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간동아 9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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밥상 위에 오른 맛있는 4계절

제철 음식·친환경적 생산 안심 먹을거리…세계 곳곳서 슬로푸드 음식점 늘어나

  • 노민영 푸드포체인지 대표 sizzle3355@gmail.com

    입력2013-10-07 09:47: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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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밥상 위에 오른 맛있는 4계절

    서울 홍대 앞 슬로푸드 음식점 수카라의 밥상.

    1980년 이탈리아 로마의 스페인광장에 붉은 M자 간판이 걸렸다. 다국적 햄버거 음식점 체인 맥도날드였다. 이탈리아 미식가와 언론인이 모여 지역 문화, 역사와는 전혀 연결 고리가 없는 이 정체불명의 음식에 저항하는 의미에서 시작한 것이 바로 슬로푸드 운동이다. 이탈리아에서 시작한 이 운동은 대량화, 표준화되는 현대 음식문화 흐름에 반대해 로컬푸드(지역 먹을거리)와 친환경음식, 전통음식, 소규모 생산 음식을 소비하자는 세계적인 음식문화 운동으로 발전했다. 현대 음식문화의 대안이 바로 슬로푸드인 셈이다.

    건강한 먹을거리에 대한 관심과 함께 슬로푸드를 찾는 사람이 늘고 있다. 식품 포장지에 슬로푸드라고 적혀 있거나 슬로푸드 음식점이라고 내세우는 곳도 생겨났다. 과연 그 음식이 슬로푸드라는 근거는 무엇일까. 한국 김치와 장류, 그리고 외국 치즈와 햄 같은 발효음식이 슬로푸드라고 말하는 사람도 있다. 그러나 발효라는 시간적 의미만을 가진다고 모두 슬로푸드라고 할 수는 없다. 같은 김치나 치즈라도 슬로푸드일 수도, 아닐 수도 있다는 얘기다.

    ‘맛의 방주’에 이름 올린 한국

    슬로푸드는 가까운 지역에서 생산하고 소비하는 로컬푸드를 추구한다. 따라서 먹을거리의 생산지와 소비지를 먼저 확인해봐야 한다. 그리고 그 먹을거리를 생산, 소비하는 동안 자연을 훼손하지 않아야 한다. 그 밖에도 지역의 환경적, 문화적 특색을 담은 전통음식이어야 하며, 공장식 대량 생산품이 아닌 생산자의 철학을 담은 소규모 생산 음식이어야 한다. 위 조건을 갖춰야 비로소 슬로푸드라고 내세울 수 있는 것이다. 수입 유전자변형 콩으로 전통 방식이 아닌 공장 생산 방식으로 만든 된장은 10년을 발효해도 슬로푸드일 수 없다는 얘기다.

    밥상 위에 오른 맛있는 4계절

    영국 슬로푸드운동 사무실.

    슬로푸드 국제본부에서는 잊혀가는 음식이나 멸종 위기에 놓인 종자, 음식 등을 찾아 보존하는 프로젝트 ‘맛의 방주’를 진행한다. 얼마 전 한국의 종자와 음식 5가지가 ‘맛의 방주’에 등재됐다. 등재된 종자와 음식은 제주 서귀포의 푸른콩장, 경북 울릉도의 칡소와 섬말나리, 경남 진주의 앉은뱅이 밀, 충남 논산의 연산오계다. 충남 태안 자염, 전남 장흥 돈차, 제주 흑우 등 3가지는 조만간 등재 예정이다.



    그중 푸른콩장은 푸른 콩으로 만든 된장과 간장으로 제주 서귀포 일부 지역에서만 명맥을 잇고 있으며, 일반 된장과 향이 다르고 단맛이 많이 나는 것이 특징이다. 모든 된장이 슬로푸드는 아니며, 푸른콩장처럼 장의 원재료인 콩이 특정 지역과 연관이 있고, 친환경농법과 전통방식으로 소량 생산한 것이어야 한다.

    섬말나리는 울릉도 나리분지에 지천으로 있었지만, 지금은 드물게 자란다. 뿌리를 쪄서 먹거나 갈아서 전으로 부쳐 먹기도 하는데, 쪄서 먹으면 밤이나 고구마 맛과 비슷하다. 이를 이용한 나리범벅은 울릉도의 슬로푸드다. 앉은뱅이 밀로 만든 국수, 연산오계로 끓인 백숙도 슬로푸드라 할 수 있다. 이처럼 재료의 지역적 연관관계와 생산 방식을 따져봐야 슬로푸드인지를 알 수 있다.

