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명박 전 대통령의 부인 김윤옥 여사가 2009년 4월 7일 서울 롯데호텔에서 열린 ‘한식 세계화 2009 국제 심포지엄’에서 환영사를 하고 있다.
단 한 줄. 이명박(MB) 전 대통령이 집필한 회고록 ‘대통령의 시간’은 800여 쪽에 달하는 방대한 분량이지만, 당시 국책 사업으로 대통령 부인이던 김윤옥 여사까지 나서 대대적인 홍보를 벌였던 ‘한식 세계화’에 대한 내용이 빠져 있다. 관련 내용이라고는 퍼스트레이디의 소임에 대해 적은 부분에서 아내의 행적에 대해 언급하며 적은 이 한 줄이 전부다. ‘대통령의 시간’에서는 한 줄이지만 그 한 줄에 600억 원이 넘는 세금이 들어갔다. 의미 있는 국가사업으로 여겨지던 한식 세계화가 수년이 지난 지금 치적 순위에서조차 밀려난 이유는 뭘까. 한식 세계화 사업 기간은 대통령이 지워버리고 싶은 시간이었던 걸까.
누구를 위해 600억 원 쏟아부었나
MB의 회고록과 비슷한 시기 16명의 저자가 공동집필해 출간한 ‘MB의 비용’에는 ‘한식 세계화 사업과 영부인’ 부문이 수록돼 있다. 필자인 이후천 협성대 신학대 교수는 새누리당 김재원 의원의 주장을 바탕으로 △한식재단이 2011년 11월부터 1년 동안 런던, 파리, 브뤼셀, 마드리드, 뉴욕, 베이징 등지를 여행하며 초호화판 잔치를 벌였다 △MB 정부를 거치면서 국가부채가 481조8000억 원이나 증가했으며, 부채 증가에는 한식 세계화를 명분으로 벌인 ‘영부인의 간판사업’ 같은 낭비성 예산이 포함됐다 △MB 정부의 한식 세계화 사업이 부실한 것으로 평가받는 데는 영부인과 관련한 지적이 가장 압도적이다 등의 내용을 언급했다.
한식 세계화 사업은 2008년 말 본격적으로 추진되며 국민적 관심사로 떠올랐다. 2008년 10월 농림수산식품부(현 농림축산식품부·농식품부)는 한식 세계화를 선포하면서 “2017년까지 한식을 세계 5대 음식으로 육성하겠다”고 선언했다. 2009년 5월엔 범부처 차원에서 한식 세계화 정책을 추진하겠다며 민관합동기구 ‘한식 세계화추진단’을 발족했다. 김윤옥 여사는 한식 세계화추진단 명예회장으로 활동했다. 이 추진단은 2010년 3월 농식품부 산하 비영리재단법인인 ‘한식재단’으로 공식 출범했다. 한식재단 초대 이사장은 정운천 전 농식품부 장관이 맡았다.
한식재단은 한식 세계화를 ‘우리 음식을 세계인이 즐기는 문화로 만드는 것’이라고 정의했다. 당시 정 이사장은 “2011년 미국 뉴욕에 표준화된 김치 플래그십 식당을 개점하고 세계 대도시로 확산할 것”이라는 계획을 밝히기도 했다. 문화재청은 한식을 유네스코 인류무형문화유산으로 등재하기 위한 체계적인 전략을 수립하고자 2011년 7월 ‘한식 유네스코 인류무형유산 등재추진위원회’를 구성했다. 그러나 ‘주간동아’가 문화재청에 확인한 결과 ‘한식 유네스코 인류무형유산 등재추진위원회’는 소리 소문 없이 사라진 것으로 나타났다. ‘김장문화’가 유네스코 인류무형문화유산에 등재된 건 2013년 일이다.
한식재단의 사업 또한 1년여 만에 백지화됐다. 2009년 첫해 배정된 한식 세계화 예산은 100억 원. 이후 2010년 241억 원, 2011년 325억 원 등 지속적으로 증가했다. 그러나 플래그십 한식당 사업이 취소되고, 한식당 개설자금 사업 수요 저조, 한식 현지화 지원 사업 신청 저조 등 미집행 예산이 많고 사업 추진이 제대로 되지 않자 이듬해인 2012년 예산은 264억 원으로 삭감됐다. 한식 세계화는 큰 성과를 내지 못하고 연간 사업비의 20~30%가량이 불용과 이월을 반복했다.
예산의 방만 운용 혹은 전용 의혹을 받아온 이명박 정부의 한식 세계화 사업은 박근혜 정부에서 감사원 감사를 받았다. 2013년 2월 26일 국회는 본회의에서 ‘한식 세계화 사업에 대한 감사요구안’을 통과시켰다. 감사 대상엔 농식품부, aT 한국농수산식품유통공사, 한식재단, 농림수산식품기술기획평가원 등이 포함됐다. 같은 해 6월 21일 감사원은 한식 세계화 지원 사업 집행 실태 점검 결과 이 사업의 주무부처였던 농식품부가 2009∼2012년 예산 931억 원을 배당받고도 704억 원밖에 쓰지 못한 것으로 확인됐다고 밝혔다.
