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집스러운 장인정신이 빚어낸 싱글 몰트 위스키 명품 ‘발베니’

[명욱의 위스키 도슨트] 사람이 직접 보리농사 짓고, 쇠 두드려 증류기 제조

  • 명욱 주류문화칼럼니스트

    입력2026-01-01 09:00: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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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발베니 더블우드 12년. 발베니 홈페이지

    발베니 더블우드 12년. 발베니 홈페이지

    최근 10년간 대한민국 주류시장 지형도가 바뀌었다. 희석식 소주와 라거 맥주가 지배하던 회식 문화 틈바구니 속에서 자신만의 취향을 찾는 MZ세대와 중년층을 중심으로 급격히 성장한 주종이 있다. 바로 ‘싱글 몰트 위스키’다. 쉽게 말해 ‘단일(single) 증류소’에서 오직 ‘보리(malt)’만 사용해 만든 위스키. 흔히 접할 수 있는 발렌타인이나 조니워커 등은 ‘블렌디드(blended) 위스키’로, 여러 증류소에서 다양한 곡물로 만든 원액을 가져와 섞어 맛의 균형을 맞춘 술이다. 블렌디드 위스키가 뛰어난 지휘자가 이끄는 오케스트라의 합주라면, 싱글 몰트 위스키는 연주자 개인의 기량과 개성이 고스란히 드러나는 독주에 가깝다.

    사람들이 싱글 몰트에 빠진 가장 큰 이유는 ‘감상의 포인트’가 풍부하기 때문이라고 본다. 블렌디드 위스키가 표준화된 맛을 지향한다면 싱글 몰트는 그 증류소가 위치한 지역의 날씨, 물, 바람, 그리고 그곳에 사는 사람들 성향까지 고스란히 담아낸다. 원료도 보리로 정해져 있고, 만드는 장소와 사람도 한정돼 있다. 그렇다 보니 수십 년을 오직 이 술 하나만을 위해 헌신한 장인들이 등장한다. 이 술을 마실 때 우리는 단순히 알코올을 섭취하는 것이 아니라, 그 지역의 역사와 환경, 그리고 장인의 인생을 함께 음미하게 된다. 이것이 현대인이 싱글 몰트 위스키를 좋은 술이자 하나의 예술 작품으로 인식하는 이유다. 

    위스키 성지 스코틀랜드서 ‘플로어 몰팅’ 고집

    수많은 싱글 몰트 위스키 중에서도 유독 ‘수제’라는 키워드에 몰두하며 독보적 위치에 오른 브랜드가 있다. 바로 ‘발베니(The Balvenie)’다. 현대화된 공장 시스템 대신, 사람이 직접 보리농사를 짓고 쇠를 두드려 증류기를 만드는 전통 방식을 고수한다. 미련할 정도로 우직한 발베니는 어떤 이야기로 한국인 마음을 사로잡았을까.

    발베니 역사는 1892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위스키 성지로 불리는 스코틀랜드 스페이사이드 지역에서 윌리엄 그랜트라는 인물이 설립했다. 인근에 위치한 13세기 고성(古城) 발베니 캐슬에서 이름을 따왔다. 재미있는 사실은 발베니 증류소를 세운 그랜트가 유명 위스키 글렌피딕을 만든 인물이라는 점이다. 글렌피딕이 대중적인 성공을 거두며 세계로 뻗어나갈 때 바로 옆에 세워진 형제 증류소 발베니는 좀 더 전통적이고 장인정신에 입각한 고집스러운 길을 택했다.

    발베니 생산자들은 지금도 직접 보리농사를 짓는다. 또 사람이 직접 삽을 들고 보리를 뒤집어 건조하는 ‘플로어 몰팅(Floor Malting)’ 방식을 고집한다. 효율성이 최고 가치가 된 자본주의 사회에서 이들의 방식은 비효율의 극치다. 하지만 역설적으로 이 비효율성이 발베니를 대체 불가능한 명품으로 만들었다.



    발베니가 단순히 좋은 위스키를 넘어 위대한 위스키 반열에 오른 것은 한 사람의 헌신 덕분이다. 바로 발베니의 몰트 마스터 데이비드 스튜어트다. 1962년 발베니에 입사한 그는 업계의 살아 있는 전설이다. 위스키 역사에 한 획을 그은 발명가이기도 하다. 위스키를 숙성시킬 때 서로 다른 오크통에 옮겨 담아 풍미를 입히는 ‘캐스크 피니싱(Cask Finishing)’ 기법을 세계 최초로 개발했기 때문이다. 이 기법으로 탄생한 ‘발베니 더블우드 12년’은 전 세계 위스키 애호가의 교과서가 됐다. 이러한 공로를 인정받아 그는 2016년 영국 왕실로부터 대영제국 훈장(MBE)을 받기도 했다. 스튜어트의 장인정신을 집대성해 만든 ‘발베니 DCS 컴펜디엄’이라는 한정판 컬렉션은 서울옥션 경매에서 5억 원(풀세트 기준) 넘는 가격에 낙찰됐다. 또한 그의 근속 60주년을 기념해 만든 ‘발베니 60년’은 한 병에 수억 원을 호가한다. 이는 한 사람이 평생을 바친 시간과 열정에 대한 경의의 가격이다.

