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어권에서는 ‘주역(周易)’을 ‘The book of changes’라 부른다. ‘변화의 책’이라는 뜻이다. ‘주역’의 ‘역(易)’자가 ‘바꿀 역’이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근본적으로 변화를 말하는 책이기 때문이다. ‘주역’의 주제는 우리 속담인 ‘쥐구멍에도 볕 들 날 있다’, 고사성어 ‘새옹지마(塞翁之馬)’ 등과 관통한다. 이 때문에 ‘주역’을 소극적으로 해석하면 ‘참고 기다리며, 늘 자숙하라’는 뜻이 된다. 하지만 이것은 형이상학(形而上學)의 논리다. 형이상학이란 자연의 원리와 법칙을 이해하지 못한 인간들이 그 질서를 자연 자체에 두지 않고 상위에 두는 것이다. 즉 ‘리(理)’를 상정하고, 그것을 성인(聖人)의 길이라고 설정하는 것이다.
그 결과 모든 것은 하늘 혹은 그 너머에 있는 가상의 존재에 규정돼 있으니, 현실세계에서 아무리 아등바등 애를 써도 고칠 도리가 없다는 패배주의로 연결된다. 여기에는 지배계층의 사특한 논리가 깊이 내포됐다. 이것이 유가(儒家)에서 ‘주역’을 경전으로 인정한 까닭이며, 공자가 ‘가죽끈이 세 번이나 끊어질 정도(韋編三絶)’로 읽은 이유이고, 이후 왕필을 비롯한 많은 학자가 주석을 달고 평생을 탐구한 진짜 이유다. ‘주역’이 지배계층과 그들을 수호하는 지식인들의 전유물로 전락한 것이다.
서구에서도 다르지 않다. 서구의 철학 역시 19세기까지 형이상학과 관념론에 머물렀다. 신(神)은 모든 질서를 지배하고, 세계는 신의 섭리에 따라 움직인다고 봤다. 따라서 지금 질서는 신의 것이며 그것을 바꾸려는 시도는 ‘섭리’를 거역하는 것이 됐다. 중세 교부철학이 성행한 이유다. 결국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철학은 지배층의 시스템을 강고히 구축하는 데 악용됐던 것이다.
하지만 과학의 발달로 자연의 원리가 속속 밝혀지고, 빅뱅에 의해 우주가 팽창 중이라는 사실이 허블 망원경의 관측으로 증명됐으며, 다윈의 진화론이 종교적 혹은 형이상학적 세계의 믿음을 흔들었다. 동서양의 기존 철학체계는 붕괴하고, 과학이 그 자리를 대신하게 됐다. 서양 문명의 도래와 함께 ‘주역’의 몰락이 이뤄진 것은 더 말할 필요도 없다. ‘주역’이 점서(占書)로서의 기능만 살아남은 이유도 그 때문이다. 시초(柴草)로 괘(卦)를 뽑고 괘상(卦象)을 해석해 미래를 점치는 복자(卜者)들의 도구가 된 것이다. 점집이 ‘철학관’이라 불리게 된 연유도 이에 기인한다. 하지만 ‘주역’으로 점을 친다는 것은 난센스다. 시초를 손가락에 끼웠다가 뽑아 해당하는 괘로 미래를 안다는 것은 화투장을 떼거나, 쌀알을 던져 그 모양으로 운명을 감정하는 것보다 더 조잡하다.
그럼 왜 ‘주역’일까. 그것은 형이상학으로서의 ‘주역’이 아니라, 현실에서의 ‘주역’을 읽어야 하기 때문이다. 변화를 기다리는 ‘역(易)’이 아니라, 스스로 변화하는 ‘역(易)’으로서의 전환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지금 시대는 변화를 요구한다. 햇볕이 들지 않는 컴컴한 동굴에 앉아 ‘쥐구멍에도 볕 들 날 있다’며 기다리는 ‘역(易)’이 아니라, 동굴을 파고 쥐구멍을 부숴서 볕을 끌어들이는 적극적 의미에서의 변화가 필요하다. 하지만 변화란 무궁무진하고 오묘한 이치다. 또 변화에는 질서와 적절한 때가 있다. 그 이치와 원리가 ‘주역’에 녹아 있다. ‘주역’은 주나라 주공(周公) 이래 수많은 사람이 수정, 가필 첨삭하면서 변화의 원리를 녹인 책이다. 하지만 바로 그 때문에 원전을 읽고 해석하기 지난한 책이 돼버렸다. 그 결과 당대의 어용학자들이 ‘주역’을 독점적으로 해석하고 풀이해서 지배원리에 이용했고, 복자(卜者)들은 점술에 이용했다. ‘주역’은 다시 읽혀야 하지만, 읽기 어려운 책이 되고 말았다.
따라서 ‘주역’이 유가 원리 혹은 복술의 논리가 아닌 대중의 경전으로, 시대 변화를 요구하는 적극적인 각자(覺者)들의 레퍼런스로 사용되려면 쉽게 읽혀야 하고, 쉽게 풀려야 한다. 그런데 ‘주역’을 해설한 책들의 난해성은 원전보다 더 심하다. 온갖 현학과 비의(秘意)로 포장된 해설서들이 진짜 ‘주역’을 가까이할 수 없게 만든 탓이다. ‘주역’을 쉽게 그리고 편하게 풀이하되 원문의 뜻을 되도록 살린 책을 찾기가 쉽지 않다.
