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도 많고 탈도 많았던 울리 슈틸리케(63·독일) 감독이 6월 15일 결국 한국 축구대표팀 지휘봉을 내려놨다. 경질론이 불거질 때마다 “난 떠나면 그만이다. 감독을 중도에 교체했을 때 어떤 효과를 얻을 수 있는지 과거 사례를 되돌아볼 필요가 있다”며 끝까지 자리를 지키려 했던 그는 자진사퇴가 아닌 계약해지, 즉 대한축구협회로부터 해고된 뒤 한국을 떠났다.
2018 러시아월드컵 아시아 최종예선 카타르와 8차전에서 2-3로 패한 후 슈틸리케 감독은 경질을 충분히 예상했음에도 자진사퇴 퇴진 대신 해고의 칼날을 선택했다. 계약 만료 기간인 내년 6월까지 연봉을 챙기는 반대급부를 노린 것이다. 잔여 연봉은 20억 원을 약간 밑도는 것으로 알려졌다.
반복되는 한국 축구 사령탑 수난사
영광스럽지만 엄청난 압박과 책임감에 시달리는 자리. 대한민국 축구대표팀 감독은 잘하면 영웅이 되지만 성적이 조금만 나빠도 호된 질책을 피할 수 없다. ‘독이 든 성배’라 부르는 이유다. 비단 슈틸리케뿐 아니라 옛 사령탑의 사례를 봐도 그렇다.2002 한일월드컵에서 한국 축구에 4강 신화라는 큰 선물을 안겨준 거스 히딩크(전 첼시FC 감독) 이후 슈틸리케까지 한국 축구대표팀을 이끌었던 9명(움베르투 코엘류, 요 본프레레, 딕 아드보카트, 핌 베어벡, 허정무, 조광래, 최강희, 홍명보, 울리 슈틸리케) 중 임기를 채운 감독은 딕 아드보카트(2006 독일월드컵), 허정무(2008~2010), 최강희(2014 브라질월드컵 예선) 등 3명에 불과하다. 그마저도 허정무(62) 한국프로축구연맹 부총재만 월드컵 첫 원정 16강 진출로 명예롭게 감독직을 떠났다. 나머지 2명은 경질되거나(최강희), 자진사퇴 형식으로 불명예 퇴진했다(아드보카트).
히딩크가 박수를 받으며 떠난 이후 한국 축구의 선장이 된 이는 포르투갈 출신인 움베르투 코엘류(2003년 2월~2004년 4월)였다. 그러나 전임 감독의 그림자가 커서인지 오래 버티지 못했다. 2003년 10월 약체 오만과 원정에서 패하는 등 졸전을 거듭한 끝에 1년 2개월 만에 물러났다. 바통을 이어받은 요 본프레레(2004년 6월~2005년 8월)는 독일월드컵 본선행 티켓을 획득해 제 나름 성과를 냈지만 내용면에서 부족하다는 평가를 받아 월드컵 개막을 10개월 앞두고 퇴장했다.
짧은 임기를 채운 아드보카트(2005년 10월~2006년 6월)에 이어 그 밑에서 수석코치를 했던 핌 베어벡(2006년 7월~2007년 8월)이 바통을 넘겨받았지만 그는 2007 아시안컵에서 저조한 득점력으로 비판받은 뒤 스스로 옷을 벗었다.
히딩크 이후 4명의 외국인 감독에게 지휘봉을 맡기고도 효과를 보지 못하자 다시 국내파 감독에게 기회가 갔다. 허정무(2008년 1월~2010년 6월)는 성공적으로 임기를 마무리했다. 2010 남아공월드컵에서 사상 첫 원정 16강 신화를 쓴 그는 히딩크 이후 가장 성공한 감독이라는 평가를 받으며 명예롭게 임기를 마쳤다.
이후 대표팀 지휘봉을 잡은 조광래(2010년 7월~2011년 12월)는 A매치 12승6무3패라는 나쁘지 않은 성적을 거뒀으나 브라질월드컵 아시아지역 예선 레바논전 패배를 빌미로 1년 4개월 만에 경질됐다. 성적 부진이라는 표면적 이유가 붙었지만, 사실상 선수 선발 과정에서 대한축구협회 수뇌부와 갈등이 주요 원인이라는 것이 당시 축구계 안팎의 관측이었다.
