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름은 여러 번 바뀌었지만 자유한국당이나 더불어민주당이나 선거 때마다 참모들이 늘 하는 얘기가 있다. “저쪽보다만 잘하면 돼.” 어차피 국민에게 주어진 선택지는 뻔하다. 유권자도 대개 “A당이 마음에 안 드는데 B당은 더 싫어서”라며 A당을 찍는다. 그러다 보니 상대의 실책을 잘 공격하는 게 가장 큰 선거 전략이기도 하다.
프랑스도 그랬다. 우파 공화당과 좌파 사회당은 1958년 이후 60년 동안 “저쪽보다만 잘하면 돼”라는 논리로 버텨왔다. 그러다 5월 대선, 6월 18일 총선을 거치면서 그 공식은 산산조각이 났다. 공화당과 사회당 대선후보는 프랑스 특유의 정치 제도인 상위 2명만 치르는 결선투표에 아무도 올라가지 못했다. 총선 결과 전체 577석에서 공화당과 사회당이 차지한 의석수는 142석뿐이다.
마크롱 대통령의 성공 전략은 물갈이다. 자유한국당도 공천 때마다 40% 안팎의 인물을 교체한다. 그러나 수치만 높을 뿐 따지고 보면 계파 논리에 따라 투입되는, 그 나물에 그 밥이다. 마크롱 대통령은 공천자의 50%를 정치에 무관한 신인으로 배치했다. 의사, 투우사, 수학자, 농부 등 출신 직업이 다양한 이들은 대체로 지역에서 시민사회활동이나 봉사활동을 오래해온 이들이다. 현역의원에 비해 낮은 인지도를 지역활동으로 채운 셈이다. 실제로 속을 들여다보면 마크롱 대통령이 이끄는 당인 ‘레퓌블리크 앙마르슈’(앙마르슈)의 민주성은 상당히 떨어진다. 이들은 대부분 마크롱 대통령으로부터 출마 제안을 받았다고 했다. 공천위원회가 1월부터 구성됐지만 결국 ‘마크롱 키즈’인 셈이다. 그러나 이에 대한 프랑스 언론의 비판은 거의 없다. 마크롱 키즈가 구태의연한 정치인보다 낫다는 국민 여론이 뒷받침하고 있기 때문이다. 실제로 현역의원 74.8%가 이번 총선에서 살아남지 못했다.
한국 보수는 총선 때마다 늘 제도와 형식에 집착한다. 공천위원회를 꾸리고 외부 공천위원을 영입하며 공천 기준을 세운다. 그러나 이는 형식에 불과할 뿐 실제로는 최대 계파가 대다수를 공천하고, 나머지 계파가 나눠 먹기를 한다는 게 국민의 인식이다. 국민에겐 그럴 듯한 과정보다 결과가 더 중요하다. 늘 공천할 여성 후보가 없다고 투덜대는 보수 정당이지만, 앙마르슈가 공천한 여성 후보 절반 이상이 당선했다. 마크롱 대통령의 내각을 보면 더욱 치밀하다. 내각 인선 한 명 한 명마다 자신의 국정운영에 대한 철학과 메시지가 담겨 있다. 마크롱 대통령은 내각 역시 절반을 여성으로 임명했다. 그중 눈에 띄는 점이 국방장관에 여성을 배치한 것이다. 디지털장관에는 가난한 이민자 청소부 부모 밑에서 자란 33세의 젊은 피를 임명했다. 이런 파격적인 스토리는 기존 대통령과 다른 변화로, 여론의 지지를 받았다.
국무총리와 경제장관 라인은 우파 공화당 출신으로 임명했다. ‘프랑스병’이라 부르는 강성 노조 및 파업의 고리를 끊고, 친기업 성향의 노동개혁을 통해 일자리 창출과 경제 살리기에 나서겠다는 강한 의지가 인선에서도 그대로 드러났다. 그러나 정작 국정운영의 핵심 자리인 내무, 외교, 법무장관은 60대 이상의 노련한 정치인 출신 측근들로 채웠다. 국정 중심은 안정적으로 지키겠다는 의도다. 여론이 좋아할 만한 인물로 명분을 쌓으면서 국민에게는 경제 살리기 메시지를 던지고, 또 자기 측근들도 챙겨 실리까지 얻는 인선이었다.
