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치 겨울올림픽을 30일 앞둔 1월 8일 서울 노원구 공릉동 태릉선수촌에서 선수들이 오전 훈련을 마친 뒤 걸어가고 있다.
정윤수 스포츠평론가가 혀를 차며 한 말이다. 2월 15일 소치 겨울올림픽 쇼트트랙 여자 1500m 결승전에 대한 소회였다. 이날 결승선을 두 번째로 통과한 심석희 선수는 언론 인터뷰에서 “금메달을 기대한 분이 많았는데 부응하지 못해 죄송스럽다”며 고개를 떨궜다. 2월 23일(현지시간) 올림픽이 막을 내린 뒤엔 김재열 대표팀 선수단장(대한빙상경기연맹 회장)이 또 한 번 사과했다. “금메달 4개로 (세계) 톱10에 진입하겠다는 목표 달성에 실패해 밤낮으로 열심히 응원해주신 국민께 죄송하다”는 것이다.
국가주의 프레임 안에서 발전
‘겨울올림픽 3회 연속 종합순위 톱 10 진입’은 이번 대회를 앞두고 한국선수단이 세운 목표다. 여러 언론이 앞다퉈 이를 보도했고, 올림픽 기간 중 메달레이스가 주춤하자 ‘반환점 돈 한국, 3회 연속 톱 10 적신호’ ‘3연속 톱 10 목표 달성 가물가물’ 등의 기사를 쏟아냈다. 올림픽에서 중요한 건 ‘메달’, 그중에서도 ‘금메달’ 획득임을 공공연히 드러낸 셈이다. 최동호 스포츠평론가는 이에 대해 “우리나라 스포츠 발전은 오랫동안 국가주의 프레임 안에서 이뤄졌다. 이번 올림픽에서도 그런 시각이 여과 없이 노출된 것”이라고 지적했다. 문제는 그 과정에서 선수들이 메달 획득 도구로 여겨진다는 점이다. 운동하는 즐거움이나 개인적 성취보다 ‘국가’를 ‘대표’하는 선수로서의 책임과 의무가 강조될 수밖에 없다.
루지 국가대표 선수 출신 A씨는 지난해 가을 대표팀 훈련 도중 허가 없이 숙소를 이탈했다가 코치로부터 구타를 당했다. 이 사건 여파로 해당 코치는 자격정지를 당했고, A씨 또한 대표 자격을 잃었다. 그는 2012년 아시아권 대회에서 우승했을 만큼 실력을 인정받았지만, 소치 겨울올림픽에는 출전하지 못했다. 2009년엔 배구 대표팀 간판선수가 합숙훈련 도중 코치에게 무차별적으로 맞은 사건이 있었고, 2008년에는 펜싱 대표팀에서 사달이 났다. 아시아권 대회에서 여러 번 1위를 한 선수가 해외 전지훈련 도중 담배를 피우다 적발돼 폭행을 당한 것. 2007년에는 선수들을 상습적으로 때린 수영 대표팀 코치가 태릉선수촌에서 퇴촌됐고, 2004년에는 쇼트트랙 대표팀 선수들이 훈련 중 반복되는 구타를 호소하며 집단 이탈하기도 했다.
전문가들은 이처럼 끝없이 반복되는 대표팀 폭력 사건 원인을 ‘세계 톱 10’ 달성 같은 국가적 목표 설정에서 찾는다. 그 뿌리는 유신시대로 거슬러 올라간다는 것이 정설이다.
1971년 제52회 전국체육대회 개회식에서 박정희 당시 대통령은 “스포츠 정신 생활화를 통해 자신의 안일보다 국가 발전을 앞세우며 나라를 위해서는 언제든 사리를 희생할 줄 아는 진정한 민주시민 생활윤리를 더욱 성실히 실천해나갈 수 있도록 노력해야 하겠습니다”라고 연설했다. 스포츠 정신을 ‘국가 발전’ 도구로 여긴 박정희 정부는 엘리트 스포츠 육성에 힘을 쏟았다.
선수 인권 밟고 스포츠 한국 위상 급상승
2014 소치 겨울올림픽 쇼트트랙 여자 1500m 결승에서 2위를 차지한 심석희 선수를 최광복 코치가 위로하고 있다.
