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리모시스템을 설명하는 소광섭 교수.
프리모시스템 탄생
다소 난해한 프로젝트 주제에 대해 설명을 부탁하니, 소 교수는 프리모(Primo)시스템의 탄생 배경에 대한 이야기부터 풀어나갔다.
“프리모시스템이라는 표현은 세계 학계를 염두에 두고 우리 연구팀이 만든 국제 용어예요. ‘원초적’ ‘핵심적’이라는 뜻을 지닌 프리모시스템은 우리 인체에 존재하는 혈관계와 림프계에 이어 밝혀진 제3순환계입니다. 1960년대 초·중반 북한 의학자 김봉한(1916~66?)이 한의학에서 중요시하는 경락 실체를 찾았다고 해서 전 세계 의학계를 떠들썩하게 만들었는데, 이 ‘봉한이론’을 발전시킨 것이 프리모시스템이죠.”
부연하자면, 소 교수팀은 봉한이론을 좀 더 정밀히 재현하고 검증해 봉한이론에서 미처 파악하지 못한 부분까지 밝혀내는 쾌거를 이뤘다. 그렇게 해서 이름 붙인 것이 ‘프리모시스템’(공식 명칭은 PVS 시스템)이라는 것.
소 교수가 나직하면서도 침착하게 설명하는 프리모시스템은 곱씹어보면 전 세계 의학계의 기반을 송두리째 흔들 만한 충격적인 내용이다. 서구 의학계가 발견하지 못한 제3순환계가 인체 내에 존재한다는 것은 한마디로 의학 교과서를 새로 써야 하는 것과 다를 바 없다.
이날 모임에 참석하지 않았지만, 프리모시스템을 집중 연구하는 국립암센터의 권병세 박사는 “40년 넘게 면역학을 연구해온 사람으로서 림프관 속에 또 다른 제3의 관(프리모시스템)이 있다는 사실을 내 눈으로 확인한 뒤 무척 놀랐다”고 밝혔다. 권 박사가 누구인가. 미국 인디애나의대에서 세포면역학 전문가로 이름을 떨치다 울산대 의대를 거쳐 국립암센터에 영입된 그는, 세계적으로 인정받는 SCI(Science Citation Index) 학술지 게재 논문 피인용 횟수가 수천 번에 달해 정부로부터 ‘국가석학’ 지원을 받는 최고 과학자다. 그런 그가 프리모시스템 존재를 확신하고 지난해에 이어 올해도 자신의 주요 전공 분야인 면역세포와 프리모시스템의 상관관계에 대한 연구논문을 준비 중인 것이다.
이어지는 소 교수의 설명.
“사람 피부 쪽에 집중돼 순환하는 프리모시스템이 한의학에서 말하는 경락계와 잇닿아 있다는 것은 김봉한이 밝혔고, 우리 연구팀도 확인했어요. 프리모시스템은 경락 외에도 인체 장기 내·외부, 혈관, 림프관 등 곳곳에서 발견되고 있죠. 우리가 더 연구해야 할 부분은 프리모시스템의 전체 순환체계를 밝혀내고, 그것을 질병 치료 차원에서 응용하는 거예요.”
1 토끼 간에서 모습을 드러낸 프리모시스템. 2 특수 염색법으로 프리모관을 촬영할 수 있다. 3 프리모시스템 항체를 주입해 뇌의 프리모시스템을 관찰, 진단하는 모형도.
그러려면 누구나 프리모시스템을 찾아낼 수 있도록 진단장치를 만들어야 하고, 프리모시스템 특이항체 개발 등 의학적 치료 방법도 개발해야 한다. 이날 모임은 바로 그 첫 단추를 끼우는 차원이라는 게 소 교수 설명이다.