    한국엔 많은 음식점이 있다. 1분 1초가 아까운 현대인에게 간단하고 빠르게 먹을 수 있는 먹을거리는 매력적이지 않을 수 없다. 하지만 곳곳에서 조금은 느리지만 여유를 느끼며 우리 건강과 사회에 이로운 먹을거리를 만날 수 있다. 로컬푸드, 친환경음식, 제철음식 또는 채식을 통해 슬로푸드를 경험할 수 있는 것이다.

    10월 1~6일 슬로푸드국제대회가 열린 경기 남양주시에는 태능배갈비가 있다. 이 음식점을 운영하는 대표는 슬로푸드 활동가로, 자신의 영업장에서 슬로푸드를 실천하기도 한다. 그는 가능한 한 남양주 지역 내에서 생산된 제철 농산물을 사용한다. 유기농쌀로 지은 밥은 기본이고, 유정란과 무농약 우리 밀, 천일염 등 슬로푸드의 조건에 맞는 식재료를 주방에서 직접 손질해 요리한다. 점심시간에 선착순 30명에게만 한정 판매하는 힐링밥상은 좋은 재료를 사용했는데도 가격이 저렴한 슬로푸드다.

    음식의 고장인 전북 전주의 함씨네 밥상과 서울 잠실의 청미래는 슬로푸드 뷔페 음식점이다. 좋은 양념(된장, 간장, 소금)을 쓰는 것은 기본이고, 친환경적으로 재배한 제철 우리 식재료를 사용한다.

    슬로푸드 찾고 소비하는 자세

    밥상 위에 오른 맛있는 4계절

    밥과 국 등 간단하게 차려낸 카페 슬로비의 슬로푸드 집밥.

    서울에는 젊은이도 좋아할 만한 슬로푸드 음식점이 몇 군데 있다. 종로구 에코밥상은 친환경 우리 농수축산물과 천연양념 사용을 고집하는 곳이다. 환경운동단체인 환경운동연합에서 운영하는 곳으로, 사람과 환경을 살리는 음식을 제공하고자 만든 밥집이다. 모든 식재료는 친환경 방식으로 재배한 우리 농산물 사용을 원칙으로 하며, 양념 또한 마찬가지다.

    이곳에서 여름에 양배추김치를 내놓는 이유는 원가를 낮추려는 차원이 아니라, 제철이 아닌 배추를 대체하는 맛있는 대안이기 때문이다. 겨울철에 흑미밥, 여름철에 보리밥으로 바꾸는 것 또한 몸을 따뜻하게 하는 흑미와 차게 하는 보리의 성질을 고려한 것이다. 이곳 비빔밥에 올리는 채소 고명과 반찬 구성도 사계절 똑같지 않다. 계절에 맞게 식재료 성질과 제철 재료를 고려해 구성한다. 재래식 된장으로 끓인 된장찌개도 봄에는 냉이, 여름에는 호박 등으로 계절을 입힌다.

    서울 홍대 앞에 위치한 카페 슬로비는 직장인이 선호하는 반찬 몇 개에 밥과 국으로 차린 소박한 슬로푸드 집밥을 맛볼 수 있는 곳이다. 채식 위주 식단에 ‘밭에서 나는 고기’ 콩 요리를 곁들인다. 식재료를 생산한 곳의 마을 이름까지 알 수 있다. 채소, 쌀, 장, 두부, 달걀 등 그때그때 나는 친환경 제철 식재료로 차리기에 ‘그때그때 밥상’이라고 부른다. 철에 따라 달라지는 ‘그때그때 밥상’을 먹다 보면 밥상 위에서 사계절 변화를 느낄 수 있다. 이곳 밥상은 채식 위주의 반찬에 콩 단백질로 균형을 잡고, 화학조미료와 자극적인 양념은 배제했으니 슬로푸드 식단의 표본이다.

