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가 바뀌면서 누구나 들춰보는 것이 달력이다. 하루, 한 주, 한 달, 한 해를 단위로 변함없이 반복되는 시간이지만 새해를 맞아 새 달력을 펼치는 마음은 늘 설렌다. 다가올 미지의 날들이 지난날보다 나아지길 바라는 희망과 기대, 다짐이 새 달력과 함께한다. 겉보기에 달력은 대수롭지 않지만 막상 달력이 없는 세상이란 상상하기 어려울 정도로 달력의 존재는 절대적이다.
18세기에 쓰인 대니얼 디포의 소설에서 보듯 무인도에 표류한 로빈슨 크루소도 달력의 영향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그는 매일 막대에 선을 그어 문명사회의 시간을 잊지 않으려 했다. 시간에 대한 인식은 인간에게 실로 원초적인 것이며, 달력은 인간의 역사만큼 오래된 것이다. 구석기시대의 유물에는 차고 기우는 달의 모습을 보고 새겼음직한 눈금이 있으며, 해와 달, 또는 별의 운행을 관찰하고 그것을 토대로 달력을 만든 것은 동서양 고대문명의 공통된 특징이었다.
오랜 달력의 역사에서 고대 로마시대는 각별한 의미를 지닌다. 달력이라는 용어와 1년 12개월 월별 명칭은 모두 고대 로마에서 유래했다. 뿐만 아니라 오늘날 우리가 사용하는 달력은 로마시대에 만들어진 율리우스력에 기원을 두고 있다.
율리우스력 오류 바로잡은 그레고리우스력
원래 로마는 달의 운행에 기초한 태음력을 사용했으나, 계절의 순환에 맞추기 위해 삽입하는 윤달의 산정이 복잡해 생활에 많은 불편과 혼란을 겪었다. 그래서 공화정 말기 로마의 권력을 장악한 율리우스 카이사르는 기존의 태음력 대신 고대 이집트의 태양력을 도입해 새로운 달력을 만들었다.
알렉산드리아의 천문학자 소시게네스의 조언을 얻어 만든 새 달력은 1년을 365.25일로 계산하고 365일의 평년과 4년마다 하루가 늘어나는 윤년을 뒀다. 새 달력을 도입하면서 카이사르는 자신의 집정관 취임에 맞추고자 새해의 시작도 두 달 앞당겼다. 당시까지 춘분이 있는 달, 즉 오늘날의 3월에 시작하던 새해가 지금처럼 1월부터 시작된 것이다. 달 대신 해를 선택하고 간편한 윤년 산출방식을 고안한 율리우스력은 로마시대 이후 서양의 기독교 문화권에서 널리 사용됐다. 하지만 율리우스력의 1년은 실제 회귀년, 즉 계절의 순환주기와 약 11분의 오차가 있었다. 처음에는 무시해도 별문제가 없던 이 작은 오차도 시간이 흘러 누적되자 달력의 정확성을 위협할 정도가 됐다.
특히 이 오차는 325년 니케아 공의회 이후 3월21일을 춘분으로 삼고 이날을 기점으로 부활절을 정해오던 가톨릭교회로서는 중대한 문제였다. 대략 130여 년마다 하루씩 늘어나는 오차 때문에 16세기 후반에 이르면 달력상 춘분은 실제보다 약 10일이나 늦었던 것이다. 그리하여 당시 교황 그레고리우스 13세는 중세 이래 율리우스력의 오차가 알려진 뒤에도 오랫동안 방치하던 달력의 개혁을 단행했다. 기존의 달력에서 누적된 열흘을 지움으로써 계절과 달력을 다시 일치시키고, 향후 오차를 없애고자 400으로 나뉘는 해를 제외하고 100으로 나뉘는 해에는 윤년을 두지 않는 새로운 규정을 도입한 것이다.
율리우스력의 오류를 바로잡은 그레고리우스력은 나중에 ‘세계의 달력’으로 발전하지만 처음에는 유럽에서조차 보급이 쉽지 않았다. 16세기 종교개혁 이후 가톨릭과 대립하던 신교세력은 한동안 새 달력을 거부했다. 그러다 가톨릭의 반(反)종교개혁을 이끌고 신교 탄압을 후원하는 교황이 달력을 이용해 기독교 세계를 다시 지배하려는 속셈으로 이를 받아들였다. 독일의 천문학자 케플러나 영국 여왕 엘리자베스처럼 개정된 달력을 종교가 아니라 과학의 관점에서 수용하려는 신교도도 있었지만, 대다수 신교국가는 18세기에 이르러서야 새 달력을 받아들일 만큼 완고했다.