마크롱 대통령은 좌도 우도 아닌, 중도를 표방한다. 하지만 실제 뿌리는 사회당이다. 그는 사회당 정부에서 대통령 경제보좌관을 거쳐 경제장관까지 지냈다. 그의 인맥도 사회당이 많다. 실제 이번 총선에서 사회당 지지자가 주로 앙마르슈를 찍었다. 그러나 그 뿌리를 훼손하지 않는 범위에서 마크롱 대통령은 철저히 외연 확장을 택했다.
한국 보수 정당은 결정적 순간에 늘 이념으로 되돌아간다. 실제로는 보수의 가치를 지키되 상대를 배타하는 강압적 이미지가 아닌, 포용하는 이미지를 만드는 지혜가 필요한 대목이다. 그런 측면에서 마크롱 대통령의 가장 큰 장점은 여론에 민감하다는 것이다. 그는 총선 승리 직후 자신이 연대를 맺고 있는 ‘민주운동당’ 출신 장관을 모두 물러나게 했다. 프랑수아 바이루 법무장관, 실비 굴라르 국방장관 등이 보좌관을 허위 채용했다는 논란에 휩싸이자 털어낸 것이다. 그러면서 정부 대변인은 “이제는 일해야 할 때”라고 했다. 정치적 논란에 휩싸여 시작도 못 해보고 힘이 빠지기 전에 용단을 내린 것이다. 지난 보수 정권에서는 인사 검증 과정 또는 업무 진행 과정에서 문제가 제기돼 여론이 악화돼도 끝까지 밀어붙이는 경우가 많았다. 그때 힘을 다 빼다 보니 정작 그들이 열심히 일할 때는 여론이 이미 싸늘하게 식어버린 뒤였다. 자존심 싸움만 벌이다 실익을 잃는 일이 반복됐다.
노동개혁의 경우 마크롱 대통령은 당선되고 바로 그다음 주에 최대 노조단체와 경영자 단체 8곳을 엘리제궁으로 불러 노동개혁에 대해 설명하고 그들의 이야기를 들었다. 아침 9시부터 저녁 7시까지 차례대로 한 명씩 부르고, 그들이 나갈 때마다 배웅한 뒤 엘리제궁 마당에서 브리핑까지 하게 했다. 무작정 강요하지 않는 소통의 이미지가 강해졌다. 그런데 실제로 마크롱 대통령은 내심 올여름 이후 강성 노조와 전쟁을 염두에 두고 있다. 7, 8월 이들이 바캉스를 떠날 때 밀어붙여 9월까지 노동개혁을 완수하겠다는 계획이다. 하고 싶은 일을 이루고자 하기 싫은 일을 미리 해놓는 마크롱 대통령의 전략이라 볼 수 있다.
마크롱 돌풍이 처음 불었을 때 우파 공화당 중진들은 방송 시사프로그램에 나와 “오래 못 갈 것이다. 막상 국정을 운영해보면 얼마나 어려운지 알게 될 것”이라고 조롱했다. 그러나 정작 그들 중 상당수는 아예 국회에서 사라졌다. 정권을 내주고 자유한국당과 바른정당으로 쪼개진 우리 보수 정당들은 여기서 한 번만 더 삐끗하면 아예 흔적도 없이 사라질 수 있다. 직전 프랑스 대선에서 정권을 창출하고 311석 의석수를 차지했던 사회당은 5년 만에 사실상 앙마르슈에 흡수돼 흔적조차 찾기 어려워졌다.
프랑스도 그랬다. 우파 공화당과 좌파 사회당은 1958년 이후 60년 동안 “저쪽보다만 잘하면 돼”라는 논리로 버텨왔다. 그러다 5월 대선, 6월 18일 총선을 거치면서 그 공식은 산산조각이 났다. 공화당과 사회당 대선후보는 프랑스 특유의 정치 제도인 상위 2명만 치르는 결선투표에 아무도 올라가지 못했다. 총선 결과 전체 577석에서 공화당과 사회당이 차지한 의석수는 142석뿐이다.
