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 정부가 AIG 구제금융을 결정한 9월17일 뉴욕 파인스트리트에 자리한 AIG 본사 빌딩으로 사람들이 들어가고 있다.
1997년 외환위기 여파로 대우 현대 기아 한보 등 한국을 대표하는 기업들이 줄줄이 쓰러졌을 때 많은 사람들은 ‘대마불사’의 신화가 깨졌다고 말했다. 당시 한국의 대기업들은 ‘외형성장 제일주의’의 경영방식을 표방하다 한순간에 부실화돼 문을 닫아야 했다. 곳간이 바닥난 정부도, 부실이 눈덩이처럼 불어난 은행도 구원의 손길을 건네지 않았다. 대마불사의 신화가 깨졌던 것이다.
당시 기자는 재정경제부와 한국은행을 출입하며 외환위기를 취재했다. 그런데 특파원으로 부임한 미국 뉴욕에서 ‘Too Big To Fail’이라는 말을 이렇게 자주 듣게 되리라곤 생각지도 못했다. 덩치가 너무 커버려 도산할 경우 국가 경제에 미치는 영향이 엄청나 정부가 구제할 수밖에 없다는 뜻이다. 바로 ‘대마불사’다.
지난 3월 도산위기에 처한 투자은행 베어스턴스에 대해 미국 재무부가 290억 달러의 구제금융을 제공했을 때, 9월7일 양대 모기지업체인 패니메이와 프레디맥을 사실상 국유화하면서 최대 2000억 달러의 구제금융을 투입할 것이라고 발표했을 때 월가 안팎에서는 역시 ‘대마불사’의 원칙은 깨지지 않는다는 말이 나왔다. 미국 정부는 이들에 대한 구제금융이 모럴 해저드(도덕적 해이)를 확산시킬 것이라는 비판에 맞서, 도산을 방치할 경우 금융시스템의 근간이 흔들릴 수 있다고 반박했다.
리먼브러더스 파산 이어 유동성 위기 갈수록 심화
그런 미국 정부가 이번에는 미국 4위 투자은행 리먼브러더스(이하 리먼)에 대한 구제금융을 거부했다. 영국계 바클레이즈 은행과 미국 최대 소매은행 뱅크오브아메리카(BoA)가 인수 이후 발생할 수 있는 손실을 일정 부분 보전해달라고 미국 정부에 요청했지만, 헨리 폴슨 미 재무장관은 꿈쩍도 하지 않았다. 이들은 결국 리먼 인수를 포기했고 리먼은 법원에 파산보호 신청을 했다.
헨리 폴슨 재무장관은 “민간 금융회사에 국민 세금을 투입하지 않을 것”이라고 큰소리쳤지만 9월16일 미국 정부는 스스로 이 말을 뒤집었다. 유동성 위기에 처한 세계 최대 보험사 AIG에 850억 달러의 대규모 구제금융을 투입하기로 결정한 것이다. 미국 정부는 골드만삭스와 JP모건체이스 등에 민간 차원의 해결책을 찾으라고 요구했지만 방책은 나오지 않았다. 결국 미국 정부는 세계 130개국 7400만명의 고객을 보유한 AIG를 도산시킬 수 없었다. 월가 안팎에서는 “어쩔 수 없는 결정이었다”는 의견과 “또다시 국민 세금으로 민간 기업을 살리느냐”는 비판이 맞섰다.
‘대마불사’ 논란이 이번으로 끝날 것 같진 않다. 미국 최대 저축대부업체 워싱턴뮤추얼의 유동성 위기가 심화되고 있고, 도산위기에 놓인 지방은행이 한두 곳이 아니기 때문이다. 미국의 자존심이라는 디트로이트의 자동차 업체들도 정부의 처분을 기다리고 있다. 고유가와 경기침체에 따른 매출 급감으로 위기에 처한 GM 포드 크라이슬러 등 ‘빅3’는 미국 정부와 의회에 500억 달러의 구제금융을 요청한 상태다.
‘Too Big To Fail’이라는 말은 앞으로도 한동안 미국을 떠들썩하게 만들 것이다. 갈림길에 선 미국 정부가 어떻게 대처해나가느냐는 미국뿐 아니라 전 세계의 관심사가 될 전망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