼽을 정도인데 뻥이에요, 뻥!”(최영우·18·가명)
서울 서대문구의 A고등학교 3학년인 김군과 최군에게 교과서에 대해 묻자 돌아온 말이다. 영어 수업시간, 두 학생의 책상에는 영어 교과서 대신 EBS 교재가 펼쳐져 있었다. 교사 역시 손에 EBS 교재를 들었다. 최군은 “수학, 국어 등 다른 수업시간에도 교과서를 쓰지 않는다”고 귀띔했다.
#2. 경기의 B외국어고등학교 3학년 교실에서도 비슷한 풍경이 펼쳐졌다. 중국어 수업시간, 학생들은 중국어 교과서 대신 한 어학출판사에서 출간한 중국어 문제집을 공부했다. 황모(18) 군은 “거의 모든 수업이 교과서 대신 선생님이 정한 문제집이나 EBS 교재로 이뤄진다”며 “수업시간은 문제집을 풀이하는 시간이라고 봐도 무방하다”고 말했다.
한 과목당 EBS 교재 4~5권이 점령
흔히 교과서를 모든 과목을 공부하는 데 기초가 되는 책으로 여긴다. 하지만 학생들은 “교과서가 교실에서 외면받은 지 오래”라고 입을 모은다. 교과서 자리를 대신한 것은 EBS 교재다. 이는 지난해 교육과학기술부(이하 교과부)가 대학수학능력시험(이하 수능) 문제 가운데 70%를 EBS 교재에서 출제하겠다고 발표하면서 나타난 현상이다.
김군은 “학생과 선생님 모두 EBS 교재를 의무적으로 봐야 한다고 생각한다. 과목당 관련 EBS 교재가 4~5권이기 때문에 이를 소화할 시간도 부족하다”고 전했다. 교과서까지 볼 시간 여유가 없다는 것. 경북 구미시 C여자고등학교 2학년 김모(17) 양은 “1, 2학년 때는 수업시간에 교과서를 보는 경우도 있다. 하지만 수능 관련 과목은 수업시간에 꼭 EBS 교재나 문제집을 병행한다”고 털어놓았다.
학생들은 교과서 자체에도 별 매력을 느끼지 못했다. 교과서는 서술형으로 교과내용을 전달하는 데 이를 상당히 비효율적이라고 평가했다. 황군은 “교과서는 기본 개념을 쌓으려 보는 책으로, 차라리 스타강사의 인터넷 강의를 듣거나 출판사에서 만든 참고서 또는 개념서를 보는 게 낫다”고 말했다. 교과서는 이들과 비교하면 요약도 잘돼 있지 않고 구성도 산만하다는 것. 최군의 생각 역시 비슷했다.
“인터넷 강의나 학원 교재, 출판사 문제집은 학습 내용을 체계적으로 잘 정리할 수 있도록 도와준다. 표나 공식도 쉽고 재미있다. 수능에서 좋은 점수를 올리려면 많은 문제를 풀어봐야 하는데, 교과서에는 문제가 거의 없거나 있어도 수능에 나오는 문제 유형과 동떨어져 있다. 굳이 교과서를 보면서 시간을 낭비하고 싶지 않다.”
몇몇 과목을 제외하고는 일반 출판사에서 만든 검인정교과서를 사용한다. 학생들은 같은 과목이라도 학교마다 교과서가 다르기 때문에 수능 문제가 교과서에서 출제될 확률이 낮다고 여긴다. 한 교과서에서 문제를 내면 형평성 문제가 생기기 때문이라는 것.
A고등학교 3학년 이모(18) 군은 “교과서를 공부하더라도 여러 출판사의 교과서 예문을 다 모아놓은 참고서나 문제집을 본다”고 설명했다. 실제 교사 중에는 참고서처럼 아예 교재를 따로 제작해 학생에게 나눠주는 경우도 있었다. 이군은 “선생님도 교과서 한 권으로는 부족하다고 느끼니 그러는 것 아니겠느냐”고 반문했다.
