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월 5일 오전 시민감시단 회원들이 경기 양주시 육군 28사단 군사법원에서 열린 윤모 일병 폭행 사망 사건 결심공판을 참관한 뒤 정문 앞에서 추모 메시지와 리본을 묶고 있다.
4월 8일 김관진 당시 국방부 장관은 백낙종 국방부 조사본부장으로부터 윤 일병이 가혹행위를 받아 사망했다는 보고를 받았다. 지속적인 구타와 엽기적인 가혹행위 등 구체적인 내용을 포함한 보고는 없었다는 게 군 당국의 설명이다. 부검 감정서에는 갈비뼈 골절과 뇌부종, 비장 파열과 장기 파열이 기록돼 있었지만, 군 당국은 선임병들에 대한 심리재판이 세 차례 진행되는 동안 유가족의 수사기록 요구에 응하지 않았다.
8월 1일 민간단체인 군인권센터가 전모를 공개할 때까지 ‘비공개’는 이어졌다. 5명의 사망자와 7명의 부상자를 낸 동부전선 22사단 총기 사고로 온 국민의 관심이 병영문제에 집중된 시점이었음에도 마찬가지였다. 6월 30일 취임한 한민구 국방부 장관에게 추가 보고도 없었다. 사건이 온 언론을 뒤덮은 8월 1일 국방부와 육군은 ‘누가 사과 주체가 될 것인가’를 두고 떠넘기기를 반복하며 마찰을 빚었다. 박근혜 대통령이 한 장관에게 직접 전화를 걸어 채근한 뒤에야 이튿날 비로소 각 군 참모총장 긴급회의가 소집됐다. 윤 일병 사망 114일 만의 일이었다.
끊임없이 사고가 이어지는 병영
1999년 신병영문화 창달방안, 2003년 병영생활 행동강령과 사고예방 종합대책, 2005년 선진병영문화 비전, 2012년 병영문화 선진화 방안. 군 내부에서 발생한 총기난사와 자살 사건이 언론지면을 장식할 때마다 군 당국이 내놓은 대책이다. 그러나 끊임없이 반복되는 사고와 폭로되는 병영 현실은 과연 한국군이 스스로 이 문제를 해결할 능력이 있는지 의구심을 갖게 만든다. 운영 방식 개선과 감시체계 강화만으로는 ‘내 자식을 맡길 수 있겠느냐’는 국민의 불신을 해소할 길이 없어 보인다. 더 근원적인 문제를 들여다봐야 한다는 지적이 힘을 얻는 이유다.
2005년 ‘미국정신의학회보’에 게재된 11개국 병영 내 자살자 통계를 보자. 병력 10만 명당 연평균 자살자 수가 해당 국가 20~24세 민간인 남성 자살자 수의 50%를 넘는 나라는 둘뿐이다. 러시아(76%)와 대만(73%). 공교롭게도 모두 징병제 국가였다. 다른 대부분 국가에서 군 내 자살률은 일반인 자살률의 3분의 1에 미치지 못했다. 러시아와 대만은 2010년 이후 모병제 전환 작업을 진행 중이다.
한국의 경우 이 수치는 최근 수년간 50% 안팎을 오간다. 징병제 국가 가운데도 유럽에서는 군 내 자살률이 극히 낮은 나라가 있지만, 모병제 국가 가운데 자살률이 한국보다 높은 나라는 찾기 어렵다. 중동 전황이 교착상태에 접어든 2007년 이후 군 내 자살자 수가 비약적으로 상승한 미국 정도만이 예외다.
전문가들은 이런 차이를 징병제가 가진 강제적 특성에서 찾는다. 스스로 자원해 입대한 병사와 강제로 징집된 병사 사이에는 동기 부여가 다를 수밖에 없다는 것. 병영 안에서 심각한 문제에 봉착할 경우 이직 등 ‘다른 대안’을 선택할 수 있고, 군 생활에 적합하지 않은 이들이 입대할 개연성이 크게 줄어든다는 점도 큰 차이다. 한국군 병영사고의 주원인으로 주목돼온 병사 간 내무생활의 어려움이 대부분 일과시간이 끝난 야간에 벌어졌다는 사실도 주목할 만하다.
