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진핑 중국 국가주석. [AP=뉴시스]
“엄청난 속도로 과거 회귀”
2013년 중국공산당은 정부 기관과 대학에 자국민이 ‘말해서는 안 되는 것 일곱 가지(七不講)’와 ‘말해도 되는 것 열두 가지(十二語)’를 규정해 하달했다. △보편적 가치 △보도의 자유 △시민사회 △시민의 권리 △공산당의 역사적 과오 △특권 귀족의 자산계급 △사법 독립이 7불강(不講)이다. 부강, 민주, 문명, 화해, 자유, 평등, 공정, 법치, 애국, 경업(敬業), 성신(誠信), 선우(友善)는 12어(語)에 해당한다. 앞선 일곱 가지 개념은 중국 공산주의 가치관과 배치되기에 통제돼야 한다는 것이다. 이처럼 사상통제가 강화되는 것은 공산당의 위기의식이 얼마나 강한지 방증하는 것이기도 하다. 최근 중국 동향을 보면 맥파커 교수의 말이 점점 현실화하는 것 같다.이처럼 사상의 자유가 위협받는 시기, 중화인민공화국 성립 후 중국 지식인은 어떤 방식으로 존재했는지 궁금해진다. 궁금증을 풀려면 20세기 100년 동안 중국 지식인의 기원과 존재 양태를 통시적으로 조망할 필요가 있다. 오늘날 중국 지식인의 전신이라고 할 사인(士人) 계층이 형성된 것은 춘추전국시대다. 씨족사회가 무너지는 격변기에 신분 아닌 실력으로 입신하려는 사인이 하나의 계층으로 자리 잡았다. 춘추시대 공자는 지식인의 표준으로 군자(君子)를 제시했다. 사인 계층은 진·한나라 때 권력과 본격적으로 연계됐고, 당나라 때 과거제도가 시행되면서 제도적으로 존재를 보장받았다. 권력과 사인의 밀월은 근대에 접어들면서 깨지기 시작했다. 청나라 말기 과거제도가 폐지되자 사인 계층의 신분이 불안해진 것. 마오쩌둥은 국가와 지식인의 관계를 가죽과 털의 관계에 비유했다. 국가가 시행하던 과거제도(가죽)가 사라지자 털(지식인)이 붙어 있을 곳을 상실했다는 것이다. 마오의 지적은 1905년 과거제가 폐지된 후 ‘유동하는 지식인(遊魂)’의 지위를 잘 설명한다.
20세기 중국은 격변을 거듭했다. 1895년 청일전쟁 패배, 1911년 신해혁명, 1916년 신문화운동(광의의 5·4운동)이 있었고 1949년 중화인민공화국 탄생 후에도 1978년 시작된 개혁·개방, 1989년 톈안문 사태 등 굵직한 사건이 이어졌다. 그사이 중국 지식인의 운명은 롤러코스터를 타는 격으로 흔들렸다. 청일전쟁 패전 후 중화제국 해체는 사인 계층에 전례 없는 충격이었다. 출세 관문인 과거제 폐지로 중앙·지방권력 구조에 진입하는 길이 사실상 막혀버린 것이다. 지식인들은 이제 출세를 위해선 해외 유학을 떠나야 했다. 과거 공부의 필수 과목이던 팔고문(八股文) 대신 근대 학문의 세례를 받아야 한 자리 차지할 수 있었다. 1900년대 한때 일본 내 중국인 유학생 수가 1만 명에 육박할 정도였다.
새로운 지식인 수가 많다 보니 이들의 요구를 어떻게 처리하느냐가 당시 중국 정치의 관건이었다. 1912~1917년 550만 명가량이 신식 학당에 다니거나 졸업했다. 5·4운동(1919)이 일어났을 때 신식 교육을 받은 사람은 1000만 명에 달했다. 신교육을 받은 지식인 집단은 전통 사회의 형태가 지속되는 한 권력 중심으로 진입할 수 없었다. 이런 상황에서 신지식인 집단이 유가윤리를 비판하고자 신문화운동을 일으킨 것은 불가피한 선택이었을 것이다. 물론 신문화운동을 일부 유학파 지식인의 출세욕으로만 치부해선 안 된다. 공화제를 내건 신해혁명으로 왕정은 폐지됐으나 전통사회 신권(紳權: 벼슬아치(紳)로서 지식인의 권위)의식의 기초인 유가윤리는 그대로였다. 그런 점에서 신문화운동은 왕정 폐지라는 세계사 패러다임에서 출현한 하나의 문화 현상으로 볼 필요가 있다. 그 과정에서 대중의 출현과 사회 변화를 둘러싼 사상 논쟁은 중국 사인 계층을 근대적 지식인으로 변화시킨 중요한 계기였다.