    홍대 앞 산울림 소극장 1층에 자리한 수카라는 오래된 카페 가운데 한 곳이다. 지나가다 보면 눈에 띌 듯 안 띌 듯 소박하고 자연스러운 외관만큼이나 메뉴도 소박하지만 좋은 식재료를 바탕으로 그 맛을 뽐낸다. 음료 메뉴에 국산 콩으로 만든 두유가 있어, 우유가 들어가는 음료를 두유로 대체할 수 있다. 음료뿐 아니라 일품요리 메뉴도 갖췄다. 유정란으로 만든 치즈오믈렛, 채소통밀파스타와 버터치킨카레가 대표 메뉴다. 음식에 사용하는 채소 가운데 일부는 인근 텃밭이나 옥상에서 재배한 것이다.

    가까운 곳에서 난 제철음식, 전통을 지키고 친환경적으로 생산한 음식이 바로 슬로푸드다. 슬로푸드를 알면 주변에서 슬로푸드가 보일 것이다. 슬로푸드라고 내세우는 영혼 없는 홍보문구나 마케팅에 현혹되지 않고, 영혼 없는 슬로푸드와 진정한 슬로푸드를 분별해야 한다. 슬로푸드를 찾고 그것을 소비하는 것이 바로 슬로푸드를 지키고 지지하는 일이다.

    햄과 치즈 그리고 로컬푸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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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슬로푸드의 대표 격으로 거론되는 외국 음식에는 햄과 치즈가 있다. 이탈리아 프로슈토 알라 스팔라라는 햄은 토스카나 지역의 토종 돼지 종자인 친타 세네세의 어깨 부위 살로 만들었다. 스페인의 가장 유명한 만체고 치즈도 슬로푸드다. 이 치즈는 반드시 만체고 지역의 토종 양 종자인 엔트레피노의 젖을 사용해야 한다. 이 치즈는 톡 쏘는 맛과 함께 버터, 견과류의 풍미가 나며 부드럽고 잘 부스러지는 질감을 갖고 있다.

    그리스 크레타 섬의 딱딱한 빵 러스크는 지역 특색을 잘 반영한 슬로푸드다. 목축업이 주를 이루던 크레타 섬에서는 목축을 위해 오랜 시간 집을 떠나 있을 때 저장이 쉬운 빵이 필요했고, 그래서 생겨난 것이 바로 이 빵이다. 수분이 적어 딱딱하며, 그만큼 저장 기간이 길다. 단맛이 나는 러스크는 커피나 차와 함께 즐기고, 단맛이 나지 않는 러스크는 살짝 물을 뿌려 적신 뒤 그 위에 치즈나 토마토를 얹어 먹는데, 이것이 바로 그리스의 슬로푸드다.

    세계 곳곳에서 슬로푸드 운동과 함께 슬로푸드를 추구하는 음식점이 늘어났다. 이탈리아 북서부 피에몬테에 자리한 브라는 고요한 마을이었지만 슬로푸드가 알려지면서 슬로푸드 음식점을 찾는 외지인으로 붐빈다. 작은 골목에 자리한 오스테리아 델 보콘디비노는 지역 소규모 생산자의 유기농 제철 식재료를 사용한다. 특히 멸종돼가는 종자의 농산물을 사용함으로써 그것의 지속적 생산을 지원한다.

    이탈리아뿐 아니라 영국, 스페인의 레스토랑에서도 이런 추세를 엿볼 수 있다. 영국 브리스틀에는 보르도키가 있다. 슬로푸드 요리사 버니 허튼이 창업자 가운데 한 명으로 참여한 이 레스토랑은 그 지역의 제철 식재료 사용을 원칙으로 한다.

    스페인에서는 ‘km 0(킬로미터 제로)’라는 레스토랑 마크가 있다. 레스토랑 근방 100km 내에서 60% 이상의 식재료를 조달해야 한다는 기준을 표시한 것이다. 스페인 바르셀로나 람블라 거리에 있는 마타말라는 ‘km 0’ 마크를 받은 곳으로, 카탈루냐의 전통 요리법을 이용해 지역 근방에서 나는 재료로 음식을 만든다.

    슬로푸드 국제본부 부회장이기도 한 앨리스 워터스가 미국 캘리포니아 버클리대 앞에 연 셰 파니스는 미국에서 처음으로 로컬 제철 식재료의 맛을 기본으로 해 요리를 낸 곳이다.
    밥상 위에 오른 맛있는 4계절

    세계 각국에서 생산한 슬로푸드는 많은 사람에게 사랑받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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