모병제 군대는 과연 약한 군대일까. 미국 군사전문가 제임스 더니건의 분석에 따르면 2000년대 초 러시아, 대만, 한국 병력의 질적 수준은 각각 40%, 41%, 31%였다. 반면 각 지역 별로 최고점을 기록한 영국(77%)과 호주(54%), 남아프리카공화국(53%)은 모두 모병제 국가였다. 예외는 징병제를 유지하면서도 61%를 기록한 이스라엘뿐이다. 모병제 국가 병력이 더 오랜 기간 복무하며 전문성을 키울 수 있는 까닭에 질적 수준 역시 상승한다는 결론이다. 이러한 특징은 군사전략의 과학화와 기술화가 눈부신 속도로 진행된 21세기 들어 더욱 가속화할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이러한 이유로 세계 각국은 빠른 속도로 모병제 전환을 추진해왔다. 프랑스가 1996년 징병제 폐지를 공식 선언했고, 벨기에는 92년, 네덜란드는 93년, 이탈리아는 2005년 지원병제로 전환했다. 독일 역시 점차 복무기간을 축소해오다 2011년 완전 모병제로 전환했다. 이들 국가 역시 헌법에 ‘신성한 국방의 의무’를 규정하고 있지만, 징병제 체제가 가진 비효율이 정예 강군을 만드는 데 방해된다는 이유로 폐지를 결정한 것이다. 이제 남은 주요 징병제 국가는 남북한과 이스라엘 정도다.
윤모 일병 폭행 사망 사건 파문이 정점에 달한 8월 5일 청와대 국무회의에 참석한 김관진 국가안보실장(오른쪽 뒤)과 한민구 국방부 장관(왼쪽 끝).
이러한 흐름과 달리 한국 사회에서 모병제는 여전히 각광받는 논의 주제가 아니다. 자고나면 터지는 갖가지 사고와 부조리에도 모병제를 대안으로 꼽는 주장은 만나기 어렵다. 가장 큰 이유는 역시 비용 문제. 2014년 현재 44만에 달하는 병사 전체를 지원병으로 채우려면 상당한 예산 투입이 불가피하다는 것은 불문가지다.
이와 관련한 다양한 시나리오가 있지만, 2011년 발표된 한 연구는 당시 병력 규모와 계급 구조를 그대로 유지한 상황에서 모병제로 전환할 경우 매년 3조5184억 원이 추가로 필요하다고 분석한다. 현재의 인력 유지비 연 8조7950억 원의 40% 정도가 더 들어간다는 뜻이다. 이 무렵 국방부가 2020년을 목표로 세운 계획대로 부사관 비율을 늘릴 경우 추가예산은 5조1743억 원까지 늘어난다.
문제는 병력 규모다. 인구 대비 병력 수를 프랑스에 맞춰 27만 내외로 조정하면 부사관 비율을 높인 후에도 매년 1조 원 이상이 오히려 남는다. 미국에 맞춰 22만 내외로 감군할 경우에는 3조 원이 넘게 남아 전력투자비로 돌릴 수 있다. 현재 쓰는 인력 유지비만으로 모병제를 실시할 경우, 가능한 최대치는 간부 9만 명과 병사 26만 명, 총 35만 안팎 병력이다. 3월 국방부가 2022년을 목표로 추진하겠다고 발표한 국방개혁 기본계획보다 17만 명을 더 줄여야 비용 증가 없이 모병제 전환이 가능해진다는 뜻이다.
여기까지만 놓고 보면 모병제 논의는 ‘쓸데없는 일’에 가깝지만, 국가 전체의 기회비용을 놓고 보면 이야기는 완전히 달라진다. 특히 엄청난 속도로 불어난 한국의 1인당 국민소득은 그전과는 판이한 계산 결과를 보여준다. 현재 각 군 병사의 평균 월급은 상병 기준으로 14만 원이 조금 넘는 수준. 19%만이 고졸 이하, 81%는 대학 재학 중이거나 졸업자다. 이들이 군 복무를 하지 않고 노동시장에 남아 있었다면 받을 수 있는 임금은 9조 원을 훌쩍 넘는다. 눈에 보이지 않으므로 신경 쓰지 않을 뿐, 징병제로 인해 국가경제 전체가 지불하는 비용이 이 정도 규모라는 것이다.
이 때문에 2010년 발표된 또 다른 연구는 보이지 않는 비용까지 감안하면 오히려 모병제가 징병제보다 매년 1조8000억~3조1000억 원 저렴한 제도라고 말한다. 언뜻 모병제가 훨씬 값비싸 보이지만, 국가 전체 차원에서 보자면 오히려 징병제가 더 부담이 크다는 것이다. 경제학자 대부분이 모병제가 한층 효율적인 선택이라고 말하는 이유다.
