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이시습지 불역열호(學而時習之 不亦說乎).’
‘논어’ 학이(學而)편 제1장에 나오는 말이자 대한민국 국민이 한문시간에 가장 먼저 배우는 말이다. 그런데 왜 이 ‘배우고 때로 익히면 또한 기쁘지 아니한가’라는 구절이 유교의 제1경전인 ‘논어’의 첫머리를 장식하고 있는 것일까. 그 이유는 바로 ‘논어’ 혹은 유가가 지향하는 핵심이 이 말에 모두 농축돼 있기 때문이다. 유가가 항상 강조하는 ‘학습’이라는 말도 바로 여기서 나온 것이다.
우리가 중요하게 여기는 대목은 ‘배우면 기쁘다’는 부분이다. 즉 배움에 방점을 찍는다. ‘공부는 재미있어야 잘한다’ ‘공부를 싫어하면 잘할 수 없다’는 말이 생긴 이유도 그 때문. 재미가 공부를 바라보는 하나의 경계지표가 됐다. 하지만 이런 시각은 이 말의 전체 문맥에서 중요한 논점 하나를 놓치고 있다. 원래 이 말의 핵심은 ‘배우고 익힌다’, 즉 익힘이 배움과 병치한다는 데 있다. 아무리 배워도 그것을 실천하거나, 내 것으로 체화하고 그것을 행위에 접목하지 못한다면 본래의 가르침에서 어긋난다는 뜻.
퇴계 이황이 말한 ‘함양(涵養)과 체찰(體察)’은 이런 맥락에서 나왔다. 퇴계는 시보 남언경에게 보낸 편지에서 이를 유교 가르침의 으뜸으로 꼽았다. 여기서 함양이란 학식을 넓혀 심성을 닦는 일이고, 체찰은 몸으로 익혀 실천하는 것을 가리킨다. 주자학은 원래 학문을 하는 네 가지 방법론으로 첫째 체인(體認), 둘째 체찰, 셋째 체험(體驗), 넷째 체행(體行)을 든다. 이는 일종의 학습 프로세서로, 나 자신을 살피고 덕성을 높이며 그것을 받아들여 실천하는 단계를 각각 가리킨다. 퇴계는 이 네 단계를 압축해 함양과 체찰로 정리한 후 다시 ‘학습(學習)’이란 두 글자로 환원했다. ‘학’은 배움을 가리키는 말이지만, ‘습’을 파자해보면 몸이 두 개의 날개를 달고 있는 형상이니 배운 내용에 두 날개를 달아 훨훨 나는 것, 즉 실천궁행(實踐躬行)이 배움의 덕목만큼이나 중요하다는 의미다.
그래서 조선의 유학자들은 배움을 실천으로 연결하기 위해 애썼다. 이 부분을 간과하고 유학을 단지 형이상학의 고담준론(高談峻論)으로 여긴다면 이는 무지에 의한 왜곡일 수 있다. 조선의 선비들이 출사(出仕)한 이유는 학문으로 배운 바를 사회에서 실천하기 위해서였고, 반대로 일생을 은거하며 공부에 몰입한 유림들도 자기 방식으로 체행에 몰입한 것이다. 퇴계는 이 둘 사이에서 고민과 갈등을 거듭했다. 학문을 익히고 배운 바를 사회에 실천하기 위해 출사했지만, 공부에 부족함을 느껴 즉각 물러났으며, 배움의 길과 가르침의 길이 하나라는 사실을 깨달은 후에는 제자들을 길렀다.
‘함양과 체찰’(신창호 엮고 지음/ 미다스북스 펴냄)에는 이런 퇴계의 고민과 생각이 담겨 있다. 지폐에서 매일 만나는 얼굴이지만, 우리가 퇴계에 대해 아는 바가 별로 없는 이유는 ‘이기론(理氣論)’ 같은 그의 학문적 성취에만 주목하기 때문이다. 또한 조선조 형이상학의 심오한 세계를 후대가 이해하기에는 너무 벅찬 탓이다. 하지만 이 책은 퇴계의 학문이 아니라 학문정신, 즉 함양과 체찰에 주목했다. 퇴계가 학문에 임한 자세, 출사 후 관리로서의 구실과 고민, 학자로서의 겸양과 자세 등이 담겨 있는 것. 물론 이 책에서 퇴계의 온전한 사상을 모두 접할 수는 없지만, 적어도 그의 정신세계만큼은 이해할 수 있다. 이 책은 조선 최고의 유학자였던 퇴계를 좀 더 이해할 수 있는 계기가 된다.
책은 전편에서 퇴계의 삶을 일별하고, 후편에서는 퇴계가 다른 사람과 주고받은 편지를 모은 ‘자성록’이라는 책을 통해 그의 육성을 들려주는 방식을 택했다. 학자로서의 사상보다 ‘학문하는 자’로서, 그리고 지식인으로서 퇴계의 자세와 정신을 이해하는 데 더할 나위없는 안내자 구실을 한다. 늘 스스로를 함양하고 체찰하려 했던 당대의 지식인 퇴계를 통해 배움에만 몰입하고 익힘에는 소홀한 우리 후학의 자세를 돌아보게 하는 셈이다. 함양과 체찰, 어쩌면 퇴계의 시대가 아닌 바로 이 시대에 가장 필요한 덕목이 아닐까. 이 책을 읽는 독자들은 내내 곱씹게 될 것이다.