전략 수정 후 재활용은 좋으나
2014년 11월 20일 박근혜 대통령은 세계 3대 요리사를 청와대로 초청해 한식 세계화에 대해 논의했다.
△전체 시장 진출 전략에서 탈피, 유망 시장에 집중 △한식 수용도 및 시장 매력도 높은 중국, 일본, 미국 등에 집중 △해외 홍보 일변도에서 탈피, 한국 찾는 외국인 관광객 대상 홍보 확대 등이다.
사업 구조도 조정됐다. △한식 세계화와 관계가 적은 대한민국식품대전 등 이벤트성 행사 지양 및 한식 연구개발(R·D), 컨설팅 등 사업은 유사 사업에 통합 △문화체육관광부(문화부)와 협업체계 구축으로 우리 문화와 전통 음식 연계한 음식 관광 활성화 △사업의 주기적인 점검, 평가 및 환류 체계 구축 △한식재단 조직 및 인력 개편 등을 통해 역량 강화하고 농식품부, 문화부, 한식재단, 한국관광공사 등이 참여하는 협의체 구성, 사업계획 수립·집행·평가 전 과정에서 협업 추진 등이 주요 내용이다.
박 대통령은 지난해 11월 20일 세계 3대 셰프인 피에르 가녜르, 호안 로카, 레네 레제피를 비롯한 국내외 저명 요리사들을 청와대로 초청해 오찬을 갖고 한식 세계화에 대해 논의하는 시간을 가졌다. 이날 박 대통령은 “글로벌 시대를 맞아 음식 문화를 공유해 새로운 문화산업으로 발전시켜야 한다”고 강조했다.
그러나 올해 들어 한식 세계화와 관련한 움직임은 보이지 않는다. 농식품부 관계자는 “아직 한식 세계화 사업에 대한 특별한 일정은 없다. 향후 밀라노엑스포에서 한식을 홍보할 계획”이라고 밝혔다. 지난해 1월 21일 새누리당 김기현 의원이 대표발의한 ‘한식 진흥에 관한 법률’ 법안은 아직 국회에 계류 중이다.
한식재단은 올해 한식 진흥 및 음식 관광 활성화를 위해 △국내 기반 정립 △음식 관광 활성화 △전문인력 양성 △한식 해외 확산 사업 등을 벌일 것이라고 밝혔다. 주요 내용은 국내에서는 민간단체 한식 협의회와 한식정책 자문단을 꾸리고, 한식 레시피 개발 및 보급, 한식사진 공모전 개최, 제2회 한식사랑 한식위크와 글로벌 한식 잡페어 진행 등이다. 한식 해외 확산을 위해서는 동남아시아 지역에 해외 추천 한식당 가이드북을 제작, 보급하고 케이팝(K-pop), 케이드라마(K-drama) 등 한류 문화콘텐츠, 국내외 매스미디어와 연계한 홍보를 추진하는 한편 밀라노엑스포, 스페인 마드리드퓨전, 미국 뉴욕 와인앤드푸드 페스티벌 등 음식 관련 유명 국외 페스티벌과 행사에 지속적으로 참가해 한식을 알린다는 계획이다.
물건은 싫증나면 버릴 수 있지만, 국가 정책을 그렇게 해서야 될까. ‘주간동아’는 전문가들에게 지금까지의 한식 세계화 사업을 점검받고, 개선 방향을 물었다. 한식 세계화를 지속적으로 해야 한다는 의견부터 사업 자체에 회의적인 시각까지 다양한 의견이 나왔다.
국내 소비자에게 한식 붐을 일게 한 대표적인 요리 프로그램인 케이블채널 올리브TV ‘한식대첩’은 시즌2까지 방송되는 동안 심영순, 백종원 요리연구가, 최현석 셰프를 비롯한 여러 업계 전문가가 심사위원으로 활동했다. 심영순 요리연구가는 “함께 어우러져 식사하는 문화가 사라진 현대사회일수록 가정식을 중요하게 여겨야 한다. 외식업, 가공식품 산업에서도 건강을 우선시하는 한식의 기본 정신이 바탕을 이뤄야 한다”고 강조했다. 한식 세계화 정책에 대해서는 “식품산업 개발과 운영에만 지나치게 초점이 맞춰져 있다”며 “인적, 물적 자원에 대한 관리와 지원이 미흡하다. 분야별 조리사를 양성하고 경험이 부족한 업주를 위한 지원이 국가적으로 이뤄져야 한다”고 조언했다.
