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자 없이 농사짓고 사느라 죽을 뻔했어. 살라믄 안 해본 거 뭐 있간. 시댁이 원래 땅이 많았는디…. 힘들 때도 있었지. 둘째는 태어난 지 열흘 만에 갔어(죽었어). 종배 아버지가 종배 세 살 때 사할린에 갔는데, 가는 날부터 태기가 있었어. 그런데 낳으니까 그냥 가더라고. 그것도 내 손으로 갖다 버렸어. 재가는 안 했어. 사람 생사를 모르는데 움직이질 못하지. 안 그려? 종배 아부지 뼈를 찾으믄 좋겄어. 한국 사람이니께 한국으로 와야 하지 않겄어?”
6월 28일 서울 지하철 4호선 끝자락 오이도역(경기 시흥시 정왕동) 부근 아파트에서 딸 가족과 함께 사는 황계순(89) 할머니를 만났다. 충남 홍성군 홍북면 상하리에 살던 그는 임병갑(1920년생) 씨와 결혼했지만 남편이 1942년 사할린으로 간 뒤 시어머니와 시동생, 그리고 큰동서가 재가하며 두고 간 조카 3남매와 딸을 거두며 가장으로 살았다. 출가한 딸과 함께 살면서 손자들을 키우다 67세부터 17년 동안 막내 동생의 병원에서 도우미 노릇을 했고, 3년 전에야 이 자리로 돌아왔다. 그는 2시간 동안 진행한 인터뷰에서 끝내 남편과의 애틋한 추억은 공개하지 않았다. 그런데도 눈물이 그렁그렁한 그의 눈에서 그리움의 정도를 짐작할 수 있었다.
그의 손녀 홍재희(42) 씨는 6월 20, 22일 열린 일제강점기 강제징용 피해자 관련 세미나에서 질의자로 나서 “나를 키운 외할머니가 일제강점기에 사할린으로 간 남편의 생사도 모른 채 세월을 보내는 게 안타깝다”면서 “정부가 일제 강제징용 피해자 유골을 찾으려는 노력을 접으려는 것 같다”며 울먹였다.
생사도 모른 채 남편 기다려
국가가 버린 사람들. 러시아 사할린에는 일제강점기에 강제징용돼 결혼하지 않고 홀로 살면서 고향에 돌아갈 날만 손꼽아 기다리다 죽은 홀아비가 숱하다. 황 할머니의 남편 임병갑 씨도 그중 한 사람이다. 광복 당시 남사할린 거주 조선인은 4만3000여 명으로 그중 70%가 남자로 추정된다. 제2차 세계대전 막바지에 노무자들이 무차별적으로 동원됐다는 점을 감안하면 그 비율은 더 높을 것이다. 하지만 조국은 이들의 존재를 잊었다.
안타까운 것은 조국에 남은 가족이 가장 없이 살아온 탓에 경제적으로 여유롭지 않아 가장 찾는 일을 온전히 국가에 의탁할 수밖에 없다는 점이다. 실제로 먹고살기 바빴던 황 할머니가 남편을 찾으려고 들인 노력은 손녀딸이 한국에 영주 귀국한 러시아 동포를 찾아가 수소문해본 것이 전부다.
정부가 전혀 노력을 기울이지 않은 것은 아니다. 국무총리 소속 대일항쟁기 강제동원피해조사 및 국외강제동원 희생자 등 지원위원회(이하 위원회)가 2011년 러시아연방 사할린 주 유즈노사할린스크 제1공동묘지에 대해 전수조사하면서 일제 강제동원 피해자 유골 찾기 사업을 시작했다(박스기사 참조). 그러나 올해 말로 위원회 활동이 종료되기 때문에 사실상 유골 찾기 사업은 끝나는 셈이다. 결국 속 타는 건 유족이지만 힘없는 유족이 할 수 있는 일은 많지 않다.
7월 2일 기자는 황 할머니가 남편을 찾으려고 그토록 가고 싶었던 사할린을 단 3시간 만에 찾아갔다. 넓이 8만7100k㎡로 남한보다 조금 작은 러시아연방 사할린 주는 일본 홋카이도 바로 위에 자리한다. 주도(州都) 유즈노사할린스크에 들어서자 허름한 잿빛 건물이 드물게 나타났다. 사할린 전체 인구 67만여 명 가운데 80%가 러시아인이고 한국인은 5.4%를 차지한다는 통계를 뒷받침하듯 한국인으로 짐작되는 이들이 눈에 띄었다.
기자는 홀아비의 행적을 찾으려고 가장 먼저 유즈노사할린스크 제1공동묘지를 찾았다. 후손이 없는 이들의 묘는 한인 묘 가운데 ‘가장 버림받은’ 묘이자 ‘대한민국 정부가 나서지 않으면 누구도 돌보지 않을 묘’이기 때문이다. 사할린 묘는 묘 둘레를 철책으로 둘러친 것이 다를 뿐 영화에서 본 서양인 묘지와 비슷했다.