‘논어’ 학이(學而)편 제1장에 나오는 말이자 대한민국 국민이 한문시간에 가장 먼저 배우는 말이다. 그런데 왜 이 ‘배우고 때로 익히면 또한 기쁘지 아니한가’라는 구절이 유교의 제1경전인 ‘논어’의 첫머리를 장식하고 있는 것일까. 그 이유는 바로 ‘논어’ 혹은 유가가 지향하는 핵심이 이 말에 모두 농축돼 있기 때문이다. 유가가 항상 강조하는 ‘학습’이라는 말도 바로 여기서 나온 것이다.
우리가 중요하게 여기는 대목은 ‘배우면 기쁘다’는 부분이다. 즉 배움에 방점을 찍는다. ‘공부는 재미있어야 잘한다’ ‘공부를 싫어하면 잘할 수 없다’는 말이 생긴 이유도 그 때문. 재미가 공부를 바라보는 하나의 경계지표가 됐다. 하지만 이런 시각은 이 말의 전체 문맥에서 중요한 논점 하나를 놓치고 있다. 원래 이 말의 핵심은 ‘배우고 익힌다’, 즉 익힘이 배움과 병치한다는 데 있다. 아무리 배워도 그것을 실천하거나, 내 것으로 체화하고 그것을 행위에 접목하지 못한다면 본래의 가르침에서 어긋난다는 뜻.
퇴계 이황이 말한 ‘함양(涵養)과 체찰(體察)’은 이런 맥락에서 나왔다. 퇴계는 시보 남언경에게 보낸 편지에서 이를 유교 가르침의 으뜸으로 꼽았다. 여기서 함양이란 학식을 넓혀 심성을 닦는 일이고, 체찰은 몸으로 익혀 실천하는 것을 가리킨다. 주자학은 원래 학문을 하는 네 가지 방법론으로 첫째 체인(體認), 둘째 체찰, 셋째 체험(體驗), 넷째 체행(體行)을 든다. 이는 일종의 학습 프로세서로, 나 자신을 살피고 덕성을 높이며 그것을 받아들여 실천하는 단계를 각각 가리킨다. 퇴계는 이 네 단계를 압축해 함양과 체찰로 정리한 후 다시 ‘학습(學習)’이란 두 글자로 환원했다. ‘학’은 배움을 가리키는 말이지만, ‘습’을 파자해보면 몸이 두 개의 날개를 달고 있는 형상이니 배운 내용에 두 날개를 달아 훨훨 나는 것, 즉 실천궁행(實踐躬行)이 배움의 덕목만큼이나 중요하다는 의미다.
그래서 조선의 유학자들은 배움을 실천으로 연결하기 위해 애썼다. 이 부분을 간과하고 유학을 단지 형이상학의 고담준론(高談峻論)으로 여긴다면 이는 무지에 의한 왜곡일 수 있다. 조선의 선비들이 출사(出仕)한 이유는 학문으로 배운 바를 사회에서 실천하기 위해서였고, 반대로 일생을 은거하며 공부에 몰입한 유림들도 자기 방식으로 체행에 몰입한 것이다. 퇴계는 이 둘 사이에서 고민과 갈등을 거듭했다. 학문을 익히고 배운 바를 사회에 실천하기 위해 출사했지만, 공부에 부족함을 느껴 즉각 물러났으며, 배움의 길과 가르침의 길이 하나라는 사실을 깨달은 후에는 제자들을 길렀다.
‘함양과 체찰’(신창호 엮고 지음/ 미다스북스 펴냄)에는 이런 퇴계의 고민과 생각이 담겨 있다. 지폐에서 매일 만나는 얼굴이지만, 우리가 퇴계에 대해 아는 바가 별로 없는 이유는 ‘이기론(理氣論)’ 같은 그의 학문적 성취에만 주목하기 때문이다. 또한 조선조 형이상학의 심오한 세계를 후대가 이해하기에는 너무 벅찬 탓이다. 하지만 이 책은 퇴계의 학문이 아니라 학문정신, 즉 함양과 체찰에 주목했다. 퇴계가 학문에 임한 자세, 출사 후 관리로서의 구실과 고민, 학자로서의 겸양과 자세 등이 담겨 있는 것. 물론 이 책에서 퇴계의 온전한 사상을 모두 접할 수는 없지만, 적어도 그의 정신세계만큼은 이해할 수 있다. 이 책은 조선 최고의 유학자였던 퇴계를 좀 더 이해할 수 있는 계기가 된다.
책은 전편에서 퇴계의 삶을 일별하고, 후편에서는 퇴계가 다른 사람과 주고받은 편지를 모은 ‘자성록’이라는 책을 통해 그의 육성을 들려주는 방식을 택했다. 학자로서의 사상보다 ‘학문하는 자’로서, 그리고 지식인으로서 퇴계의 자세와 정신을 이해하는 데 더할 나위없는 안내자 구실을 한다. 늘 스스로를 함양하고 체찰하려 했던 당대의 지식인 퇴계를 통해 배움에만 몰입하고 익힘에는 소홀한 우리 후학의 자세를 돌아보게 하는 셈이다. 함양과 체찰, 어쩌면 퇴계의 시대가 아닌 바로 이 시대에 가장 필요한 덕목이 아닐까. 이 책을 읽는 독자들은 내내 곱씹게 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