학생들이 교과서를 찾는 때는 중간·기말고사, 즉 내신 공부를 할 때뿐이다. 교사가 교과서에서 문제를 출제하는 경우가 있기 때문. 하지만 학생들이 교과서를 펴놓고 정독하는 풍경을 상상한다면 낭패다. 교사가 교과서의 특정 페이지를 정해 학생들에게 미리 알려주고 해당 부분에서만 시험을 출제하는 경우가 많다. 김군은 “선생님이 학생에게 부담을 주지 않으려고 교과서에서도 수능에 도움이 될 만한 내용만 출제한다”며 “교과서에서만 문제를 내는 것이 아니라, 수업시간에 봤던 EBS 교재와 문제집에서도 출제한다”고 전했다.
외고에 재학 중인 황군의 설명 역시 비슷했다. “중간·기말고사 문제도 아예 수능 문제처럼 출제한다. 교과서를 공부하지 않아도 되게끔 말이다. 학생들도 내신 공부를 하느라 수능 공부의 흐름이 끊기는 것을 원치 않는다.”
한편 ‘국사’는 예외였다. 거의 모든 학교에서 다른 과목과 달리 국사 교과서를 수업시간에 사용했다. 국정인 국사 교과서는 전국 모든 학생이 공통으로 공부하기 때문에 수능 문제가 교과서에서 출제될 확률이 높다는 게 그 이유. 또 교과서에 실린 사료나 지도 등 각종 이미지도 수능에 단골로 등장한다.
하지만 학생들은 ‘교과서도’ 보는 것이지, ‘교과서만’ 보는 것은 아니라고 강조했다. 최군은 “수능의 사탐영역에 해당하는 국사, 한국지리의 경우 교과서를 보기도 하지만, 교과서 지문이나 자료가 수능에 나올 수 있으니 본다는 게 더 맞다. 유명 강사의 학원 강의나 인터넷 강의, 문제집으로 개념을 익히고 문제풀이를 연습하지 않는 친구는 거의 없을 것”이라고 지적했다.
결국 교과서는 수능에 큰 도움이 되지 않을 뿐 아니라, 그 외에도 공부해야 할 책이나 강의가 너무 많다는 게 학생들의 설명이다. EBS 교재, 참고서, 인터넷 강의, 출판사 문제집, 수능 기출문제집이 먼저라는 것. 이군은 “독서, 봉사활동, 리더십 캠프, 경시대회, 논술 등 수능 외에도 준비할 게 많다”며 버거움을 토로했다. 고2 자녀를 둔 학부모 허모(45) 씨는 “교재비, 사교육비가 부담스러운 것은 사실”이라며 이렇게 덧붙였다
국사 정도만 교과서 중요
“EBS 교재 공부는 의무적으로 하는 거다. 결국 좋은 대학에 갈 수 있는지는 수능 문제 중 EBS 교재를 제외한 나머지 30%에서 판가름이 나기 때문에 사교육에 매달릴 수밖에 없다. 비용도 부담스럽지만 무엇보다 이 모든 것을 소화해야 하는 아이들이 안쓰럽다.”
그렇다면 학생들이 교과서 중심으로 공부할 수 있는 방법은 없을까. 황군은 “공부는 결국 좋은 대학에 가려고 하는 거다. 교과서는 너무 이론적이고 수능과 동떨어져 있다. 수능과 비슷한 문제가 많아지고 난이도도 다양해졌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하지만 학생 대부분은 교과서를 살리는 방안 자체에 상당히 냉소적이었다.
“교과서를 개정하든, 학교에서 어느 출판사 교과서를 선택하든 우리는 관심 없다. 어차피 교과서를 잘 보지 않기 때문이다.”(최군)
“괜히 교과서를 중시하겠다고 해서 EBS 교재처럼 ‘수능에 교과서 내용을 특정 비율로 반영하겠다’는 식의 말이나 하지 않으면 좋겠다. 학생 부담만 더 늘어나는 셈이다. 문제는 교과서가 아니라 입시제도인데, 어른들은 잘 모르는 것 같다.”(김군)
박혜림 기자 yiyi@donga.com
>>> 02 교사 “검인정교과서도 그 나물에 그 밥 구태여 가르칠 이유 없어요”
교사들은 이전의 국정교과서와 검인정교과서의 큰 차이를 발견할 수 없다며 부정적인 견해를 보인다.