“한식이 세계 시장으로 나아가려면 정책적 지원과 교육이 뒷받침돼야 합니다. 국내에 여러 한식연구기관이 있고 전통을 살린 조리법을 연구 및 보급하려 노력하지만 개인 힘으로는 부족한 게 사실입니다. 유럽과 일본은 대대로 해온 식문화 사업을 정부가 지원해주는 반면, 국내에서는 명인들이 지켜온 전통 기술이 쉬운 기술, 프랜차이즈화된 기술로 저평준화할 우려가 있습니다. 국내 한식 기반이 다져져야 세계화의 베이스캠프 기능을 할 수 있습니다. 그게 진정 한식을 지키는 길입니다.”
내부 경쟁력이 곧 세계화
2014년 11월 30일 중국 칭다오에서 열린 ‘2014 한중 식문화 교류전’.
“아직까지는 일식 라면과 카레가 저렴하게 보편화되지 않았지만, 이런 음식이 쌀국수처럼 일상화되면 이야기가 달라집니다. 2000~3000원대에 끼니를 해결할 수 있는 해외의 저가형 외식 문화가 국내로 들어오면 영세식당은 줄줄이 문을 닫게 될 것입니다. 세계화에 앞서 내부 경쟁력을 키우는 게 먼저입니다. 국내 경쟁력이 강화되면 자연스레 해외에서의 경쟁력도 생기리라 봅니다. 또한 변형하지 않은 제대로 된 한식 레시피를 외국에 알리는 것도 중요합니다. 어설픈 퓨전 레시피가 아닌 제대로 된 레시피를 알려야 한다는 거죠.”
최현석 엘본더테이블 총괄셰프 역시 “퓨전 요리도 좋지만 전통을 고수하고 그걸 알리는 게 필요하다”며 “고추장으로 만든 요리를 선보였을 때 ‘고추장이 뭘까’ 궁금해할 수 있어야 하고, 전통 한식의 식감도 살려야 한다”고 말했다.
“프랑스 요리가 세계적으로 알려진 데는 네트워크 힘도 무시할 수 없습니다. 테이블 위에서만 논의할 게 아니라 실리적으로 챙길 것을 투두(to do) 리스트로 작성해 고민해야 합니다. 외국 셰프들과 이야기해보면 송이버섯을 일본어 그대로 ‘마쓰타케(マツタケ)’라고 합니다. 일본은 일본식 메뉴와 식재료를 알리는 작업을 대대적으로 하고 있어요. 우리도 국내 식재료를 떳떳하게 알리는 활동을 해야 합니다. 영화 ‘아메리칸 셰프’에 보면 고추장을 칠리 페이스트 소스라 하지 않고 그냥 고추장이라고 말하는데, 그걸 보면서 여러 생각이 들더라고요. 국내 한식 셰프뿐 아니라 다양한 분야의 셰프를 많이 알리는 것도 중요합니다. 어떤 셰프가 어떤 재료로 요리한다는 게 알려지면 그 나라, 요리, 문화에 대한 궁금증이 자연히 따라오거든요.”
지난해 11월 박 대통령과 셰프들의 오찬에 참석한 안정현 요리연구가는 당시 오찬에서 된장소스 전복구이를 선보였다. 안 연구가는 “외국인이 좋아하는 식재료인 전복과 우리 발효식품이 잘 조화될 수 있음을 보여준 것”이라며 “우리 전통 발효음식의 우수성에 대해 이야기했다. 외국 셰프들도 우리 발효식품에 많은 관심을 보였다”고 말했다.
“지난 정권에서는 영부인이 그랬다면, 지금은 대통령이 한식 세계화에 큰 관심을 보이고 있습니다. 일본 음식이 세계화되는 데 100년이 걸렸다고 합니다. 지금 정책들이 시행착오도 많지만 국가 지도자가 관심과 의지를 보여줘 관심을 불러일으키는 데는 기여했다고 보지만, 치밀한 전략과 실행이 부족한 점은 아쉽습니다. 일본은 음식을 문화 및 외교적 요소로 만들어 내보냅니다. 대사가 파견될 때 셰프도 함께 파견하는 식이죠. 대사관 행사에 오는 귀빈들은 셰프들이 제공하는 음식을 먹으면서 일본 음식 문화를 접합니다. 또한 각 나라 상류층에게 일본 음식을 맛보게 한 다음 대중화 수순을 밟은 덕에 20만 원짜리 스시와 2000원짜리 거리 스시가 공존하면서 세계인에게 일본 음식 문화를 전파할 수 있었던 거죠. 외국에도 일과성 행사가 아닌 전략적, 지속적으로 한식을 전파할 수 있는 우수 인력을 양성하고 배치해야 합니다. 국가에서 전략적으로 스타 셰프를 키워 안정 궤도에 올라설 때까지 지원해주는 정책도 필요합니다.”