총선 성공 제1전략은 물갈이
국민에게 새로운 선택지를 들이민 이는 정치 경험이 전무한 40세 에마뉘엘 마크롱 대통령. 마크롱 대통령은 대선 출마를 선언한 지 6개월, 창당한 지 1년 만에 프랑스 정치판을 휩쓸었다. 반면 승승장구할 것 같던 테리사 메이 영국 총리가 이끄는 보수당은 6월 8일 총선에서 과반수가 무너져 추락하고 있다. 최순실 국정농단 사태로 뿌리까지 흔들리고 있는 한국 보수 진영에게 이 두 사례는 시사하는 바가 크다.마크롱 대통령의 성공 전략은 물갈이다. 자유한국당도 공천 때마다 40% 안팎의 인물을 교체한다. 그러나 수치만 높을 뿐 따지고 보면 계파 논리에 따라 투입되는, 그 나물에 그 밥이다. 마크롱 대통령은 공천자의 50%를 정치에 무관한 신인으로 배치했다. 의사, 투우사, 수학자, 농부 등 출신 직업이 다양한 이들은 대체로 지역에서 시민사회활동이나 봉사활동을 오래해온 이들이다. 현역의원에 비해 낮은 인지도를 지역활동으로 채운 셈이다. 실제로 속을 들여다보면 마크롱 대통령이 이끄는 당인 ‘레퓌블리크 앙마르슈’(앙마르슈)의 민주성은 상당히 떨어진다. 이들은 대부분 마크롱 대통령으로부터 출마 제안을 받았다고 했다. 공천위원회가 1월부터 구성됐지만 결국 ‘마크롱 키즈’인 셈이다. 그러나 이에 대한 프랑스 언론의 비판은 거의 없다. 마크롱 키즈가 구태의연한 정치인보다 낫다는 국민 여론이 뒷받침하고 있기 때문이다. 실제로 현역의원 74.8%가 이번 총선에서 살아남지 못했다.
한국 보수는 총선 때마다 늘 제도와 형식에 집착한다. 공천위원회를 꾸리고 외부 공천위원을 영입하며 공천 기준을 세운다. 그러나 이는 형식에 불과할 뿐 실제로는 최대 계파가 대다수를 공천하고, 나머지 계파가 나눠 먹기를 한다는 게 국민의 인식이다. 국민에겐 그럴 듯한 과정보다 결과가 더 중요하다. 늘 공천할 여성 후보가 없다고 투덜대는 보수 정당이지만, 앙마르슈가 공천한 여성 후보 절반 이상이 당선했다. 마크롱 대통령의 내각을 보면 더욱 치밀하다. 내각 인선 한 명 한 명마다 자신의 국정운영에 대한 철학과 메시지가 담겨 있다. 마크롱 대통령은 내각 역시 절반을 여성으로 임명했다. 그중 눈에 띄는 점이 국방장관에 여성을 배치한 것이다. 디지털장관에는 가난한 이민자 청소부 부모 밑에서 자란 33세의 젊은 피를 임명했다. 이런 파격적인 스토리는 기존 대통령과 다른 변화로, 여론의 지지를 받았다.
국무총리와 경제장관 라인은 우파 공화당 출신으로 임명했다. ‘프랑스병’이라 부르는 강성 노조 및 파업의 고리를 끊고, 친기업 성향의 노동개혁을 통해 일자리 창출과 경제 살리기에 나서겠다는 강한 의지가 인선에서도 그대로 드러났다. 그러나 정작 국정운영의 핵심 자리인 내무, 외교, 법무장관은 60대 이상의 노련한 정치인 출신 측근들로 채웠다. 국정 중심은 안정적으로 지키겠다는 의도다. 여론이 좋아할 만한 인물로 명분을 쌓으면서 국민에게는 경제 살리기 메시지를 던지고, 또 자기 측근들도 챙겨 실리까지 얻는 인선이었다.