‘시한부 사령탑’을 자처한 최강희(2011년 12월~2013년 6월)는 브라질월드컵 본선행을 이룬 뒤 대표팀 지휘봉을 월드컵 4강 신화 주역인 홍명보(2013년 6월~2014년 7월)에게 넘겨줬다. 2012 런던올림픽 동메달을 일구는 등 현역 시절 명성에 이어 지도자로서도 탄탄대로를 달리던 홍명보 역시 쓴맛을 봤다. 2014 브라질월드컵 본선 참패로 여론의 뭇매를 맞았던 그는 대한축구협회의 재신임을 받기도 했으나 결국 자진사퇴 형식으로 옷을 벗었다.
이후 슈틸리케(2014년 9월~2017년 6월)는 역대 외국인 사령탑 가운데 최장인 2년 9개월여에 걸쳐 지휘봉을 잡았지만 역시 끝이 아름답지 못했다. 월드컵 본선 경험이 전혀 없는 ‘3류 감독’으로 평가받던 그는 2014년 9월 한국 축구대표팀을 맡은 뒤 한동안 빼어난 성적을 거둬 ‘갓틸리케’라는 별명을 얻기도 했지만, 최종예선 들어 졸전을 거듭하며 리더십과 전술 부재를 드러내고 잇단 설화(舌禍)까지 일으켜 결국 중도에 짐을 쌌다.
허정무 · 정해성 · 신태용 등 거론
그렇다면 슈틸리케에 이어 ‘독이 든 성배’를 마실 사람은 누구일까. 일단 2경기 남은 최종예선(이란전 8월 31일, 우즈베키스탄전 9월 6일)까지 시간이 별로 없다는 점에서 다시 외국인 사령탑을 선임한다는 것은 물리적으로 불가능하다. 국내파 감독에게 지휘봉을 맡겨야 한다는 데 축구계 내부에서 이론이 없다.
현재 허정무 한국프로축구연맹 부총재가 유력한 후보로 거론되고 있는 가운데 슈틸리케 감독을 보좌하고자 얼마 전 대표팀에 합류한 정해성(59) 수석코치의 감독 승격, 지난해 리우데자네이루올림픽에 이어 올해 국제축구연맹(FIFA) 20세 이하(U-20) 월드컵 사령탑을 맡았던 신태용(47) 감독의 소방수 투입 등이 언급되고 있다.
허 부총재는 앞서 살펴본 대로 남아공월드컵에서 월드컵 최초 원정 16강 진출이란 값진 결과를 도출했다는 안정감이 있다. 이용수 전 대한축구협회 기술위원장이 이번에 기술위원회를 떠나며 사견임을 전제로 차기 사령탑의 조건 가운데 하나로 ‘치열한 월드컵 최종예선 경험’을 거론한 뒤 ‘허정무 대세론’이 등장할 정도로 첫손가락에 꼽힌다. 그러나 현장을 떠난 지 5년 가까이 됐다는 것이 약점이다. 부총재로서 매주 K리그 현장을 찾아 스탠드에서 경기를 꾸준히 지켜봤다고 하지만 한계가 있을 수 있다. 허 부총재는 “위기에 처한 한국 축구를 위해 누군가는 나서야 할 때”라며 제의가 온다면 마다하지 않겠다는 뜻을 밝힌 상태다.
3월 중국전, 시리아전 졸전 이후 급히 ‘슈틸리케호’에 수혈된 정 수석코치의 승격도 가능성이 큰 시나리오라고 볼 수 있다. 애초 기술위원회가 슈틸리케의 ‘조건부 유임’을 결정하면서 정 수석코치를 합류시킨 것은 ‘유사시’에 대비한 포석이었다는 해석도 나온다. 일각에선 2010 남아공월드컵 당시 정 코치가 허 감독을 보좌했다는 점을 떠올리며 ‘허정무 감독-정해성 코치’ 체제 재가동도 하나의 카드로 거론하고 있다.
얼마 전 끝난 U-20 월드컵 대표팀을 이끌었던 신태용 감독도 후보로 언급되지만 허정무, 정해성 두 사람에 비해 현실성은 떨어지는 게 사실이다. 무엇보다 안방에서 열린 U-20 월드컵에서 16강 진출을 이끌긴 했지만 ‘1차 목표’로 내세웠던 8강 진출에 실패한 것이 결정적인 걸림돌이 되고 있는 분위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