‘주역강의’(을유문화사 펴냄)는 이 점에서 높이 평가할 만하다. 저자의 이력이 학계의 한 자리를 차지하지는 않는다. 단지 한 개인의 노력과 열망으로 쓴 책이다. 하지만 저자의 지향성이 돋보인다. ‘지금 왜 주역인가?’에 대한 질문에 가장 적절히 화답하는 해설서로 보인다. 물론 ‘주역’을 전문으로 연구하는 학자들은 못마땅해할 수 있고, ‘주역’을 비전(秘典)이나 비의의 자리에 두고 싶은 사람에겐 거슬릴 수 있다. 하지만 일반 독자가 ‘주역이란 무엇인가’라는 주제에 접근하는 데 이만한 풀이를 만나기가 쉽지 않다. 그것이 이 책을 추천하는 이유다.
박경철 http://blog.naver.com/donodonsu
그 결과 모든 것은 하늘 혹은 그 너머에 있는 가상의 존재에 규정돼 있으니, 현실세계에서 아무리 아등바등 애를 써도 고칠 도리가 없다는 패배주의로 연결된다. 여기에는 지배계층의 사특한 논리가 깊이 내포됐다. 이것이 유가(儒家)에서 ‘주역’을 경전으로 인정한 까닭이며, 공자가 ‘가죽끈이 세 번이나 끊어질 정도(韋編三絶)’로 읽은 이유이고, 이후 왕필을 비롯한 많은 학자가 주석을 달고 평생을 탐구한 진짜 이유다. ‘주역’이 지배계층과 그들을 수호하는 지식인들의 전유물로 전락한 것이다.
서구에서도 다르지 않다. 서구의 철학 역시 19세기까지 형이상학과 관념론에 머물렀다. 신(神)은 모든 질서를 지배하고, 세계는 신의 섭리에 따라 움직인다고 봤다. 따라서 지금 질서는 신의 것이며 그것을 바꾸려는 시도는 ‘섭리’를 거역하는 것이 됐다. 중세 교부철학이 성행한 이유다. 결국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철학은 지배층의 시스템을 강고히 구축하는 데 악용됐던 것이다.
하지만 과학의 발달로 자연의 원리가 속속 밝혀지고, 빅뱅에 의해 우주가 팽창 중이라는 사실이 허블 망원경의 관측으로 증명됐으며, 다윈의 진화론이 종교적 혹은 형이상학적 세계의 믿음을 흔들었다. 동서양의 기존 철학체계는 붕괴하고, 과학이 그 자리를 대신하게 됐다. 서양 문명의 도래와 함께 ‘주역’의 몰락이 이뤄진 것은 더 말할 필요도 없다. ‘주역’이 점서(占書)로서의 기능만 살아남은 이유도 그 때문이다. 시초(柴草)로 괘(卦)를 뽑고 괘상(卦象)을 해석해 미래를 점치는 복자(卜者)들의 도구가 된 것이다. 점집이 ‘철학관’이라 불리게 된 연유도 이에 기인한다. 하지만 ‘주역’으로 점을 친다는 것은 난센스다. 시초를 손가락에 끼웠다가 뽑아 해당하는 괘로 미래를 안다는 것은 화투장을 떼거나, 쌀알을 던져 그 모양으로 운명을 감정하는 것보다 더 조잡하다.
그럼 왜 ‘주역’일까. 그것은 형이상학으로서의 ‘주역’이 아니라, 현실에서의 ‘주역’을 읽어야 하기 때문이다. 변화를 기다리는 ‘역(易)’이 아니라, 스스로 변화하는 ‘역(易)’으로서의 전환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지금 시대는 변화를 요구한다. 햇볕이 들지 않는 컴컴한 동굴에 앉아 ‘쥐구멍에도 볕 들 날 있다’며 기다리는 ‘역(易)’이 아니라, 동굴을 파고 쥐구멍을 부숴서 볕을 끌어들이는 적극적 의미에서의 변화가 필요하다. 하지만 변화란 무궁무진하고 오묘한 이치다. 또 변화에는 질서와 적절한 때가 있다. 그 이치와 원리가 ‘주역’에 녹아 있다. ‘주역’은 주나라 주공(周公) 이래 수많은 사람이 수정, 가필 첨삭하면서 변화의 원리를 녹인 책이다. 하지만 바로 그 때문에 원전을 읽고 해석하기 지난한 책이 돼버렸다. 그 결과 당대의 어용학자들이 ‘주역’을 독점적으로 해석하고 풀이해서 지배원리에 이용했고, 복자(卜者)들은 점술에 이용했다. ‘주역’은 다시 읽혀야 하지만, 읽기 어려운 책이 되고 말았다.
따라서 ‘주역’이 유가 원리 혹은 복술의 논리가 아닌 대중의 경전으로, 시대 변화를 요구하는 적극적인 각자(覺者)들의 레퍼런스로 사용되려면 쉽게 읽혀야 하고, 쉽게 풀려야 한다. 그런데 ‘주역’을 해설한 책들의 난해성은 원전보다 더 심하다. 온갖 현학과 비의(秘意)로 포장된 해설서들이 진짜 ‘주역’을 가까이할 수 없게 만든 탓이다. ‘주역’을 쉽게 그리고 편하게 풀이하되 원문의 뜻을 되도록 살린 책을 찾기가 쉽지 않다.
박경철<BR>의사
박경철 http://blog.naver.com/donodonsu