대부분의 과목이 검인정교과서로 바뀌면서 교사들은 분주해졌다. 교과과정이 바뀔 때나 새 학기를 앞둔 시점에는 수십 종의 교과서를 들추며 체크리스트에 점수를 매긴다. 학생들을 가르칠 교과서를 선택하는 작업의 일환이다. 매년 ‘붕어빵’ 국정교과서를 가르칠 때와는 사뭇 다른 풍경이다. 자연히 수업 준비에도 긴장감이 생겼다.
이런 변화를 바라보는 교사의 반응은 엇갈린다. 경기 남양주시 광동고에서 국어를 가르치는 송승훈 교사는 “현실에 남녀 불평등이 만연해도 법적 근거가 마련되면 예전과 다른 분위기가 생긴다. 검인정교과서는 아직 갈 길이 멀지만, 변화의 단초가 됐다는 점에서 의미 있다”고 말했다. 그의 설명이다.
“긍정적으로 바라보는 이들은 검인정교과서가 교육 정상화의 희망을 제시했다고 봅니다. 본디 교과서는 교과과정을 습득하는 도구입니다. 그런데 한자로 된 유교경전을 줄치고 외우는 과거의 강독학습법이 그대로 이어져 잘못된 수업방식이 뿌리내렸죠. 교과서 다양화는 이런 수업방식을 극복할 기회라는 점에서 환영할 만합니다.”
반면 이런 변화에 적응하기 힘들어하는 교사는 밑줄 긋던 국정교과서 시절을 그리워한다. 교사들은 올해 처음 도입한 ‘융합과학’에서 이러한 견해차를 극단적으로 보였다. 융합과학은 기존의 물리, 화학, 생물, 지구과학(일명 ‘물화생지’) 네 과목을 스토리텔링식으로 엮은 과목. ‘나무보다 숲을 봐야 한다’는 취지로 2007년 개정교육과정에서 고등학교 1학년을 대상으로 도입했다. 우주, 지구, 생명, 정보통신, 인류의 건강, 에너지와 환경 등 단원마다 ‘물화생지’가 유기적으로 녹아 있다.
빨간불 켜진 고1 교실
하지만 취지와 달리 고1 교실에는 빨간불이 켜졌다. 수준이 지나치게 높아 학생, 교사 할 것 없이 고전하는 것. 학생들은 “선생님도 못 가르치는데 우리더러 어쩌라는 거냐”며 불만을 터뜨리고, 교사는 “방향은 옳다고 보지만 시기가 적절한지 의문”이라며 고개를 갸우뚱한다. 다음은 경기 의정부시 효자고에서 생물을 가르치는 김태우 교사의 설명.
“‘융합’ ‘스토리텔링’의 바람을 타고 새로 도입한 과목입니다. 새로운 시도라는 점에서는 고무적이지만, 현장은 혼란스럽습니다. 실제 책을 보면 고등학교 과정인지 싶을 만큼 어렵습니다. 이 때문에 교과서 내용과 별개로 옛날처럼 ‘물화생지’를 따로 가르치는 학교도 다수 있는 걸로 압니다. 내년부터 융합과학을 선택하지 않겠다는 학교도 상당수고요. 이 때문에 현장을 너무 모르는 실패작이라는 평가도 나옵니다.”
교육현장에서 터져 나오는 또 다른 불만은 “국정교과서보다 나은 점이 무엇인가”라는 것이다. 융합과학은 예외지만, 다른 검인정교과서 내용은 대부분 대동소이하다. 출판사는 20여 곳에 달해도 책을 펼치면 ‘오십보백보’라는 것. 일각에서는 “전체 평균 질을 따지면 국정교과서보다 못하다”는 비판도 나온다. 학문 발전과 창의적 교육을 위해 도입한 검인정교과서가 제 구실을 못하는 이유가 뭘까. 한 교육 관계자의 설명이다.