종교뿐 아니라 정치도 달력의 역사에서 한몫했다. 18세기 말 프랑스 혁명기에 자코뱅으로 불린 급진 혁명세력은 이성(理性)을 시민사회의 새로운 종교로 내세우고 기독교 전통을 타파하기 위해 달력을 전면 개정했다. 그들은 도량형을 10진법으로 통일한 것처럼 시간과 달력에도 10진법을 도입했다. 한 시간은 100분, 하루는 10시간, 일주일은 10일, 한 달은 30일로 만들었고, 1년 360일 이외 남은 나날은 혁명정신을 기리는 기념일로 정했다. 혁명력은 월별 명칭에도 신이나 권력자의 이름 대신 안개, 서리, 눈, 비 등 계절의 특징을 보여주는 자연현상을 이용했다.
그러나 도량형과 달리 달력의 혁명은 성공하지 못했다. 사람들은 전통적인 생활리듬을 깨는 혁명력을 환영하지 않았다. 그리하여 1799년 가을, 정확하게 혁명력에 따르면 ‘안개의 달’인 ‘브뤼메르 18일’에 쿠데타로 권력을 잡은 나폴레옹은 혁명력을 폐지하고 그레고리우스력으로 되돌아갔다.
‘달력혁명’이 해프닝으로 끝난 사례는 20세기 소비에트 러시아에서도 찾을 수 있다. 러시아는 18세기 동안 그레고리우스력을 채택한 대다수 유럽국가와는 달리 20세기에 들어서까지 전통적인 율리우스력을 고집했다. 이 오랜 러시아의 전통을 혁파한 것은 1917년 볼셰비키 혁명에 성공한 레닌이다. 그는 제정시대 러시아 황제와 정교회가 수호하던 율리우스력을 폐지하고 그레고리우스력을 소비에트 공화국의 새 달력으로 채택했다. 자본주의 질서를 타파하고자 혁명을 일으켰지만, 시간의 셈법에서는 서방 자본주의 국가와 보조를 맞추고자 한 레닌의 실용적인 태도는 프랑스 혁명기의 자코뱅들과는 대조적이었다.
스탈린은 ‘5부제 휴일’ 달력혁명 시도
그러나 소비에트 공화국의 달력개혁은 레닌의 조치로 끝나지 않았다. 레닌 사후 독재체제를 수립한 스탈린은 프랑스 혁명력을 연상시키는 완전히 새로운 체제의 소비에트 달력을 제정했다. 즉 새 달력은 일주일을 5일로, 한 달은 6주로, 한 해는 72주로 구성했고, 1년 360일 이외 날들은 기념일로 정해 연중 분산 배치했다. 또 그것은 별도의 기념일을 제외한 주 5일을 노랑, 분홍, 빨강, 보라, 초록 다섯 가지 색으로 구분하고 소비에트 인민으로 하여금 그중 하루를 각자의 휴일로 선택하게 했다. 5부제 휴일이 의미하듯 달력혁명을 시도한 스탈린의 의도는 무엇보다 생산 설비를 중단 없이 가동하고 노동생산성을 향상시킴으로써 소비에트 경제를 발전시키자는 것이었다.
하지만 결과는 기대와 달랐다. 노동자들은 새 주일 체제에 따라 더 많은 휴일을 누릴 수 있었으나 줄어든 노동시간이 생산성 향상으로 이어지지는 않았다. 가족, 동료와 노동과 여가를 함께할 기회를 줄임으로써 가정과 직장생활에 많은 불편도 가져왔다. 달력에 대한 인민의 불평과 반발이 거세지자 스탈린도 언제까지나 억누를 수만은 없었다. 그래서 주 5일제를 주 6일제로 대체하고 여섯째 날로 휴일을 통일하는 등 개선을 시도했지만, 시간 산정이 다름에 따라 소비에트 바깥 세계와의 관계에서 생기는 불편과 어려움은 여전했다. 결국 1940년 그동안 10년 넘게 사용해오던 소비에트 달력을 폐지하고 그레고리우스력을 부활했다(러시아 정교회는 여전히 율리우스력을 사용해 부활절과 크리스마스가 늦다).
달력은 사람의 삶을 우주의 이치에 맞추려는 지혜의 소산이라고 할 수 있다. 다른 한편으로 달력의 역사가 보여주듯 달력은 성속(聖俗)의 권력과 결부됐고, 달력에는 인간의 지혜뿐 아니라 욕망과 야심도 아울러 작용했다. 특히 18세기 프랑스와 20세기 소비에트 러시아에 등장한 혁명력은 새로운 권력이 달력을 바꿈으로써 시간과 인간을 지배하려 한 시도였다. 그러나 혁명력의 좌절이라는 반복된 사례는 일상의 삶과 동떨어진 추상적인 이념과 정치가 얼마나 허망한 것인지를 잘 보여준다. 냉철한 현실인식을 토대로 합리적인 변화를 모색하는 대신 일거에 이상(理想)을 실현하려는 무모한 시도의 결말이야말로 달력의 역사가 주는 교훈이다.
