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퇴근 시간에 입석승객을 태워 문제가 되고 있는 수도권 광역버스(왼쪽)와 5월 2일 서울메트로 2호선 상왕십리역에서 발생한 추돌 사고로 파손된 열차.
익명을 요구한 한 방재전문가는 우리 사회의 ‘안전불감증’에 대해 묻는 질문에 한숨부터 내쉬었다. 세월호 침몰 후 한 달이 지났지만, 안전보다 다른 가치를 중요하게 여기는 사회 분위기는 변하지 않았다는 지적이다. 그는 “우리 사회는 여전히 목표지상주의에 빠져 있다. 원칙은 뒷전이다. ‘어떤 상황에서든 사람의 생명과 안전을 지키는 게 최우선’이라고 말하는 걸 불편하고 이상하게 여기니, 누구 하나 내놓고 말을 못 한다”고 했다.
안전을 중요하지 않게 여기는 경향은 도로에서도 쉽게 확인할 수 있다. 교통흐름이 원활할 때 안전속도를 지키는 운전자는 운전에 서툰 이른바 ‘김 여사’ 취급을 당한다. 승객들이 “바쁘다”며 택시기사에게 과속을 주문하는 일도 흔하다. 이 과정에서 교통사고가 빈발한다.
목표지상주의에 매몰된 사회
서울 은평구 한 고교 별관 벽에 생긴 균열을 이 학교 직원이 손으로 가리키고 있다.
정홍원 국무총리는 5월 8일 국가정책조정회의를 주재하면서 “후진적 사고의 악순환을 근원적으로 뿌리 뽑으려면 안전관리체계를 환골탈태 수준으로 개선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그러나 현실에서는 모두 다 아는 위험 환경조차 개선되지 않는 게 허다하다. 입석승객을 잔뜩 채운 채 고속도로를 운행하는 수도권 광역버스도 대표적인 사례다.
한국교통연구원 조사에 따르면 현재 서울과 수도권 주요 도시를 오가는 광역버스 주요노선의 출퇴근 시간 승차인원은 정원의 150% 수준이다. 버스마다 약 20명이 안전벨트 등 최소한의 안전장치조차 없이 고속도로 위를 오간다. 정부는 세월호 침몰 이후 우리 사회의 안전실태를 점검하는 과정에서 광역버스의 입석승객 승차를 단속하려 했지만, 시민 반발에 밀려 실행하지 못했다. 이에 대해 김기복 시민교통안전협회장은 “출퇴근 시간에 승객은 몰리고 버스 좌석은 한정돼 있으니 발생하는 일”이라며 “시민들도 사고 위험을 알지만 절박한 마음으로 버스에 올라타는 것”이라고 밝혔다.
출퇴근 광역버스 불법주행
당초 정부는 5월 초까지 이에 대한 해결책을 내놓겠다고 밝혔다. 그러나 버스회사 측에 고속도로 이용 시 안전속도를 지켜줄 것을 당부하는 것 외엔 별다른 조치를 취하지 못한 상태다. 모창환 한국교통연구원 연구위원은 “광역버스는 출퇴근 시간에만 승객이 몰리고 낮 시간엔 상대적으로 이용객이 적다. 민간 기업인 버스회사가 증차를 할 리 없으니, 승객들은 서서라도 버스를 탈 수밖에 없는 것”이라며 “이 문제를 근본적으로 해결하려면 지방자치단체가 버스회사의 적자를 메워주는 등 버스의 공공성을 확대하는 방안을 마련해야 한다. 정책당국의 결단이 필요하다”고 밝혔다.
지하철 역사 내 대피 시스템도 수차례 지적됐지만 개선되지 않는 사례 중 하나다. 건설교통부의 지하철역 설계지침에 따르면 지하철역은 내부에서 화재가 발생했을 때 승객이 4분 내에 승강장에서 벗어나고 6분 내에 외부 출입구 밖으로 나갈 수 있도록 설계돼야 한다. 그러나 2010년 감사원 감사 결과 지하철 5~8호선 역사 148곳 가운데 95곳(64%)이 대피시간을 초과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지난해 조사에서도 1∼9호선 역사 271곳 중 80곳(29.5%)이 기준에 부합하지 못했다. 그러나 5월 2일 서울메트로 2호선 상왕십리역에서 발생한 추돌사고로 200여 명이 부상하는 등 지하철 사고가 연이어 발생하는데도 지하철 역사 구조 변경은 이뤄지지 않고 있다.