“교과서 집필에는 보통 해당 분야 교수와 교사들이 참여해요. 한데 이들은 제 실력을 발휘하지 못하죠. 거기에는 두 가지 이유가 있어요. 하나는 가이드라인이 지나치게 구체적이라는 점이고, 다른 하나는 탈락 시 부담이 엄청 크다는 거예요. 소신 있는 저자들이 정성껏 교과서를 만들어도 심사위원 취향이 고루하면 탈락하죠. 2009년에는 국어교육계 양대 산맥인 교수들의 교과서가 모두 탈락했어요. 그러니 창의성이나 시대정신을 담기보다 안전한 길을 택하고, 교과서의 질은 떨어질 수밖에 없죠. 얼마 전 교과서 집필에 관여한 동료 교사가 ‘창피하다’고 하더군요. 원치 않는 교과서에 본인 이름이 달린다는 게 부끄럽다는 거예요.”
더 큰 문제는 교과서가 무용지물이라는 점이다. 취재 중 만난 고교 교사들에 따르면, 교실에서는 교과서보다 참고서, 정확히 말해 EBS 교재가 먼저다. 수년 전부터 수능과 EBS의 연계율이 높아짐에 따라 교과서를 가르칠 이유가 없어진 것이다. EBS 방송을 틀어주는 ‘리모컨 교사’, EBS 온라인 강의를 보여주는 ‘(마우스) 클릭 교사’라는 자조적 표현도 등장했다. 교사들은 수업 분위기를 이렇게 전했다.
‘리모컨 교사’와 ‘클릭 교사’
“고1, 2 때 진도를 다 빼고, 고3 때는 실전 문제를 푸는 게 보통의 교실 풍경입니다. 아이들은 교과서 내용에 따라 개념을 설명하면 싫어해요. 수능은 그게 아니니까 필요성을 못 느끼는 거죠. 국어와 영어는 대부분 EBS나 교사가 준비한 자료로 수업하고, 내용이 다소 어려운 수학과 과학은 그래도 교과서를 좀 더 보는 편이에요.”(서울 강남구 휘문고 지구과학 교사 신동휘)
“지금은 교과서 위에 EBS 과정이 따로 있다고들 합니다. 고교 3년간 EBS 문제지를 50권 정도 볼 겁니다. 출판사마다 교과서 내용이 비슷하다고 해도, 세부 내용은 조금씩 달라요. 이 때문에 각 교과서의 핵심 내용을 추린 참고서나 EBS 요약집으로 강의하는 인터넷 강의와 학원이 문전성시를 이루죠.”(경기의 한 고교 교사)
요약하자면 지금의 교과서는 단맛, 쓴맛, 짠맛 등 자기 색깔을 못 살리는 데다, 입시제도와도 손발이 맞지 않는다. 이런 상황에서 실험으로 과학을 체험하고, 소설을 읽으면서 비평 능력을 키우는 교수법을 원하던 일부 교사는 꿈을 포기할 수밖에 없다. 한 교사는 “지금 현실에서 교과서로만 수업하는 것은 몽상가의 꿈”이라며 말을 이었다.
“시험은 교과서에서 내는 건데, 지금 정부는 EBS에서 수능을 내잖아요. 그러면 EBS 교재를 교과서로 채택하지 왜 교과서를 따로 만듭니까. EBS 교재를 쓰면 학생은 이중 삼중으로 시간 낭비하지 않아도 되고, 학부모는 참고서값 아낄 수 있고, 교사는 한 교육과정에 집중할 수 있지 않겠어요?”
2007 개정교과과정이 학년마다 순차적으로 도입되면서 1, 2, 3학년이 각각 다른 교과서를 사용하는 것도 문제다. 올해에는 원래 쓰던 교과서가 검정에서 탈락하고, 내년에는 교과과정이 바뀌고…. 그 와중에 제재가 겹치거나 누락하는 상황이 비일비재해 교사들은 머리가 아프다.