강요하지 말고 보여주라
한식재단은 2월 3일 스페인에서 열린 ‘2015 마드리드퓨전’에 참가해 수정과 칵테일을 선보였다.
“한식이 제대로 발달하려면 한식의 정확한 분류가 전제돼야 합니다. 학문 대부분이 그렇듯 전통을 연구하는 사람과 이를 응용하는 집단이 있습니다. 한식도 전통 한식 보존과 한식 응용 보급으로 분류해 다뤄야 합니다. 국내에서는 한식 창작 요리, 한식 간편 상차림, 한식뷔페 등이 외식업체 인기 상위권을 차지하는데, 타국 음식 속에서 한식을 이해해야 합니다. 특히 ‘외식에서의 한식’은 프렌치식, 이탤리언식, 일식, 중식, 아시안식 등 여러 가지 공존 속에서 이해해야 합니다. 국내 외식업계에서도 한식만 발달한다면 한국 외식 문화는 편협해지고 글로벌하게 인정받기 어렵습니다. 한국의 일식, 한국의 프렌치식 등 다양한 음식의 수준이 높아지면서 한식도 그것과 어깨를 나란히 하는 게 중요합니다.”
한식 세계화 사업 자체를 비관적으로 보는 시선도 있다. 황교익 맛칼럼니스트는 “한식 세계화는 정부가 나서서 될 게 아니다”라고 일축했다. 또한 “음식은 문화이고 먹는 사람에 따라 끊임없이 변화한다. 음식은 먹는 사람이 결정하는 것이지, 국가 권력이 그걸 규정하고 억지로 확산하려 하는 건 말이 안 된다”고 말했다.
“한민족 유산을 만방에 알리고, 미국 뉴욕 한복판에 비빔밥이 소개된다고 하면 그걸 정책적으로 이용했을 경우 순간적으로 국민 표가 확 쏠릴 수는 있어요. 그렇기에 여야 가리지 않고 한식 세계화를 부르짖는 겁니다. 저는 한식 세계화 사업이 의미가 없다고 봅니다. 방향이 아니라 그 자체로 잘못됐다는 거죠. 어느 나라도 피자나 파스타, 쌀국수를 먹어보라고 강요하지 않습니다. 비빔밥이 맛있다고 공짜로 나눠준다 한들 이게 돈 주고 먹을 만한 음식인지는 소비자가 결정합니다. 국가에서 문화를 규정하려 해서는 안 됩니다.”
박정배 음식칼럼니스트는 “음식은 교류가 활발하고, 반도체를 생산하듯 만들어서 팔 수 있는 게 아니다. 수용자가 받아들이는 문화이기에 ‘우리 거 맛있으니 먹어봐라’가 아닌 ‘코리안 스타일이 이런 것’이라고 보여주고 수용하게 해야 한다”고 말했다.
“미국에서 만들어진 스팸은 본국에서 정크푸드 취급을 받지만 우리나라에서는 고기 대용으로 유용하게 쓰여요. 미국 식당에서 한국 사람이 ‘DMZ스튜’라는 이름의 부대찌개를 팔기도 하고요. 된장과 간장은 동북아에도 있으니 한국적 소스라고 하면 고추장이 유일할 것 같습니다. 세계적으로 유명한 일식당 노부에서 경력을 쌓고 자신만의 방식으로 한식을 만들어 주목받은 강민구 셰프나, 고추장으로 만든 스테이크와 파스타로 유럽에서 팬덤이 일어났던 안경석 셰프처럼 외국인이 수용할 수 있는 식자재에 우리 식자재를 녹여 접점을 찾고 음식을 이해할 수 있도록 만드는 과정이 필요합니다.”
덴마크 코펜하겐에 있는 레스토랑 ‘노마(Noma)’는 규모는 작지만 세계 요리업계 전문가들이 선정한 ‘세계 50대 식당’에서 2010~2012년, 2014년 1위를 차지할 정도로 맛에 정평이 난 곳이다. 북유럽에서 나는 식재료만 사용한다는 요리철학 덕에 다른 어디에서도 맛볼 수 없는 음식을 선보이는 게 인기 비결이다. ‘노마’의 음식을 1~2월 일본 도쿄에서 만날 수 있는데 재미있는 것은 지점을 내는 게 아니라 요리 및 서비스 인력을 전부 끌고 와 2개월 동안 한시적으로 팝업 레스토랑을 운영한다는 점이다. 박 칼럼니스트는 “전 세계 순회공연을 하듯 세계 각지를 돌며 자신들만 만들 수 있는 음식을 선보이는 ‘노마’의 사례는 음식 세계화에 대해 생각할 거리를 던져준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