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3년 8월 서울에서 열흘간 북한 인권실태 조사 활동을 벌인 마이클 커비 유엔 북한인권조사위원장(가운데)이 중구 태평로 한국프레스센터 회견장에서 열린 기자회견에서 취재진의 질문에 답하고 있다(왼쪽). 2월 17일 발표된 유엔 북한인권 조사위원회의 조사 결과 보고서.
유엔 기구 및 한국과 미국 등 회원국들, 북한 인권 관련 비정부기구(NGO)와 연구기관은 자료 80여 건을 내놓았다. 위원들은 청문회가 열린 4개 도시 국가에 태국을 합한 5개국을 방문했다. COI는 조사 당사자인 북한과 핵심 관련국인 중국에 대해서도 방문과 자료 협조를 요청했다. 이들은 불응했지만 COI는 공정한 반론권을 준 셈이다.
‘고난의 행군’에도 배불린 지도층
이렇게 작성된 이번 COI 보고서는 일단 좋은 학술논문의 자격 요건인 ‘방법론’ 측면에서 훌륭한 점수를 받기에 충분하다. 북한 정권의 주민 인권유린 문제를 인류가 축적한 경험과 지식을 바탕으로 집대성했다 해도 과언이 아니기 때문이다. 한국 진보 진영이 좋아하는 표현을 빌리자면 ‘집단지성’이 이룬 지적 성과물인 셈이다.
COI의 이번 조사 결과 보고서는 단순한 북한 인권 피해 사례집을 넘어선다. 곳곳에 이론적 함의를 내포하기 때문이다. 이 보고서는 학술이론을 장황하게 늘어놓지 않는다. 하지만 증언과 역사적 사실을 논리적으로 연결하는 방법을 통해 읽는 이가 의식하지 않는 사이 중요 쟁점을 보는 ‘이론적 지도’를 제시한다.
예를 들어 보고서는 1990년대 ‘고난의 행군’ 경제난과 대규모 아사(餓死)가 일어난 원인을 단순히 식량 부족이라는 경제적 차원에서만 찾지 않는다. 출신성분에 따른 식량 분배 차별이라는 정치·경제적 차원으로까지 눈길을 돌리는 것이다. 식량이 부족하긴 했지만 온 국민이 평등하게 나눠 먹었다면 다 살 수 있었다. 하지만 권력자들이 평소처럼 배를 불리는 사이 권력과는 거리가 먼 이들은 식량 접근권을 박탈당했고 최대 350만 명이 아사했다는 이야기다.
북한의 대량기근이 한창이던 1997년 자강도 희천시 한 고아원에서 영양실조로 피부가 쭈글쭈글해진 어린이.
이론 위에 얹힌 증언들은 한층 더 견고하다. 1990년대 당시 식량 문제를 통해 일찌감치 북한 체제의 본질을 꿰뚫어봤던 니콜라스 에버슈타트 미국기업연구소(AEI) 선임연구원은 “민주주의 정부와 비정부기구들은 더는 몰랐다는 듯 행동할 수 없게 됐다”며 “북한이 서방의 인도주의적 지원을 마음대로 분배하게 둬서는 안 된다”고 주장했다.
전체적으로 COI 보고서는 이른바 ‘북한 문제’에 관심을 가지려는 초심자에게 올바른 관점과 연구 대상의 특성을 안내하는 개론서로 손색없다. 그 주된 목적은 북한의 인권침해와 반인도적 범죄를 국제법 차원에서 검증하고 판정한 뒤 시정권고를 내리는 것이지만, 이를 위해 북한 실상을 역사적·구조적 맥락에서 조명했기 때문이다. 전반부에 한반도 역사를 일제강점기 이전, 일제강점기, 한반도 분단과 6·25전쟁, 김씨 일가 수령체제 등장과 공고화 등으로 나눠 정리해놓은 것만으로도 초심자가 북한이라는 ‘이상한 나라’가 등장한 배경과 맥락을 알 수 있을 정도다.
한국 북한학의 세계화 성과
본문도 항목별로 북한 내 인권침해와 반인도적 범죄를 다루지만, 북한 문제를 고민하는 독자라면 누구나 북한 체제 자체의 속성이 야기한 결과라는 판단에 이르도록 유도한다. 이 때문에 인권문제를 해결하려면 정치·경제의 근본적 개혁이 필요하다고 주문하는 것이다.
한층 더 높이 평가해야 할 부분은 방대한 자료와 법률적 개념, 이론적 함의가 일반인 누구라도 이해할 수 있는 쉬운 언어에 녹아들어 있다는 사실이다. 기본적인 영어를 구사하는 이라면 누구나 이 보고서가 얼마나 쉽고 정확하게 쓰였는지 첫 문장부터 느낄 수 있다. 보고서 각주에는 한국 북한학자들과 각 연구기관의 성과물이 다수 소개돼 있다. 그동안 한국 북한학계가 일군 성과가 영어 등 6개 국어로 번역돼 유엔 이름으로 세계적으로 인증받은, 이를테면 ‘한국 북한학의 세계화’라는 성과도 기대할 수 있는 이유다.
이렇듯 탄탄한 방법론과 이론, 구성을 통해 COI 보고서는 북한의 반인도적 범죄에 대해 유엔 안전보장이사회가 국제형사재판소에 제소해야 한다고 요구한다. 그동안 전 세계 북한 인권운동 진영이 주장해온 내용을 좋은 논문의 마지막 구성요소인 ‘강력한 주장’으로 정리한 셈이다. 발표 이후 대부분 언론은 집중적인 관심을 보이면서도 실효성에 대해서는 의문을 제기했다. 그 시각에선 필자도 마찬가지였다. 권고 부분을 주로 소개한 36쪽 요약본을 훑어보는 것으로 충분하다고 생각한 것이다.
그러나 한 사람의 북한학자 눈으로 371쪽 보고서 전체를 들여다보면 이야기가 달라진다. 좋은 방법론과 이론, 구조로 이뤄진 이번 보고서가 북한의 암담한 민낯을 국제사회에 그대로 드러냈기 때문이다. 그 자체가 북한에 가하는 변화의 압박이 되리라는 확신도 갖게 됐다.
언제인지는 알 수 없다. 그러나 북한이라는 국가 혹은 ‘김씨 왕조’가 몰락하면 세계 연구자들은 그 주된 동인이 무엇이었는지 확인하는 작업에 나설 것이다. 어쩌면 COI 보고서가 어떻게 북한에 대한 국제사회의 압박을 강화해 변화를 이끌어냈는지에 대한 중요한 테마가 될지도 모르겠다. 그것이 이 보고서에 담긴 힘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