‘당근’도 마련했다. 국제대회에서 좋은 성적을 낸 선수를 대상으로 한 병역면제 혜택과 연금제도를 마련한 것(상자기사 참고). 이에 대해 ‘스포츠공화국의 탄생’을 쓴 허진석 ‘아시아경제’ 스포츠레저부장은 “국제대회 메달리스트 등 엘리트 선수를 마치 독립운동가나 전쟁영웅 같은 국가유공자 내지 애국인사로 자리매김시킨 조치”라고 평했다. 이 제도는 현재까지 거의 그대로 이어지고 있다. 박정희 정부 이후 우리나라에서 엘리트 스포츠 선수가 되는 건 곧 부와 명예를 동시에 거머쥐는 일이 된 셈이다.
이 과정에서 한국 스포츠의 국제적 위상은 급상승했다. 하지만 선수 인권은 오히려 퇴보했다는 평가를 받는다. 익명을 요구한 한 지도자는 “외국 학생들은 학교 클럽 팀에서 즐기는 운동을 하지만 우리는 성적지상주의로 갈 수밖에 없다. 학생 선수에게 공부를 시키지 않으니 대표팀에 선발되거나 체육특기자로 대학에 가지 못하면 낙오자가 된다. 특기자가 되려면 전국대회 4강 이상의 성적을 내야 한다. 이런 성적을 못 내면 학부모가 오히려 교사를 원망한다. 욕을 하든 때리든 애들을 살아남게 해주는 사람이 ‘좋은 선생님’ 소리를 듣는 것”이라고 했다.
서울대 스포츠과학연구소가 2010년 대한체육회 등록 선수들의 학부모를 대상으로 실시한 조사에서도 이런 의식이 드러난다. 학부모 2명 가운데 1명(45.5%)은 ‘자녀 구타를 인지했으나 필요한 일이라고 긍정적으로 받아들였다’고 응답했다. 이렇게 응답한 비율은 2012년 조사에서 46.7%로 더욱 늘었다.
대표선수가 돼도 상황은 달라지지 않는다. 국제대회에서 좋은 성적을 내 병역면제 혜택과 연금을 받지 못하면 낙오될 수밖에 없기 때문. 2011년 한선교 당시 한나라당 의원이 공개한 자료에 따르면 국가대표 은퇴선수 10명 가운데 3명이 전국 평균 국민건강보험료보다 낮은 보험료를 냈다. 말하자면 ‘빈곤층’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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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02 런던 올림픽에 출전하는 국가대표 선수들이 영하의 날씨 눈발이 날리는 와중에도 운동장을 달리며 금메달을 위해 구슬 땀을 흘리고 있다.
2009년 김신애 국회입법조사처 입법조사관도 현안보고서를 통해 ‘엘리트 선수 육성방식하에서 육성된 국가대표 선수들은 어린 시절부터 대부분 시간을 훈련에 할애함으로써 정규교육 기회를 박탈당하고 그 결과 은퇴 후 진로 전환 및 사회 적응에 어려움을 겪는다’고 지적했다. 이런 상황에서 또 한 번 ‘욕을 하든 때리든’ 좋은 성적이 나오도록 이끄는 지도자가 ‘좋은 지도자’로 평가받는다.
이에 대해 정윤수 스포츠평론가는 “한국 스포츠가 세계 톱 10이라는 건 그저 메달 수를 기초로 하는 말일 뿐이다. 우리나라에서 일반 학생은 체육을 하지 않고, 선수들은 수업을 듣지 않는데 어떻게 스포츠 선진국이라고 할 수 있나”라며 “선수 인권과 삶의 질 면에서 한국은 후진국”이라고 비판했다. 한 체육인은 “현재 우리나라 체육 시스템은 소수 엘리트 선수가 신분 수직 상승 및 풍부한 경제적 보상이라는 과실을 모두 차지하고, 수많은 평범한 체육인은 통곡하게 만드는 구조”라며 “스포츠가 운동의 즐거움과 인간 한계 극복이라는 순수한 목표에서 벗어나 금전과 명예 획득 수단으로 왜곡되는 건 심각한 문제”라고 지적했다.