징병제가 만들어낸 또 다른 문제점에는 막대한 대체복무 인력이 있다. 각 기업체와 행정기관이 산업기능요원이나 공익근무요원 형태로 6만~7만 명 규모에 달하는 대체복무 인원을 헐값에 활용하고 있다. 이들 사이의 형평성 문제도 심각하다. 현역 병사는 사회에서 일했다면 받을 수 있었을 평균 임금 대부분을 국가에 현물세로 납부하고 있는 셈으로, 최저임금 이상을 받는 산업기능요원이나 임금 및 경력 모든 측면에서 불이익이 적은 석·박사급 전문연구요원에 비해 크게 손해다. 현역 출신 남성이 군필자 가산점제 같은 상징적 반대급부에도 크게 매달리게 된 원인이다.
‘싼 맛에 인력을 쉽게 쓰는’ 이러한 폐단은 군 내부에서도 고스란히 벌어진다. 역대 정부마다 발표했던 군 구조개혁 청사진이 이해관계에 떠밀려 하염없이 늦춰진 것이 대표적이다. 일각에서 “군 당국이 모병제 논의를 경계하는 이유는 결국 병력 규모 조정이 간부들의 ‘자리 축소’로 이어질 것이라 염려하기 때문”이라는 비판이 나오는 배경이다.
이제부터라도 차근차근 논의를
서울 영등포구 신길동 서울지방병무청에서 징병검사 대상자들이 신체검사를 받고 있다.
모병제 도입에 대한 가장 큰 염려 역시 경제적 계층에 따른 사회적 균열을 더욱 심화하는 부작용이 나타날 수 있다는 점이다. 쉽게 말해 ‘가난한 사람만 군대 가라는 소리냐’는 반론이다. 모병제를 실시하는 미국도 고학력 입대자는 손가락을 꼽을 정도다. 한 연구에 따르면 미 의회 의원 가운데 자녀가 군에 입대한 경우는 2%에 불과했고, 2004년 뉴욕의 자원입대자 중 70%가 저소득층 출신의 유색인종이었다.
국민개병제라는 ‘신성한 원칙’이 무너질 경우 안보 분야의 민주화가 흔들릴 수 있다는 우려도 나온다. 관련 정책 결정이 국민과는 상관없는 군의 특수 영역으로 고착화하면 병력 희생을 가볍게 여기는 부작용마저 발생할 수 있다는 것. 2000년대 이후 해외 파병 등 한국의 주요 군사정책 결정 과정이 국민의 높은 관심을 받았던 것은 ‘아들을 군대에 보낸 어머니들’ 덕분 아니었느냐는 반문이다.
결국 징병제냐 모병제냐의 문제는 ‘국민개병주의’라는 신념의 위력이 징병제가 안고 있는 갖가지 비효율보다 크냐 작으냐라는 질문으로 요약된다. 한국의 안보 현실에서 대규모 병력감축이 과연 가능한가, 혹은 모든 경제활동인구가 1인당 연평균 50만 원 안팎까지 추가 세금을 부담할 수 있는가 하는 문제도 빼놓을 수 없다.
분명한 것은 병역제도는 선택의 문제일 뿐, 항고불변의 정답이 정해져 있는 건 아니라는 사실이다. 비효율적인 군 구조가 양산해낸 안보적, 사회적 문제점과 한국의 경제 수준을 감안할 때 더는 모병제를 선택지에서 지워둘 이유가 없다는 뜻이다. 1973년 미국이 징병제 폐지를 결정할 때까지 백악관의 주인을 바꿔가며 진행한 특별위원회 차원의 논의 기간은 무려 6년이었다. 우리가 과연 이에 대한 고민을 계속 미뤄둘 이유가 있을까. ‘충격요법’이 아니고서는 좌절을 반복해온 군 개혁을 강제할 방법이 없어 보이는 현실을 감안하면 더욱 그렇다.
참고자료 | ‘모병제 도입과 국방인력비용의 추정에 대한 연구’(2011), ‘병역의무부담의 형평성과 군필자 가산점제도’(2011), ‘미국의 모병제 도입 연구’(2012), ‘국방인적자원의 충원모델 전환에 따른 사회경제적 효율성 분석에 관한 연구’(2010), ‘모병제에 관한 비교법적 고찰’(2014), ‘Suicides and Suicide Attempts in the U.S. Military, 2008~2010’(2013), ‘Trends in Suicide Rates among Military Conscripts’(1992), ‘Suicide among Regular-duty Military Personnel’(2005), ‘How to Make War’(20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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