관건은 돈이다. 전문가들은 그동안 정부가 재난관리 예산을 해마다 줄이는 등 국민 안전 보호를 상대적으로 소홀히 여겼고, 그 때문에 사회 곳곳에 위험 요인이 방치돼 있다고 지적한다. 조원철 연세대 방재안전관리연구센터장(교수)은 “정부와 국회는 그동안 안전 분야 예산 투입을 낭비로 여겼다. 안전은 공짜로 얻어지는 게 아니며, 미래세대를 위해 당장 결과물이 나오지 않아도 꾸준히 투자해야 한다는 인식이 확산돼야 한다”고 말했다.
위기 대응 교육 및 훈련 허술
5월 12일 충남 아산시 둔포면에서 완공을 앞두고 돌연 옆으로 기울어진 오피스텔 건물. 경찰은 안전조사를 한 뒤 이 오피스텔을 철거하기로 결정했다.
현재 우리나라의 위기 대응 교육 및 훈련은 문제가 많다는 것이 전문가들의 대체적인 평가다. 기업재난관리자 양성기관 ㈜차후의 이원호 본부장은 “우리나라는 통합방위훈련(통합방위법), 민방위훈련(민방위기본법), 비상대비훈련(비상대비자원 관리법), 재난대비훈련(재난 및 안전관리 기본법), 소방교육훈련(소방기본법) 등 각종 훈련이 법령별, 기관별, 분야별로 나뉘어 있어 국가 전체로 보면 체계적인 시스템이 없다. 각종 훈련이 실제 재난 상황과 동떨어진, 형식적인 내용에 그치는 것도 문제”라고 지적했다. “특히 재난 발생 시 현장을 책임져야 할 지휘권자가 훈련에 직접 참여하지 않고 VIP 관람자 정도로 머무는 현상은 시급히 개선해야 할 악습”이라는 게 그의 주장이다.
반면 미국은 재난관리를 국가안보와 같은 영역으로 취급하고, ‘국토안보훈련 및 평가 프로그램’(HSEEP·The Homeland Security Exercise and Evaluation Program)을 마련해 체계적인 교육과 훈련을 반복한다. 재난대비 훈련 유형은 크게 토론과 실행으로 구분하며, 토론기반 훈련은 다시 세미나, 워크숍, 도상훈련, 게임 등으로, 실행기반 훈련은 다시 훈련(drill), 기능훈련, 전면실전훈련으로 나눈다. 이원호 본부장은 “미국은 이 프로그램을 ‘위험이 없는 상태에서 보호, 예방, 복구역량을 높이기 위해 교육하고 연습하는 도구’라고 정의한다. 이런 훈련을 계속하는 이유는 재난이 발생했을 때 신속히 대응해 피해를 최소화하기 위한 것”이라고 설명했다.
차가 빼곡히 주차돼 있어 위급상황 발생 시 소방차 진입이 불가능해 보이는 서울 시내 한 골목길(위)과 재난위험시설로 판정된 서울 은평구 한 고교 담장. 이 담장에는 큰 구멍이 나 있고, 조금만 건드려도 돌 조각이 떨어진다.
노후 학교건물 보수 목소리
노후화해 붕괴 위험이 있는 학교건물을 조속히 보수해야 한다는 목소리도 높아지고 있다. 국회 교육문화체육관광위원회 소속 새누리당 서상기 의원이 교육부로부터 제출받은 ‘2012∼2013년도 재난위험시설 증감 및 조치 현황’에 따르면 전국 초중고교 건물 중 123개가 재난위험시설이다. 이 중 121개는 ‘긴급한 보수, 보강이 필요하며 사용 제한 여부를 결정해야 하는’ 상태, 나머지 2개는 ‘주요 부재에 발생한 심각한 결함으로 시설물의 안전에 위험이 있어 즉각 사용을 금지하고 보강 또는 개축해야 하는 상태’로 판정됐다. 그러나 이 중 상당수는 여전히 학생들의 생활공간으로 쓰이고 있다. 세월호 침몰 후 너도나도 ‘안전’을 강조하고, 국무총리가 안전관리체계를 ‘환골탈태’ 수준으로 개선하겠다고 밝힌 뒤에도 진행 중인 비극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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