마크롱 대통령은 좌도 우도 아닌, 중도를 표방한다. 하지만 실제 뿌리는 사회당이다. 그는 사회당 정부에서 대통령 경제보좌관을 거쳐 경제장관까지 지냈다. 그의 인맥도 사회당이 많다. 실제 이번 총선에서 사회당 지지자가 주로 앙마르슈를 찍었다. 그러나 그 뿌리를 훼손하지 않는 범위에서 마크롱 대통령은 철저히 외연 확장을 택했다.
하기 싫은 일을 먼저 한다
그가 대통령 취임 후 가장 역점을 둔 부분은 테러에 대한 강력한 대처다. 국가대테러센터를 설치하고 경찰의 권한 강화를 추진하고 있다. 좌파 정부는 안보에 취약해 그동안 테러를 막지 못했다는 지적을 피하기 위해서다. 그 대신 이민자를 제한하자는 극우 측 주장에는 단호히 대처하며 마지노선을 지키고 있다. 또 온건한 공화당 인사를 대거 포섭해 공화당을 강성 우파 인사들이 자연스레 주도하게 함으로써 점점 고립되는 형국을 만들었다. 마크롱 대통령은 이들 공화당 인사들로 하여금 노동개혁을 주도하게 해 공화당이 반대하기도 어려운 구도를 형성했다.한국 보수 정당은 결정적 순간에 늘 이념으로 되돌아간다. 실제로는 보수의 가치를 지키되 상대를 배타하는 강압적 이미지가 아닌, 포용하는 이미지를 만드는 지혜가 필요한 대목이다. 그런 측면에서 마크롱 대통령의 가장 큰 장점은 여론에 민감하다는 것이다. 그는 총선 승리 직후 자신이 연대를 맺고 있는 ‘민주운동당’ 출신 장관을 모두 물러나게 했다. 프랑수아 바이루 법무장관, 실비 굴라르 국방장관 등이 보좌관을 허위 채용했다는 논란에 휩싸이자 털어낸 것이다. 그러면서 정부 대변인은 “이제는 일해야 할 때”라고 했다. 정치적 논란에 휩싸여 시작도 못 해보고 힘이 빠지기 전에 용단을 내린 것이다. 지난 보수 정권에서는 인사 검증 과정 또는 업무 진행 과정에서 문제가 제기돼 여론이 악화돼도 끝까지 밀어붙이는 경우가 많았다. 그때 힘을 다 빼다 보니 정작 그들이 열심히 일할 때는 여론이 이미 싸늘하게 식어버린 뒤였다. 자존심 싸움만 벌이다 실익을 잃는 일이 반복됐다.
노동개혁의 경우 마크롱 대통령은 당선되고 바로 그다음 주에 최대 노조단체와 경영자 단체 8곳을 엘리제궁으로 불러 노동개혁에 대해 설명하고 그들의 이야기를 들었다. 아침 9시부터 저녁 7시까지 차례대로 한 명씩 부르고, 그들이 나갈 때마다 배웅한 뒤 엘리제궁 마당에서 브리핑까지 하게 했다. 무작정 강요하지 않는 소통의 이미지가 강해졌다. 그런데 실제로 마크롱 대통령은 내심 올여름 이후 강성 노조와 전쟁을 염두에 두고 있다. 7, 8월 이들이 바캉스를 떠날 때 밀어붙여 9월까지 노동개혁을 완수하겠다는 계획이다. 하고 싶은 일을 이루고자 하기 싫은 일을 미리 해놓는 마크롱 대통령의 전략이라 볼 수 있다.
마크롱 돌풍이 처음 불었을 때 우파 공화당 중진들은 방송 시사프로그램에 나와 “오래 못 갈 것이다. 막상 국정을 운영해보면 얼마나 어려운지 알게 될 것”이라고 조롱했다. 그러나 정작 그들 중 상당수는 아예 국회에서 사라졌다. 정권을 내주고 자유한국당과 바른정당으로 쪼개진 우리 보수 정당들은 여기서 한 번만 더 삐끗하면 아예 흔적도 없이 사라질 수 있다. 직전 프랑스 대선에서 정권을 창출하고 311석 의석수를 차지했던 사회당은 5년 만에 사실상 앙마르슈에 흡수돼 흔적조차 찾기 어려워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