소 교수팀은 현재 인체에서 가장 신비롭다는 뇌에 연구 초점을 맞추고 있다. 소 교수팀이 뇌에 주목한 이유가 있다. 한의학으로 대변되는 동양의학은 인체 오장육부를 논해도 뇌에 대해서는 거의 언급하지 않았다. 반면 서양의학은 뇌를 포함해 인체의 유일한 두 순환계(혈관, 림프관)를 논하지만 제3순환계(경락계 혹은 프리모시스템)를 전혀 눈치 채지 못한다. 말하자면 동서양 두 의학에서 빈 공간으로 남은 곳이 바로 뇌다. 또한 고령화시대에 접어들어 난치성 뇌질환인 알츠하이머, 파킨슨, 뇌졸중 치료에 도움이 되고자 하는 뜻도 담겼다.
이와 관련해 전문가들은 크게 세 팀으로 나뉘어 연구를 진행한다. 소 교수팀은 뇌 속 프리모시스템을 관찰, 분석하는 기술개발 분야를 맡았고, 차의과대학 윤태종 박사팀은 나노입자를 응용해 프리모시스템에 약물을 전달하는 주입장치를 개발하며, 삼성서울병원 이복수 교수팀은 채취된 프리모 물질을 기반으로 프리모시스템 특이항체 및 진단마크 개발을 주요 임무로 삼았다.
특히 이복수 교수팀은 지난해 인체 태반과 탯줄에서 프리모시스템을 찾아냄으로써 인체 프리모시스템 연구의 신기원을 연 바 있다. 이날 모임에 참석한 순환기내과 전문의 박정의 교수는 본격적으로 인체 질병 치료에 응용할 원천기술을 확보하기 위해 심혈을 기울인다고 밝혔다.
소 교수는 뇌 속에 존재하는 프리모시스템은 이미 쥐 실험을 통해 분명히 밝혔으며, 인체에 응용하는 연구도 성공할 수밖에 없으리라고 확신했다. 그러면서 소 교수는 프리모시스템 속에 존재하는, 일반 세포보다 훨씬 작은 크기의 물질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고 했다. 이 신비한 물질이 모든 생명체의 생명 유지에 핵심적 기능을 한다는 것. 김봉한도 이 물질을 찾아내 ‘살아 있는 알’이라는 의미로 ‘산알’이라고 이름 붙였다. 다음은 소 교수의 보충 설명이다.
프리모시스템은 줄기세포의 씨앗
“봉한이론이 의학계에 가장 기여한 부분은 ‘산알’을 발견한 일일 거예요. 김봉한은 상처난 조직 부위에 산알이 몰려들어 일반세포로 자라난다고 주장했죠. 산알이 봉한관(경락)을 따라 움직이다가 봉한소체(경혈)에 다다르면 빛을 받아 광화학 작용을 일으켜 어떤 방식인지는 알 수 없으나 일반세포로 자란다는 거예요. 산알의 기능이 원리적으로 줄기세포의 기능과 같다는 의미죠.
실제로 우리 연구팀도 2005년부터 ‘산알 정체가 줄기세포일 가능성이 있다’는 가설을 외국 학회에 발표하기 시작했고, 이후 수많은 실험 결과 산알이 최소한 성체줄기세포의 근원이자 씨앗이 된다는 것을 알아냈어요.”
소 교수는 DNA의 알갱이라고 할 수 있는 산알은 서양의학의 세포유전학과 암 연구에 많이 사용되는 마이크로셀(micro-cell)과 흡사하면서 만능줄기세포 같은 기능을 하는 것으로 보았다.
소 교수는 더 이상의 말을 아꼈다. 실험과 검증에 의한 결과만을 놓고 이야기하는 과학자의 자세에서 벗어나지 않겠다는 의지의 표현이었다. 줄기세포는 모든 세포의 ‘조상’에 해당하는 세포다. 근육세포, 혈액세포, 신경세포를 나무의 ‘가지’에 비유한다면 줄기세포는 나뭇 가지의 ‘원조’에 해당한다고 해서 ‘줄기’라는 이름이 붙었다.
