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영수 지음/ 알마 펴냄/ 438쪽/ 1만9800원
그동안 간헐적으로 ‘사기’를 읽어왔다. 국내에 ‘사기’ 완역본이 나온 것이 아니어서 총체적으로 읽어본 적은 없다. 하지만 책을 가까이하는 직업이다 보니 늘 변주되는 ‘사기’에서 벗어나기는 어려웠던 느낌이 든다. 중국 역사에서 ‘사기’는 그만큼 우리에게 가까이 다가오는 모양이다.
최근 ‘사기’를 다시 읽었다. 20년 이상 ‘사기’를 연구해온 김영수 씨가 EBS 방송에서 강의한 32시간짜리 프로그램을 책으로 펴낸 ‘난세에 답하다-사마천의 인간 탐구’를 통해서다. 9부로 구성된 이 책의 각부 제목인 ‘사기’의 탄생, 와신상담의 변주곡 오월춘추, 천하를 통일한 진제국의 비밀, 세상을 꿰뚫는 ‘사기’의 통찰력, 살아남는 자와 사라지는 자, 통찰의 인간 경영, 두 얼굴의 관료, 사마천의 경제 철학, 흥망을 좌우하는 인재의 조건 등에서 알 수 있듯 저자는 ‘사기’를 통해 위기의 시대를 살고 있는 우리에게 위기 극복에 필요한 지혜를 알려준다.
책의 처음부터 끝까지 인간의 선택과 고뇌가 투영된 인간 드라마가 이어진다. 진시황이 13세 때 황제에 즉위하자 실질적인 권력을 획득한 여불위는 ‘기화가거(奇貨可居)’, 즉 진기한 물건은 미리 차지해두는 것이 좋다는 말을 했다. 그렇다면 가장 소중한 기화는 무엇인가? 바로 사람이다. 문제는 진정한 기화를 찾아내는 안목이다. 여불위는 자초라는 인물에 투자해 권력을 쥘 수 있었다. 이런 사례처럼 이 책은 지인논세(知人論世), 즉 ‘사람을 알고 세상을 논하는’ 방식으로 전개된다.
그렇다면 지금은 난세인가? 그렇다. 나는 제목에 들어 있는 ‘난세’라는 단어에 이끌려 이 책을 읽었다.
불과 1년 전, 우리는 경제를 살리겠다는 사람에게 일단의 희망을 걸었다. 그러나 “한 나라의 흥망성쇠는 인재가 결정한다”는 사마천의 경고를 무시하고 부도덕하게 부를 축재한 측근인사를 자행하는 것을 보고 기대를 접어야 했다. “정권을 잡으면 반드시 인덕으로 다스려야 한다. 정권이 무엇으로 튼튼해지는지를 잊어서는 안 된다” “가장 못난 정치가는 백성과 다투는 자” 등은 ‘사기’ 속 인물들이 한 말이다. 이처럼 저자가 인용하는 문구 모두가 지금 우리에게 절실하게 다가온다.
군사전문가이자 개혁 전문 CEO로 명성을 날린 초나라의 오기는 76번을 싸워 단 한 번도 패하지 않은 상승(常勝) 장군으로 남을 수 있었다. 병사와 동고동락하면서 병사의 몸을 자기 몸처럼 아낀 덕분이다. 그는 부상한 병사의 피고름을 직접 빤 것으로 유명하다. 재상이라는 최고 자리에 오른 뒤 오기가 실시한 개혁은 왕족과 귀족의 특권 일체를 폐지한 것이었다. 예나 지금이나 개혁의 고갱이는 특권을 누리는 사람에게 많은 세금과 의무를 지게 만드는 것이다. 그래야만 ‘부국부민’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명박 정부는 상위 1%를 위한 정책만 추구하면서 시장 할머니에게 목도리를 둘러주는 이벤트로 서민을 위한다는 어설픈 시위나 하고 있다. 뼛속 깊이 서민을 무시하는 정책으로 일관하면서 이런 이벤트만 벌여서는 결코 국민의 신뢰를 얻을 수 없다.
저자는 ‘사기’를 읽지 않고는 중국 역사를 말하지 말고 ‘화식(貨殖)열전’을 읽지 않고는 ‘사기’를 말하지 말라는 어떤 이의 말을 인용하고 있다. ‘화식열전’은 ‘사기’ 130권 중 최고의 선물이라는 것이다. ‘화식’은 ‘돈을 번다’는 뜻이다. 사마천은 돈을 많이 번 부자나 경제전문가의 대표적 모델로 이듬해 농사 작황까지 정확하게 예측한 계연을 꼽는다. 그의 경제 이론에서 가장 기본이 되는 철학은 물건을 팔되 ‘폭리를 취하지 말라’는 것이다. 그는 또 “비싼 물건은 쓰레기를 버리듯 내다 팔고, 싼 물건은 구슬을 손에 넣듯 사들여라”고 충고한다. 시장을 안정시키기 위해서 물건을 돌게 하라는 2500년 전 계연의 가르침은 오늘날에도 치세의 철학이나 다름없다.
비전은 제시하지 못하면서 비민주적 퇴행만 일삼아 파쇼 정권의 탄생마저 예견되는 지금, ‘사기’를 새롭게 해석한 이 책은 난세를 살아갈 수밖에 없는 개인에게 위기를 이겨낼 지혜를 안겨준다. 지혜란 자기 자신을 믿는 것으로 귀결된다. 그래서 그 지혜들은 지금 더욱 절실한 울림을 던져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