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계를 소재로 영원과 소멸에 대한 인간 의식을 그린 살바도르 달리의 작품‘기억의 지속’.
시간과 공간에 대한 근대적 인식은 기계식 시계의 대중화와 원근법의 발명에서부터 움트기 시작했고, 이를 극적으로 확산한 것은 철도였다. 볼프강 슈벨부쉬는‘철도여행의 역사’라는 책을 통해 철도 대중화가 근대인에게 시계의 시간을 반드시 지켜야 함을 각인시켰고, 이른바 ‘풍광의 공간’이 사라지고 ‘지리적 공간’만이 남는 ‘공간의 축소’를 가져왔다고 기술한다. 기차의 빠른 속도는 차창 밖 풍광을 외면하게 했고, 이는 자연스럽게 출발지와 도착지 두 공간만 기억하고 의미를 두게 되는 결과를 불러왔다는 것이다. 이른바 ‘사이 공간’을 살해했다는 것이다.
“이제 우리의 직관방식과 우리의 표상에 어떤 변화가 생길 것임이 틀림없다. 심지어 시간과 공간에 대한 기본 개념들도 흔들리게 되었다. 철도를 통해 공간은 살해당했다. 그리고 우리에게 남아 있는 것이라고는 시간밖에 없다.” -볼프강 슈벨부쉬 ‘철도여행의 역사’, 서울대 2005년 예시, 성균관대 2000년 정시
그런데 현대 정보통신의 발달은 시공간을 더욱 압축시켰다. 휴대전화와 라디오, TV는 시간과 공간을 증발시켰다. 인터넷의 발달은 ‘사이버 스페이스’라는 새로운 공간을 창조했고, 그곳에서 우리는 시공간과 육체의 제약을 벗어나 자유를 만끽하고 있다. 문제는 이런 과정에서 사회적 관계망이 탄력과 응집력을 잃어가고 있다는 점이다. 그만큼 친밀감을 쌓아가는 것이 버거워졌다. 그리고 시나브로 세상과 소통하는 창은 마이크로소프트의 ‘창’으로 일원화되고 있다.
“창이 없는 이 방에서 컴퓨터는 내 창이다. 거기에서 빛이 나오고 소리가 들려오고 음악이 나온다. 그곳으로 세상을 엿보고 세상도 그 창으로 내 삶을 훔쳐본다.”-김영하 ‘바람이 분다’, 고려대 2002년 수시1
여기서 눈여겨봐야 할 점은 근대적 시공간 인식이 자본주의와 함께 성장했다는 것이다. ‘시간은 금이다’는 격언을 떠올려보자. 이 격언만큼 근대적, 자본주의적 시간관을 상징하는 문구는 없을 것이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임금은 시간 기준으로 지불하는 것이 보편적이다.
이런 ‘화폐화된 시간’은 ‘근면’이라는 ‘신앙’과 결합해 자본주의적 사유방식을 구성한다. 따라서 시간에 생산성의 잣대를 들이대는 사유방식으로 보면 우리의 시간과 삶이 화폐 축적을 기준으로 짜인, 테일러와 포드식 대량생산 방식에 지배받는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이다. 권력에 순응하는 개인을 만드는 ‘생체권력’(미셸 푸코가 만든 말)은 시간을 가속화함으로써 이윤을 내는 자본주의 메커니즘을 너무도 잘 알기에 우리‘삶의 속도’가 빨라지기를 바라고, 우리는 그 바람에 충실하게 된다. 또한 그 과정에서 자연스럽게 속도 자체에 몰입하게 된다.
그런데 오랫동안 잊었던 사실이 하나 있다. 속도의 무한질주와‘시간 없음’을 통해 얻으려 했던 것은 결국 ‘시간 있음’, 곧 ‘빈둥거림’이었다는 사실이다. 따라서‘빈둥거림’의 복권을 꿈꾸고 실행하는 것은 결코 죄악이 아니다. 그렇다면 이제 목적과 수단 모두에서 해방된 시간과 공간, 그로부터 얻는 기쁨을 되찾아봐야 하지 않을까.
“한 체코 격언은 고요한 한가로움을 하나의 은유로서 이렇게 표현하고 있다. ‘그들은 신의 창(窓)을 관조하고 있다’고. 신의 창을 관조하는 자는 따분하지 않다. 그는 행복하다.” -밀란 쿤데라 ‘느림’, 성균관대 2000년 정시
- 연관 기출문제
성균관대 2000년 정시(과학기술 발달에 따른 삶의 방식 변화), 고려대 2002년 수시1(과학기술이 삶에 미친 영향), 연세대 2003년 정시 자연계(시간의 의미와 기능), 경희대 2007년 수시2 자연계(시간과 속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