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 홍대 앞 슬로푸드 음식점 수카라의 밥상.
건강한 먹을거리에 대한 관심과 함께 슬로푸드를 찾는 사람이 늘고 있다. 식품 포장지에 슬로푸드라고 적혀 있거나 슬로푸드 음식점이라고 내세우는 곳도 생겨났다. 과연 그 음식이 슬로푸드라는 근거는 무엇일까. 한국 김치와 장류, 그리고 외국 치즈와 햄 같은 발효음식이 슬로푸드라고 말하는 사람도 있다. 그러나 발효라는 시간적 의미만을 가진다고 모두 슬로푸드라고 할 수는 없다. 같은 김치나 치즈라도 슬로푸드일 수도, 아닐 수도 있다는 얘기다.
‘맛의 방주’에 이름 올린 한국
슬로푸드는 가까운 지역에서 생산하고 소비하는 로컬푸드를 추구한다. 따라서 먹을거리의 생산지와 소비지를 먼저 확인해봐야 한다. 그리고 그 먹을거리를 생산, 소비하는 동안 자연을 훼손하지 않아야 한다. 그 밖에도 지역의 환경적, 문화적 특색을 담은 전통음식이어야 하며, 공장식 대량 생산품이 아닌 생산자의 철학을 담은 소규모 생산 음식이어야 한다. 위 조건을 갖춰야 비로소 슬로푸드라고 내세울 수 있는 것이다. 수입 유전자변형 콩으로 전통 방식이 아닌 공장 생산 방식으로 만든 된장은 10년을 발효해도 슬로푸드일 수 없다는 얘기다.
영국 슬로푸드운동 사무실.
그중 푸른콩장은 푸른 콩으로 만든 된장과 간장으로 제주 서귀포 일부 지역에서만 명맥을 잇고 있으며, 일반 된장과 향이 다르고 단맛이 많이 나는 것이 특징이다. 모든 된장이 슬로푸드는 아니며, 푸른콩장처럼 장의 원재료인 콩이 특정 지역과 연관이 있고, 친환경농법과 전통방식으로 소량 생산한 것이어야 한다.
섬말나리는 울릉도 나리분지에 지천으로 있었지만, 지금은 드물게 자란다. 뿌리를 쪄서 먹거나 갈아서 전으로 부쳐 먹기도 하는데, 쪄서 먹으면 밤이나 고구마 맛과 비슷하다. 이를 이용한 나리범벅은 울릉도의 슬로푸드다. 앉은뱅이 밀로 만든 국수, 연산오계로 끓인 백숙도 슬로푸드라 할 수 있다. 이처럼 재료의 지역적 연관관계와 생산 방식을 따져봐야 슬로푸드인지를 알 수 있다.
한국엔 많은 음식점이 있다. 1분 1초가 아까운 현대인에게 간단하고 빠르게 먹을 수 있는 먹을거리는 매력적이지 않을 수 없다. 하지만 곳곳에서 조금은 느리지만 여유를 느끼며 우리 건강과 사회에 이로운 먹을거리를 만날 수 있다. 로컬푸드, 친환경음식, 제철음식 또는 채식을 통해 슬로푸드를 경험할 수 있는 것이다.
10월 1~6일 슬로푸드국제대회가 열린 경기 남양주시에는 태능배갈비가 있다. 이 음식점을 운영하는 대표는 슬로푸드 활동가로, 자신의 영업장에서 슬로푸드를 실천하기도 한다. 그는 가능한 한 남양주 지역 내에서 생산된 제철 농산물을 사용한다. 유기농쌀로 지은 밥은 기본이고, 유정란과 무농약 우리 밀, 천일염 등 슬로푸드의 조건에 맞는 식재료를 주방에서 직접 손질해 요리한다. 점심시간에 선착순 30명에게만 한정 판매하는 힐링밥상은 좋은 재료를 사용했는데도 가격이 저렴한 슬로푸드다.
음식의 고장인 전북 전주의 함씨네 밥상과 서울 잠실의 청미래는 슬로푸드 뷔페 음식점이다. 좋은 양념(된장, 간장, 소금)을 쓰는 것은 기본이고, 친환경적으로 재배한 제철 우리 식재료를 사용한다.
슬로푸드 찾고 소비하는 자세
밥과 국 등 간단하게 차려낸 카페 슬로비의 슬로푸드 집밥.
이곳에서 여름에 양배추김치를 내놓는 이유는 원가를 낮추려는 차원이 아니라, 제철이 아닌 배추를 대체하는 맛있는 대안이기 때문이다. 겨울철에 흑미밥, 여름철에 보리밥으로 바꾸는 것 또한 몸을 따뜻하게 하는 흑미와 차게 하는 보리의 성질을 고려한 것이다. 이곳 비빔밥에 올리는 채소 고명과 반찬 구성도 사계절 똑같지 않다. 계절에 맞게 식재료 성질과 제철 재료를 고려해 구성한다. 재래식 된장으로 끓인 된장찌개도 봄에는 냉이, 여름에는 호박 등으로 계절을 입힌다.
서울 홍대 앞에 위치한 카페 슬로비는 직장인이 선호하는 반찬 몇 개에 밥과 국으로 차린 소박한 슬로푸드 집밥을 맛볼 수 있는 곳이다. 채식 위주 식단에 ‘밭에서 나는 고기’ 콩 요리를 곁들인다. 식재료를 생산한 곳의 마을 이름까지 알 수 있다. 채소, 쌀, 장, 두부, 달걀 등 그때그때 나는 친환경 제철 식재료로 차리기에 ‘그때그때 밥상’이라고 부른다. 철에 따라 달라지는 ‘그때그때 밥상’을 먹다 보면 밥상 위에서 사계절 변화를 느낄 수 있다. 이곳 밥상은 채식 위주의 반찬에 콩 단백질로 균형을 잡고, 화학조미료와 자극적인 양념은 배제했으니 슬로푸드 식단의 표본이다.
홍대 앞 산울림 소극장 1층에 자리한 수카라는 오래된 카페 가운데 한 곳이다. 지나가다 보면 눈에 띌 듯 안 띌 듯 소박하고 자연스러운 외관만큼이나 메뉴도 소박하지만 좋은 식재료를 바탕으로 그 맛을 뽐낸다. 음료 메뉴에 국산 콩으로 만든 두유가 있어, 우유가 들어가는 음료를 두유로 대체할 수 있다. 음료뿐 아니라 일품요리 메뉴도 갖췄다. 유정란으로 만든 치즈오믈렛, 채소통밀파스타와 버터치킨카레가 대표 메뉴다. 음식에 사용하는 채소 가운데 일부는 인근 텃밭이나 옥상에서 재배한 것이다.
가까운 곳에서 난 제철음식, 전통을 지키고 친환경적으로 생산한 음식이 바로 슬로푸드다. 슬로푸드를 알면 주변에서 슬로푸드가 보일 것이다. 슬로푸드라고 내세우는 영혼 없는 홍보문구나 마케팅에 현혹되지 않고, 영혼 없는 슬로푸드와 진정한 슬로푸드를 분별해야 한다. 슬로푸드를 찾고 그것을 소비하는 것이 바로 슬로푸드를 지키고 지지하는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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