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제주시에서 11번 국도를 따라가다 보면 제주컨트리클럽 입구와 견월교를 지나자마자 삼거리를 만나게 된다. 여기서부터 총길이 27km의 1112번 지방도가 시작된다. 제주도의 여느 도로와 마찬가지로 여기서도 길을 서두르지 않는 게 좋다. 응달진 곳에 남아 있을지도 모를 잔설(殘雪) 때문만은 아니다. 바로 한창 무리지어 피어난 복수초를 볼 수 있기 때문이다.
2월 중순부터 피기 시작해 3월 중순이면 절정에 이르는 제주도의 복수초는 육지 것보다 꽃잎이 훨씬 크고 꽃 빛깔이 선명하며 잎 또한 무성하다. 이른 봄의 살풍경한 숲 바닥에 한 그루만 피어도 눈에 확연히 들어올 정도다. 더구나 제주의 복수초는 수백 수천 그루가 군락을 이룬 채 피고 진다. 마치 갓 부화한 수천 마리의 노란 병아리를 일제히 숲에 풀어놓은 듯하다.

1112번 지방도의 시점부터2~3km의 구간과 절물자연휴양림의 초입에는 하늘 높이 치솟은 삼나무가 길 양쪽에 가지런히 늘어서 있다. 이 삼나무 가로수 구간을 빠져나오면 활엽수 우거진 숲길이 얼마쯤 이어지다가 갑자기 눈앞이 훤해진다. 바다가 보이지 않고 지평선만 보인다는 녹산장(鹿山場) 옛터의 평원(平原)에 들어선 것이다. 조천읍 교래리 일대의 이 드넓은 평원에는 산굼부리, 돔배오름, 대록산 등과 같이 언덕 같고 동산 같은 오름들만 드문드문 솟아 있다. 마소를 기르기에는 천혜의 자연조건을 갖춘 셈이다. 그래서 옛날에는 ‘녹산장’이라는 국영목장이 설치돼 있었다고 한다. 지금도 그 터에는 대원목장, 제동목장, 늘푸른목장, 중앙목장 등의 민영목장이 들어서 있다.
1112번 지방도는 교래 사거리에서 1118번 지방도와 교차된다. 1118번 지방도는 북제주군 조천읍과 남제주군 남원읍을 남북으로 관통하는 도로다. 흔히 ‘남조로’라 불리는데, 제주도의 숱한 도로 가운데서도 직선구간이 가장 길다. 좌우의 구불거림은 거의 없고 상하의 오르내림만 몇 km씩 계속된다.


대천동과 송당리 사이의 약 6km에 이르는 길 양옆에는 샘이오름, 안돌오름, 밖돌오름, 체오름, 칡오름, 민오름, 아부오름, 당오름 등 수많은 오름들이 봉긋봉긋 솟아 있다. 제주도의 동부 중산간지대에서 오름이 가장 밀집한 지역이다. 하지만 높다란 삼나무가 1112번 지방도로를 따라 늘어서 있어 차안에서는 이 오름들이 눈에 들어오지 않는다. 천생 길을 찾아 직접 올라보는 수밖에 없다.
가장 쉽게 오를 수 있는 오름은 아부오름. 해발고도는 301m나 되지만, 비고(比高)는 10~51m에 불과해 2~3분만 걸으면 정상에 올라설 수 있다. 그런데도 눈앞에 펼쳐진 광경은 믿어지지 않을 정도로 웅장하다. 발 아래엔 고대 로마의 콜로세움 같은 분화구가 78m 깊이로 푹 꺼져 있고, 눈을 들면 불끈불끈 치솟은 오름들과 한라산의 장중한 풍광이 시야에 가득 찬다. 내내 사람의 발길이 뜸한 곳이었다가 영화 ‘이재수의 난’ 촬영지로 알려진 뒤로는 알음알음으로 찾아오는 이들이 적지 않다.
건영목장 입구를 지나면 곧 송당리 사거리에 이른다. 1112번 지방도와 16번 국도(중산간도로)가 만나는 지점이다. 이 사거리 근처의 당오름에는 송당리 본향당(本鄕堂)이 있고, 송당리에서 1112번 지방도의 종점인 구좌읍 평대리까지 거리는 9km에 불과하다.
구좌읍 평대리의 중산간지대에 자리한 비자림(천연기념물 제182-2호)에는 수령 300~600년의 비자나무가 2500여 그루나 자라고 있다. 그리고 숲 한복판에는 수령이 800여년이나 되었다는 비자나무 조상목도 있다. 제주도의 최고령 나무로 꼽히는 이 조상목은 높이 25m에 둘레가 6m나 된다. 게다가 하늘을 가릴 정도로 빽빽한 비자나무의 가지와 줄기에는 콩짜개덩굴, 댕댕이덩굴, 줄사철나무, 마삭줄, 송악 등의 덩굴식물들이 친친 휘감겨 있다. 그리고 구불구불 이어지는 숲길에는 융단처럼 붉고 부드러운 송이(붉은 화산재)가 깔려 있어 산책하기에 그만이다. 1112번 지방도를 따라가는 여정이 아니더라도 제주도에 간 김에 꼭 한 번 들러볼 만하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