법통팔달

현대사에 우뚝 선 두 사람

전태일과 조영래

  • | 신평 경북대 로스쿨 교수 lawshin@naver.com

    입력2018-01-23 14:34: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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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고(故) 전태일 열사와 조영래 변호사, 그리고 ‘전태일 평전’ 표지(왼쪽부터). [동아DB]

    고(故) 전태일 열사와 조영래 변호사, 그리고 ‘전태일 평전’ 표지(왼쪽부터). [동아DB]

    전태일은 1970년 11월 13일 22세 때 자신을 불살랐다. 그보다 한 살 많은 조영래는 71년 사법시험 합격 후 서울대생 내란음모 사건으로 실형을 선고받아 복역하고, 또 전국민주청년학생총연맹(민청학련) 사건 관련자로 수배돼 1974~79년 6년 동안 기나긴 도피생활을 했다. 이때 전태일의 삶을 다룬 ‘어느 청년 노동자의 삶과 죽음’이란 책을 집필했다. 이것이 83년 서슬 퍼런 전두환 정권 치하에서 출판됐다. 그 후 ‘전태일 평전’이란 이름으로 오랜 세월에 걸쳐 젊은이들의 가슴에 소박한 들꽃을 피우며 사회와 공동체, 소외된 이웃에 대한 의식을 깨워왔다. 이수호 전태일재단 이사장의 말에 따르면 조영래의 유족은 기꺼이 책 인세를 전태일재단에 귀속했고 지금까지 재단의 주된 수입원이 되고 있다고 한다. 

    한국 근현대사를 일별할 때 우리 민족의 집단무의식에 가장 큰 영향을 미친 사건을 나열해본다면 동학혁명, 한일병합, 해방, 6·25 전쟁 등이 될 것이다. 좀 더 시간의 줄을 앞으로 당긴다면 전태일 열사의 분신을 빼놓을 수 없다. 이 사건의 영향권에서 일어난 많은 일이 한국의 민주화를 결정적으로 형성해온 것이다. 

    전태일의 분신은 국가권력이나 자본가의 탐욕, 시장경제의 폐해에 대한 단순한 항거가 아니었다. 그는 맑고 순수한 영혼을 가진 청년이었을 뿐이다. 하지만 그는 열악한 처지에도 동료 공원들의 비참한 사정을 헤아리며 그들을 도우려 했다. 주린 배를 움켜쥐면서도 가혹한 노동으로 핏기를 잃어가는 어린 여공들에게 붕어빵을 사주는 여린 청년이었다. 그의 슬픔은 사회 밑바닥에 깔린 수많은 이름 없는 영혼을 향한 것이었다. 그가 흘린 눈물은 방울방울 매달린 수정처럼 반짝이며 숱한 사람들에게 영감을 주어왔다. 어떤 면에서 그는 우리의 정신과 의식 세계를 변혁하는 선각자였고, 종교가였으며, 문화창조자였다. 

    그러나 만약 조영래가 책을 통해 전태일을 다시 살려놓지 않았더라면 우리가 전태일의 모습을 살피는 데 커다란 걸림돌이 있었을 것이다. 조영래는 절박한 도피생활 와중에도 마침 그때까지 남아 있던 전태일의 일기(그중 일부는 당시 이미 없었다)와 어머니 이소선 여사, 형제들을 숱하게 만날 시간을 얻을 수 있었다. 전태일의 막냇동생 전순옥은 조영래가 어린 자기를 옆에 앉혀두고 세상을 이해하려면 신문을 꼭 읽어야 한다고 자상하게 권하던 모습이 잊히지 않는다고 증언했다. 그 무렵 전태일 가족은 세상 누구보다도 비참할 만큼 나락으로 떨어져 신음하고 있었다. 가난한 도망자 조영래는 자신이 처한 위치보다 더욱 낮은 곳으로 내려가 유족을 위로했다. 그리고 전태일을 추모하는 가장 효과적 수단인 책을 내고자 온 힘을 기울였다. 

    조영래는 망원동 수재 사건, 부천경찰서 성고문 사건, 여성조기정년제 철폐 사건 변론 등을 통해 해방 후 가장 뛰어난 법조인 가운데 한 사람으로 추앙받는다. 그러나 그는 여기서 그치지 않았다. 전태일 정신을 일으키고, 그것을 바탕으로 정당한 법의 실현을 통해 사회적 약자가 존엄한 인격의 개체로서 살아갈 수 있도록 끊임없이 노력했다. 



    한 살 터울인 두 사람은 생전에 만난 일이 한 번도 없었으나 아름다운 영혼의 교제를 맺었다. 그 결과 두 사람은 우리 현대사에 우뚝 서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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