    발베니가 한국시장에서 폭발적인 성장을 한 배경에는 탁월한 콘텐츠 마케팅이 있었다. “우리는 수제를 고집합니다”라는 메시지를 한국 장인들을 조명하는 방식으로 전달했다. 옻칠 장인, 유기장, 합죽선 명장 등 한국 전통을 이어가는 이들을 찾아 그들의 삶과 철학을 영상과 전시로 담아냈다. 특히 방송인이자 강연가인 김창옥 대표가 인터뷰어로 나서 장인들의 진심을 이끌어낸 콘텐츠는 큰 울림을 줬다. 정점은 서울 북촌 한옥 휘겸재(徽謙齋)에서 진행된 전시였다. 스코틀랜드 전통 위스키와 한국 전통 공예가 장인정신이라는 하나의 키워드로 만났다. 위스키의 품격을 높이면서 잊혀가는 한국 장인들의 가치까지 재조명한 남다른 마케팅이었다.

    이러한 브랜드 가치 상승은 대중적 인기로 이어졌다. 몇 년 전부터 시작된 위스키 열풍 속에서 발베니는 ‘오픈런’의 대명사가 됐다. 가수 규현이나 배우 하석진 등 유명 연예인들이 방송과 유튜브에서 발베니를 즐기는 모습이 노출되면서 품귀 현상은 더욱 심해졌다. 심지어 국내 프리미엄 증류식 소주 가운데 오크통에서 숙성시켜 발베니와 비슷한 풍미를 낸다는 이유로 화요XP 같은 술에 ‘쌀베니’(쌀로 만든 발베니)라는 애칭이 붙기도 했다.

    위스키 한 잔에 담긴 기다림의 가치

    발베니의 병 모양을 자세히 보면 목 부분이 살짝 볼록하게 튀어나와 있는데, 이는 발베니 고유의 증류기 모양을 본뜬 것이다. 이 독특한 증류기 구조 덕분에 발베니는 꿀처럼 달콤하고 부드러운 풍미를 지닌다. 싱글 몰트 위스키 특유의 소독약 냄새(피트 향)가 거의 없고, 바닐라와 꿀 향이 지배적이라 입문자에게 가장 추천하기 좋은 위스키다.

    가장 대중적인 ‘더블우드 12년’은 버번 오크통에서 숙성시킨 뒤 셰리 오크통으로 옮겨 담아 복합적인 단맛을 낸다. 개인적으로는 ‘캐리비안 캐스크 14년’을 추천한다. 럼(Rum)을 담았던 통에서 숙성시켜 열대과일의 달콤함과 뭉근한 알코올의 질감이 어우러져 마시기에 더욱 편안하다. 이외에도 ‘프렌치 오크 16년’ ‘포트우드 21년’ ‘발베니 30년’ 등 다양한 라인업이 있으며, 이제는 편의점 스마트오더나 데일리샷 애플리케이션, 면세점에서도 발베니를 찾는 게 한국 애주가들의 새로운 여행 루틴이 됐다.

    우리는 모든 것이 더 빠르고, 더 효율적으로 변해야만 살아남을 수 있다고 믿는다. 하지만 발베니는 우리에게 조금 다른 이야기를 건넨다. 100년 전 방식인 플로어 몰팅을 고수하고 60년을 기다려 스튜어트의 역작을 만들어내는 일은 시대에 뒤처지는 것이 아니라, 타협하지 않는 가치를 지키는 행위다. 이처럼 발베니가 스코틀랜드의 시골 증류소에서 세계적인 명품이 된 비결은 바로 130년간 자신들의 방식을 지켜낸 미련한 뚝심에 있다. 2026년은 뚝심을 갖고 천천히 차곡차곡 쌓아가는 한 해가 되기를 기대해본다. 

    명욱 칼럼니스트는… 주류 인문학 및 트렌드 연구가. 숙명여대 미식문화 최고위과정 주임교수를 거쳐 세종사이버대 바리스타&소믈리에학과 겸임교수로 재직 중이다. 저서로는 ‘젊은 베르테르의 술품’과 ‘말술남녀’가 있다. 최근 술을 통해 역사와 트렌드를 바라보는 ‘술기로운 세계사’를 출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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