2015년 보도의 자유 등 ‘말해서는 안 되는 것 일곱 가지(七不講)’를 규정한 중국공산당 ‘9호 문건’을 유출한 혐의로 징역형을 선고받은 언론인 가오위(高瑜). [동아DB]
짧은 ‘자유주의 황금기’
유학파 지식인들은 자신의 경험을 중국 사회에 전파하고자 노력했다. 일본 침략에 대응하려고 만든 잡지 ‘독립평론’은 1930년대 중국에서 상당한 영향력을 행사했다. 기고자 25명 중 미국(22명), 프랑스(1명), 영국(1명) 유학파가 다수였고 베이징대 출신이 1명 있었다. 1940년대를 풍미한 주간지 ‘관찰’의 기고자 79명을 살펴봐도 그중 56명이 구미권에 유학을 다녀왔다. 선진 자본주의 사회의 자유스러운 분위기를 경험한 지식인들이 언론의 주축이었던 것이다. 흔히 1945년 제2차 세계대전 종전 후 1949년 인민공화국이 탄생하기까지 짧은 시기를 중국 자유주의의 ‘최후의 절창(絶唱)’이라고 한다. 중국에 자유주의가 유입된 이래 지식인이 자기 목소리를 가장 확실히 낼 수 있었던 시기다. 짧지만 ‘자유주의 황금기’였던 것이다. 물론 중국 자유주의 주류는 사회민주주의적 경향을 띠고 있었다. 영국 노동당 이데올로그 해럴드 래스키의 영향을 받은 지식인이 적잖았다.과거제 폐지 후에도 지식인 뇌리에는 옛 사인의 태도가 남아 있었다. ‘관직에 오르는 것이 독서의 목적’이라는 공자식 정치관이 각인된 탓에 의식이 존재 변화를 따라가지 못하는 형국이었다. 그 때문에 서양 유학을 다녀온 지식인조차 순수한 ‘학술사회’를 만드는 것이 순조롭지만은 않았다. 1930년대부터 유학파를 중심으로 지식인 위상을 새롭게 확립하려는 시도가 있었다. 그럼에도 지식인의 숨은 목표는 여전히 정치권력 상층부로 통하는 길을 만드는 것이었다. 여전히 심리 저변에 학문 자체보다 출세가 더 중요한 동인으로 작용했다. 신지식을 흡수한 이조차 전통적 사대부 계층의 애매한 역할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물론 지식인의 사회 참여에는 순기능도 있었다. 19세기 말부터 20세기 중반까지 중국 지식인은 파워엘리트와 함께 국가 운영과 미래 구상에 적극 개입했다. 역사 선두에서 중국의 변화를 이끈 주역이 바로 사인에서 근대적 지식인으로 전환하던 식자층이었다. 일본의 침략으로 내우외환을 겪은 1930년대 중국 지식인은 8·1선언 등 집단행동으로 국민당을 항일운동에 참여케 하기도 했다.
중국 문화대혁명 당시 ‘우파(右派)’로 지목돼 조리돌림을 당하는 칭화대 교수. [동아DB]
“비극 이은 희극”
그렇다면 1949년 중화인민공화국 탄생 후 지식인의 운명은 어땠을까. 1930~1940년대 지식인들은 미래 중국이 미국식 정치와 소련식 경제모델을 채택해야 한다고 봤다. 인민공화국 성립 후 마오쩌둥이 구축한 사회주의체제와는 전혀 다른 모델이었다. 1940년 중국공산당이 제시한 ‘신민주주의론’ ‘연합정부론’에는 공산당이 지식인과 협력해 국가를 운영한다는 일견 매력적인 내용이 있었다. 당대 지식인들이 공산당이 통치하는 미래에 적잖은 기대를 했던 것도 사실이다. 그러나 중화인민공화국 성립은 결과적으로 과거제 폐지만큼 지식인들에게 충격적 사건이 됐다. 사회주의체제가 도입되고 30년 동안 중국 지식인은 공산당과 대중 사이에서 완전히 배제됐다. 마오쩌둥은 인민과 직접 만나고자 했다. 위정자와 일반 대중 사이에서 구심점 역할을 하던 전통적 지식인의 역할이 사라진 것이다. 중국 사대부는 옛 왕조가 끝나고 새 왕조가 들어설 때 국가 설계 단계부터 참여하는 주체였다. 중국 역사에서 지식인이 이토록 박대받은 것은 진나라 분서갱유 이후 처음이라고 할 수 있다.중국 소설가 위화(余華)는 소설 ‘형제’(2005) 서문에서 “개혁·개방 이전 중국 사회주의가 비극이라면 그 뒤는 희극”이라고 표현한 적이 있다. 비극이 희극을 낳았다는 의미다. 과거 정치권력이 모든 것을 좌우했다면 이제 자본권력까지 가세했다는 뜻이기도 하다. 금권 위력까지 더해져 중국공산당의 지식인 통제가 갈수록 수월해지는 것 아닌지 우려된다.
조경란은… 연세대 국학연구원 연구교수, 국무총리실 산하 경제인문사회연구회 인문정책특별위원회 위원. 중국현대사상 · 동아시아 사상 전공. 홍콩중문대 방문학자 · 베이징대 인문사회과학연구원 초빙교수 역임. 저서로는 ‘현대 중국 지식인 지도 : 신좌파·자유주의 · 신유가’ ‘20세기 중국 지식의 탄생 : 전통 · 근대 · 혁명으로 본 라이벌 사상가’ ‘국가, 유학, 지식인 : 현대 중국의 보수주의와 민족주의’ 등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