18세기에 쓰인 대니얼 디포의 소설에서 보듯 무인도에 표류한 로빈슨 크루소도 달력의 영향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그는 매일 막대에 선을 그어 문명사회의 시간을 잊지 않으려 했다. 시간에 대한 인식은 인간에게 실로 원초적인 것이며, 달력은 인간의 역사만큼 오래된 것이다. 구석기시대의 유물에는 차고 기우는 달의 모습을 보고 새겼음직한 눈금이 있으며, 해와 달, 또는 별의 운행을 관찰하고 그것을 토대로 달력을 만든 것은 동서양 고대문명의 공통된 특징이었다.
오랜 달력의 역사에서 고대 로마시대는 각별한 의미를 지닌다. 달력이라는 용어와 1년 12개월 월별 명칭은 모두 고대 로마에서 유래했다. 뿐만 아니라 오늘날 우리가 사용하는 달력은 로마시대에 만들어진 율리우스력에 기원을 두고 있다.
율리우스력 오류 바로잡은 그레고리우스력
원래 로마는 달의 운행에 기초한 태음력을 사용했으나, 계절의 순환에 맞추기 위해 삽입하는 윤달의 산정이 복잡해 생활에 많은 불편과 혼란을 겪었다. 그래서 공화정 말기 로마의 권력을 장악한 율리우스 카이사르는 기존의 태음력 대신 고대 이집트의 태양력을 도입해 새로운 달력을 만들었다.
알렉산드리아의 천문학자 소시게네스의 조언을 얻어 만든 새 달력은 1년을 365.25일로 계산하고 365일의 평년과 4년마다 하루가 늘어나는 윤년을 뒀다. 새 달력을 도입하면서 카이사르는 자신의 집정관 취임에 맞추고자 새해의 시작도 두 달 앞당겼다. 당시까지 춘분이 있는 달, 즉 오늘날의 3월에 시작하던 새해가 지금처럼 1월부터 시작된 것이다. 달 대신 해를 선택하고 간편한 윤년 산출방식을 고안한 율리우스력은 로마시대 이후 서양의 기독교 문화권에서 널리 사용됐다. 하지만 율리우스력의 1년은 실제 회귀년, 즉 계절의 순환주기와 약 11분의 오차가 있었다. 처음에는 무시해도 별문제가 없던 이 작은 오차도 시간이 흘러 누적되자 달력의 정확성을 위협할 정도가 됐다.
특히 이 오차는 325년 니케아 공의회 이후 3월21일을 춘분으로 삼고 이날을 기점으로 부활절을 정해오던 가톨릭교회로서는 중대한 문제였다. 대략 130여 년마다 하루씩 늘어나는 오차 때문에 16세기 후반에 이르면 달력상 춘분은 실제보다 약 10일이나 늦었던 것이다. 그리하여 당시 교황 그레고리우스 13세는 중세 이래 율리우스력의 오차가 알려진 뒤에도 오랫동안 방치하던 달력의 개혁을 단행했다. 기존의 달력에서 누적된 열흘을 지움으로써 계절과 달력을 다시 일치시키고, 향후 오차를 없애고자 400으로 나뉘는 해를 제외하고 100으로 나뉘는 해에는 윤년을 두지 않는 새로운 규정을 도입한 것이다.
율리우스력의 오류를 바로잡은 그레고리우스력은 나중에 ‘세계의 달력’으로 발전하지만 처음에는 유럽에서조차 보급이 쉽지 않았다. 16세기 종교개혁 이후 가톨릭과 대립하던 신교세력은 한동안 새 달력을 거부했다. 그러다 가톨릭의 반(反)종교개혁을 이끌고 신교 탄압을 후원하는 교황이 달력을 이용해 기독교 세계를 다시 지배하려는 속셈으로 이를 받아들였다. 독일의 천문학자 케플러나 영국 여왕 엘리자베스처럼 개정된 달력을 종교가 아니라 과학의 관점에서 수용하려는 신교도도 있었지만, 대다수 신교국가는 18세기에 이르러서야 새 달력을 받아들일 만큼 완고했다.