하지만 이에 아랑곳하지 않고 교사들의 책상에는 출판사의 각종 참고서가 하늘 높이 쌓여간다. 신학기가 되면 “저희 책 좀 눈여겨봐달라”며 읍소하는 출판사 판매 담당자들로 교무실이 어지럽다. 사회와 과학 과목은 한 학기에 40여 권, 국·영·수 같은 주요 과목은 60~70권에 가까운 참고서가 들어온다.
한 교사는 이에 대해 이렇게 자조한다. “교과서와 그에 딸린 참고서를 볼 이유가 없는데, 출판사들은 홍보용으로 참고서를 돌리고…. 결국 그 비용 탓에 아이들 교과서와 참고서값만 올라가겠죠?”
이설 기자 snow@donga.com
>>> 03 출판업계 “빡빡한 가이드라인 목숨 걸고 만들어도 손해 보기 십상”
“검인정이면 뭐합니까. 가이드라인이 그렇게 빡빡한데. 당연히 몸을 사리죠.”
한 출판사 간부 A씨는 인터뷰 중 여러 차례 ‘몸 사린다’는 표현을 썼다. 검정에서 탈락할 것이 두려워 ‘알아서 선을 긋게 된다’는 뜻이었다. 새로운 개정교육과정 각론이 나오면 출판사에 비상이 걸린다. 저자를 섭외하고, 콘텐츠를 고민한 뒤 수십 번의 디자인과 내용 교정을 거치는 험난한 작업. 이 과정에서 2억~5억 원 비용이 든다. 합격하면 권당 2억 원의 개발비가 나오지만 탈락하면 ‘국물’도 없다. 그래서 출판사들은 1년 반에서 2년 동안 ‘목숨 걸고’ 교과서 제작에 매달린다.
하지만 옹골지게 준비한 교과서 내용은 ‘그 나물에 그 밥’. 교과서 편찬 가이드라인인 ‘집필 시 유의사항’이 지나치게 촘촘해 자율 권한이 거의 없어서다. 교학사 편집부 김인철 이사는 “제재는 물론 쪽수, 단원, 내용, 편집 틀까지 제시해 공력이 허사로 돌아가기 일쑤”라고 지적했다. 그의 설명이다.
“미국 교과서는 우리와 비교가 안 됩니다. 교과서마다 개성이 뚜렷하고, 자료가 풍부하며, 두께도 두툼하죠. 가이드라인이 느슨해 집필자가 마음껏 창의력을 발휘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반면 우리 교과서는 가이드라인이 까다롭고 명확해 검인정교과서의 장점을 전혀 살리지 못합니다. 현재로선 시간과 노력만 낭비하는 시스템이죠.”
사실 2007 개정교육과정을 발표할 때만 해도 교과서 시장은 ‘블루오션’으로 통했다. 교과서는 학생이면 누구나 사는 만큼 기본 판매량이 보장돼 있었고, 합격하면 권당 2억 원의 개발비가 주어져 돈을 벌 수 있는 구조였다. 하지만 이런 바람을 타고 시장에 뛰어든 출판사들은 현재 고전 중이다. 상황이 바뀐 탓이다. 다음은 미래엔(구 대한교과서) 오세찬 교과서 개발팀장의 설명.
“예전에는 교과서와 지도서에 모두 개발비를 줬지만, 2004년 즈음부터 개발비 지급 대상에서 지도서를 제외했어요. 교과서에 약 2억 원, 지도서에도 약 2억 원을 투입하니, 합격해도 손해를 보는 구조로 바뀐 거죠. 같은 시기 EBS가 힘을 얻으면서 참고서 시장도 덩달아 안 좋아졌습니다. 이에 출판사들은 같은 과목 교과서를 2, 3종씩 발간하며 탈락에 대비하죠. 개발 작업이 분산되니 자연히 교과서 수준도 떨어질 수밖에 없어요.”
제재는 물론 편집 틀까지 간섭
출판 환경도 좋지 않다. 가장 큰 원인은 검정수수료. 7차 개정교육과정 때 과목당 300만~400만 원이던 검정수수료는 현재 약 2000만 원으로 껑충 뛰었다. 교과서 종류가 폭발적으로 늘고, 저작권 문제 등으로 심사과정이 까다로워진 탓이다. 이에 출판업계는 “교과서 출판은 어찌 보면 공교육 영역인데, 수익자 부담 원칙에 따라 수수료를 천정부지로 높이는 것은 말이 안 된다”며 분통을 터뜨린다. 수익이 별로라면 교과서 출판에서 발을 빼면 되는 일 아닐까. 오 팀장은 “교과서만의 문제가 아니다”라며 설명을 이었다.