또 세포의 원조 혹은 조상에 해당하는 줄기세포는 크게 배아줄기세포와 성체줄기세포로 대비된다. 생명체가 세상에 태어나기 전 배아 상태에 있는 것을 배아줄기세포라 하고, 태어난 이후 성체에 존재하는 줄기세포를 성체줄기세포라고 한다. 세상에 숱한 논란을 불러일으킨 황우석 박사의 연구 주제가 바로 배아줄기세포였다면, 성체(생명체)의 살아 있는 조직에서 채취할 수 있는 것이 성체줄기세포다. 생명체의 피부에 상처가 나도 저절로 아무는 것은 피부 아래에 존재하는 성체줄기세포가 피부세포로 자라는 작용을 하기 때문이다. 문제는 성체줄기세포를 발견, 채취하는 것이 매우 어렵다는 점인데, 소 교수는 이를 ‘산알’에서 찾아낸 것이다.
프리모시스템과 줄기세포의 상관관계를 밝히는 작업은 오히려 미국에서 활발하다. 루이스빌대학 제임스 그레이엄 브라운암센터의 도널드 밀러 소장팀, 워싱턴대 의대 새뮤얼 아치레푸 교수팀, 어번대학 비탈리 바드야노이 교수팀 등 3개 팀이 프리모시스템을 기반으로 암과 줄기세포를 연구하고 있다.
암 재발시키는 줄기세포에도 작용
특히 루이스빌대학 줄기세포 전문가인 마리우스 라타작 교수가 발견한 ‘작은 배아 같은 줄기세포(very small embryonic-like stem cell)’가 산알과 동일하거나 그것이 변형된 형태라는 연구 보고가 있은 후, 올해 초 같은 대학 도널드 밀러 교수팀이 암 재발에 중요한 기능을 하는 암줄기세포(cancer stem cell)에서 다량의 산알을 찾아냈다. 즉 암줄기세포 생성에도 산알이 작용한다는 사실이 밝혀진 것이다.
줄기세포와의 연관 이전에 사실 소 교수팀은 2009년 암조직 주변에서 프리모관 조직이 발달한다는 것을 알아낸 후, 프리모관과 암 전이의 관련성에 주목한 바 있다. 소 교수팀은 “프리모관은 암 전이의 새로운 경로일 수 있다”면서 “쥐를 이용한 실험에서 암 전이가 림프관뿐 아니라 프리모관을 통해서도 일어난다는 것을 관찰했다”고 밝혔다. 만약 프리모관이 암 전이와 직접적으로 관련 있다는 사실을 입증한다면 세계 의학계는 대변혁을 맞게 된다. 암 치료와 관련한 의학 교과서의 기본 개념은 물론 치료법까지 다 바뀌어야 하기 때문이다. 프리모관에 약을 주사하면 암 조직으로만 약물을 전달해 부작용을 줄일 수 있고 약효도 최대화할 수 있다는 것이 소 교수팀 주장이다.
줄기세포와 암 등 우리 의학계의 최대 난제에 도전장을 내민 프리모시스템의 미래가 어떨지 지금 예견하기는 이른 듯싶다. 다만 1960년대 김봉한이 내놓은 봉한이론이 그랬듯, 소 교수팀의 프리모시스템이 또 한 번 21세기 의학계를 뒤흔들 것으로 기대된다.
소 교수팀의 연구에 따르면 인체의 주요 기관은 모두 프리모시스템을 순환하는 산알에 의해 끊임없이 갱신된다. 이러한 산알 기능이 곧 그 개체의 노화와 죽음도 책임지는 것이다. 산알을 순환시키는 프리모시스템의 기능이 쇠퇴하면 노화가 일어나고, 기능이 정지하면 그 개체에 죽음이 닥친다. 반대로 프리모시스템의 기능이 쇠퇴하지 않으면 노화 현상이 일어나지 않고, 또 그 기능이 정지하지 않는 한 죽음도 일어나지 않는다. 이 얼마나 무섭고도 놀라운 일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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