전문가들이 이런 문제의 핵심으로 꼽는 것은 ‘태릉선수촌’으로 대표되는 엘리트 스포츠 시스템이다. 빅토르 안(한국명 안현수) 선수의 러시아 귀화를 계기로 쏟아져 나온 우리 스포츠계 파벌 문제도 여기서 비롯됐다는 목소리가 나온다. 엘리트 스포츠 집단에서 지도자는 승리를 위해 구성원 간 단합을 강조하고, 이들 사이에 싹트는 연대감은 외부와 단절된 폐쇄성을 형성해 결국 담합과 승부조작 등을 가져올 수 있다는 것이다.
한국 수영의 간판 박태환 선수는 자전 에세이 ‘프리스타일 히어로’에서 ‘중학교 3학년 때 처음 국가대표가 돼 태릉에 들어갔다. 가문의 영광이었고, 등에 커다랗게 찍힌 ‘KOREA’, 가슴에 태극기가 수놓인 유니폼을 입는 것만으로도 자부심을 느낄 수 있었다’고 밝혔다.
하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그는 개인 훈련을 원하게 됐다. 박 선수가 지적한 것은 △첫째, 단체 기합 등 그곳만의 어두운 면 △둘째, 전국체전 메달과 한국 신기록에만 목메는 현실 △셋째, 딱딱한 훈련 분위기였다. 박 선수는 ‘캐나다 빅토리아에서 열린 팬퍼시픽 대회에서 본 호주와 미국 선수들의 훈련 분위기는 정말 달랐다. 선수와 코치가 하나 돼 경기 화면을 찍고 숙소나 연습장에서 끊임없이 대화하고 연구하며 훈련하는 모습이 내게는 이상적으로 보였다. (중략) 그 선수들처럼 해보고 싶었다’고 했다. 이후 박 선수는 개인 전담팀을 꾸려 운동했고, 여러 대회에서 우수한 성적을 냈다. 최동호 스포츠평론가는 “김연아도 그랬다. 박태환이나 김연아처럼 실력과 인기를 갖춘 선수가 체육단체에 맞서 자기 목소리를 내면서 우리 스포츠계에 조금씩 변화가 시작되고 있다”고 평했다.
스포츠맨십 자체에 찬사 보내야
2012 런던 올림픽에서 은메달을 딴 한국 수영대표팀 박태환 선수.
권순용 서울대 체육교육과 교수는 논문에서 “미국에도 우리나라 체육특기자 같은 특별전형이 있지만, 세부 운영 방식에 큰 차이가 있다. “미국대학스포츠협회(NCAA)가 관리 운영하는 기준에 따라 최저 16개 핵심과목 이수, 핵심과목 평점평균 기준 충족 등의 조건을 만족하고, 아마추어 자격인증을 받지 못하면 대학에 진학할 수 없다”고 소개했다.
우리나라도 2013년 ‘공부하는 운동선수’를 만들자는 목적으로 ‘학교체육진흥법’을 입법했다. 하지만 ‘학생 선수가 일정 수준 학력 기준에 미치지 못하면 학교장이 대회 출전을 제한할 수 있다’처럼 권고적인 수준이라 정작 학교현장에서 큰 효력을 발휘하지 못한다는 지적이 있다. ‘학교장은 학생선수의 학습권 보장 및 신체적·정서적 발달을 위해 학기 중의 상시 합숙훈련이 근절될 수 있도록 노력해야 한다’는 규정 역시 마찬가지다.
영화 ‘쿨 러닝’에서 자메이카 봅슬레이팀 코치는 경기 전날 선수들에게 “금메달이 없어서 만족하지 못한다면, 그것을 얻는다 해도 만족하지 못할 것”이라고 말한다. 소치 겨울올림픽 피겨스케이팅 결선에서 빛나는 연기를 펼친 김연아 선수 역시 “금메달은 중요하지 않았다. 내가 준비해온 모든 것들을 보여줄 수 있어서 만족한다”고 했다. 이제 우리도 스포츠에 덧씌워진 ‘국위 선양’의 환상을 벗기고, 이런 스포츠맨십 자체에 찬사를 보낼 수 있는 수준에 도달해야 하는 게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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