“국정교과서는 저비용, 대량 생산이 가능했어요. 하지만 검인정은 아니에요. 교과서 자체 수익구조로 보면 검인정은 ‘마이너스’죠. 그럼에도 교과서를 놓을 수 없는 이유는 참고서 때문이에요. 참고서 시장은 수능과 내신 시장으로 나뉘는데, 수능 시장은 이미 EBS가 독식하고 있죠. 하지만 내신 시장에는 희망이 있어요. 입학사정관제 등의 영향으로 내신은 해당 교과서 출판사의 참고서로 대비하기 때문입니다. 가격이 싸서 마진율이 낮은 교과서와 달리 참고서는 수익을 남기기에 좀 더 유리한 구조예요.”
15개 출판사 교과부 항의 방문
출판사들의 영업 전쟁은 해가 갈수록 치열해진다. 고등학교에 이어 중학교 전 학년까지 검인정교과서를 도입한 데다 교과서 종류가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난 탓이다. 총판을 동원한 영업 전쟁은 비용을 필요로 하고, 이에 출판사 부담은 가중된다. 악순환이다. 한 출판업계 관계자는 “일전에 출판사 대표들이 모여 총판 홍보를 그만하자고 논의한 적 있지만 지켜지지 않았다. 서로가 뒤통수를 치리라 생각한 것”이라며 말을 이었다.
“교과서 홍보는 신문광고를 금지하는 등 제약이 많습니다. 보통은 교사용 자료집을 ‘빵빵’하게 만들거나, USB 메모리 등을 선물로 주죠. 일부 업체는 해당 지역 명문고 교사를 저자로 참여시켜 영업망을 갖추고요. 이 때문에 교과서 개발에 참여한 영세 출판업체 상당수가 고전합니다. 한 대형 교육·출판업체는 곧 폐쇄조치될 거라는 말도 들리고요.”
설상가상 2009 개정교육과정 일정이 1년 앞당겨지면서 출판업계의 불만은 극에 달했다. 현재 2009 개정교육과정은 수업 시수, 운영과 관련한 밑그림만 발표한 상태. 교과부는 올해 8월 각론을 발표하고 3~4개월간 심사과정을 거쳐, 2012년 11월까지 완제품을 만들라는 주장이다.
이와 관련해 고려대 국어교육학과 이순영 교수는 “5년 단위로 개편하던 초중고 교육과정이 2003년부터 수시개정체제로 바뀌었다. 2007년 개정교육과정을 발표한 지 2년 만인 2009년 다시 개정 방침을 발표했고, 이에 출판업체는 허둥지둥 다시 교과서를 만들게 생겼다”며 분위기를 전했다. 김인철 이사는 “2013년 새로운 교과서를 도입하면 2007년 과정에 따른 중3 교과서는 1년간 사용하고 폐기된다(순차적으로 중3은 내년에 교과서가 바뀐다). 출판사로선 1년간 수익으로 개발비를 보전하지 못하고, 저자는 1년치 인세밖에 받지 못해 난감한 상황”이라고 지적했다.
이에 3월 출판사 15곳은 교과부에 면담을 요청했다. 마음에 담아둔 불만을 전하고 몇 가지 의견도 건의하려는 차원이었다. 한 출판사 관계자는 “갑작스러운 개정에 따른 압박과 수수료 등에 대한 의견을 제출했다. 교과서를 만드는 처지라 교과부는 ‘갑’, 우리는 ‘을’이지만 가만있을 수 없었다”며 한숨을 내쉬었다. 그에 따르면, 교과부는 의견을 수렴한 뒤 5월 중 답변을 줄 방침이다.
교과서의 경쟁력 상실과 과도한 검정 가이드라인으로 출판사의 부담은 가중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