종교뿐 아니라 정치도 달력의 역사에서 한몫했다. 18세기 말 프랑스 혁명기에 자코뱅으로 불린 급진 혁명세력은 이성(理性)을 시민사회의 새로운 종교로 내세우고 기독교 전통을 타파하기 위해 달력을 전면 개정했다. 그들은 도량형을 10진법으로 통일한 것처럼 시간과 달력에도 10진법을 도입했다. 한 시간은 100분, 하루는 10시간, 일주일은 10일, 한 달은 30일로 만들었고, 1년 360일 이외 남은 나날은 혁명정신을 기리는 기념일로 정했다. 혁명력은 월별 명칭에도 신이나 권력자의 이름 대신 안개, 서리, 눈, 비 등 계절의 특징을 보여주는 자연현상을 이용했다.
그러나 도량형과 달리 달력의 혁명은 성공하지 못했다. 사람들은 전통적인 생활리듬을 깨는 혁명력을 환영하지 않았다. 그리하여 1799년 가을, 정확하게 혁명력에 따르면 ‘안개의 달’인 ‘브뤼메르 18일’에 쿠데타로 권력을 잡은 나폴레옹은 혁명력을 폐지하고 그레고리우스력으로 되돌아갔다.
‘달력혁명’이 해프닝으로 끝난 사례는 20세기 소비에트 러시아에서도 찾을 수 있다. 러시아는 18세기 동안 그레고리우스력을 채택한 대다수 유럽국가와는 달리 20세기에 들어서까지 전통적인 율리우스력을 고집했다. 이 오랜 러시아의 전통을 혁파한 것은 1917년 볼셰비키 혁명에 성공한 레닌이다. 그는 제정시대 러시아 황제와 정교회가 수호하던 율리우스력을 폐지하고 그레고리우스력을 소비에트 공화국의 새 달력으로 채택했다. 자본주의 질서를 타파하고자 혁명을 일으켰지만, 시간의 셈법에서는 서방 자본주의 국가와 보조를 맞추고자 한 레닌의 실용적인 태도는 프랑스 혁명기의 자코뱅들과는 대조적이었다.
스탈린은 ‘5부제 휴일’ 달력혁명 시도
그러나 소비에트 공화국의 달력개혁은 레닌의 조치로 끝나지 않았다. 레닌 사후 독재체제를 수립한 스탈린은 프랑스 혁명력을 연상시키는 완전히 새로운 체제의 소비에트 달력을 제정했다. 즉 새 달력은 일주일을 5일로, 한 달은 6주로, 한 해는 72주로 구성했고, 1년 360일 이외 날들은 기념일로 정해 연중 분산 배치했다. 또 그것은 별도의 기념일을 제외한 주 5일을 노랑, 분홍, 빨강, 보라, 초록 다섯 가지 색으로 구분하고 소비에트 인민으로 하여금 그중 하루를 각자의 휴일로 선택하게 했다. 5부제 휴일이 의미하듯 달력혁명을 시도한 스탈린의 의도는 무엇보다 생산 설비를 중단 없이 가동하고 노동생산성을 향상시킴으로써 소비에트 경제를 발전시키자는 것이었다.
하지만 결과는 기대와 달랐다. 노동자들은 새 주일 체제에 따라 더 많은 휴일을 누릴 수 있었으나 줄어든 노동시간이 생산성 향상으로 이어지지는 않았다. 가족, 동료와 노동과 여가를 함께할 기회를 줄임으로써 가정과 직장생활에 많은 불편도 가져왔다. 달력에 대한 인민의 불평과 반발이 거세지자 스탈린도 언제까지나 억누를 수만은 없었다. 그래서 주 5일제를 주 6일제로 대체하고 여섯째 날로 휴일을 통일하는 등 개선을 시도했지만, 시간 산정이 다름에 따라 소비에트 바깥 세계와의 관계에서 생기는 불편과 어려움은 여전했다. 결국 1940년 그동안 10년 넘게 사용해오던 소비에트 달력을 폐지하고 그레고리우스력을 부활했다(러시아 정교회는 여전히 율리우스력을 사용해 부활절과 크리스마스가 늦다).
달력은 사람의 삶을 우주의 이치에 맞추려는 지혜의 소산이라고 할 수 있다. 다른 한편으로 달력의 역사가 보여주듯 달력은 성속(聖俗)의 권력과 결부됐고, 달력에는 인간의 지혜뿐 아니라 욕망과 야심도 아울러 작용했다. 특히 18세기 프랑스와 20세기 소비에트 러시아에 등장한 혁명력은 새로운 권력이 달력을 바꿈으로써 시간과 인간을 지배하려 한 시도였다. 그러나 혁명력의 좌절이라는 반복된 사례는 일상의 삶과 동떨어진 추상적인 이념과 정치가 얼마나 허망한 것인지를 잘 보여준다. 냉철한 현실인식을 토대로 합리적인 변화를 모색하는 대신 일거에 이상(理想)을 실현하려는 무모한 시도의 결말이야말로 달력의 역사가 주는 교훈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