일제 강제징용 피해자 발굴 올해 종료
꽃가루처럼 날리는 모기떼와 씨름해야 했지만 한인 묘를 찾는 건 어렵지 않았다. 러시아인이 묘를 평평하게 하고 묘 뒤에 묘비를 세우는 것과 달리, 한국인은 봉분을 세우고 묘 앞에 묘비를 세우는 까닭이다. 하지만 봉분도 철책도 묘비도 없는 묘를 보자 한국에서 만났던 배덕호 지구촌동포연대(KIN) 대표가 “묘 터만 남은 묘가 홀아비의 묘일 개연성이 많다”고 한 말이 떠올랐다. 이 사람들은 왜 이곳에 묻혀야 했을까.
일본은 1905년 러일전쟁에서 승리하자 사할린 섬 남부를 통치하고 1918년 사할린 섬 전역을 점령한 뒤, 1939년부터 ‘모집’ ‘관알선’ ‘징용’ 등의 이름으로 조선인을 사할린으로 보냈다. 본격적으로 탄전개발에 나서려는 의도였다. 그동안 이 지역은 노동력을 확보하기 어려워 제대로 개발하지 못했다. 조선총독부 재무국 자료에 따르면 1939~43년 1만6113명을 동원했으며, 업종별로 탄광업에 가장 많은 65%를 배치했다. 나머지는 토목건축(34%), 금속광산(1%)에 동원했다. 현지 동원과 누락분을 감안하면 실제로는 더 많은 사람이 동원됐을 것으로 추정된다.
하지만 조선인들은 1945년 8월 15일, 일본이 전쟁에 졌는데도 고향으로 돌아오지 못했다. 정부를 수립하지 못한 한국은 이들을 나 몰라라 했고, 일본은 조선인이 외국인이라며 책임을 회피했다. 게다가 소련은 노동력을 제공하는 조선인의 이탈을 허용하지 않았다. 일본인은 1946년 ‘소련 지역에서의 철수에 대한 미소협정’, 1956년 ‘일소 공동선언’에 따라 1950년대까지 대부분 고국으로 돌아갔다.
그러나 조선인은 어느 정부로부터도 보호받지 못한 채 사할린 땅에 버려졌다. 심지어 냉전시대에는 소련과 한국 정부의 교류가 전혀 없었다. 급기야 1977년 소련 정부는 한인들의 귀환 항의가 이어지자 주도자 40명을 체포해 밤중에 북한으로 압송하는 일까지 벌였고, 한인들은 망향의 한을 품고 살아가야 했다. 다행히 1990년 한국과 소련이 외교 관계를 맺었고, 1992년부터 영주귀국 사업을 시작해 3000여 명(2009년 현재)이 고국에 돌아올 수 있었다. 그럼에도 그 시절을 버티지 못한 사람은 죽어서 방치됐다.
과연 나흘이라는 짧은 일정 동안 홀아비의 행적을 찾을 수 있을까. 기초조사를 하려고 윤상철(65) 사할린한인노인협회 회장을 만났지만 그는 “어린 시절 돌린스크에 살면서 홀아비 70여 명을 봤다”고 증언하면서도 그들의 묘를 찾는 일에 회의를 보였다. 후손이 없는 사람들은 돈이 없어 나무 비를 세웠는데, 풍화작용으로 그마저 없어졌기 때문이다.
고심 끝에 민박집에 들러 짐을 풀고 주인 이춘자(64) 씨와 얘기를 나눴다. 그런데 뜻밖에도 그가 “아버지가 코르사코프에 함께 살다 죽은 홀아비 소식을 그 가족에게 전해주라면서 그들의 이름, 고향, 부고일자를 적은 장부를 만들어줬는데, 관련 일을 하는 사람에게 그 장부를 전해준 뒤로는 그 일이 어떻게 진행됐는지 몰라 안타까웠다”고 털어놓았다. 코르사코프는 조선인들이 고향으로 돌아갈 귀국선을 기다리던 항구도시로, 독신자들이 판잣집을 짓고 모여 살던 곳이다. 그는 사진을 꺼내 보이면서 특유의 단문으로 말을 이었다.
“탄광마을에 오지상(홀아비 아저씨)이 30명 정도 살았어. 아버지가 초상 치러준 사람이 28명. 오지상들이 월급 받으면 내게 오카시(과자)를 많이 사줬어. 자식이 내 나이일 거라고 했지. 언젠가 고향 갈 걸 생각하고 결혼 안 한 오지상도 있었어. 오지상들은 전쟁 끝나고 탄광에서 나와 건축 일을 했어. 밤낮 고국으로 돌아가고 싶다며 술로 살았지. 그렇게라도 하지 않았으면 죽었을 거야. 아저씨들은 묻혔어. 코르사코프 묘지를 찾아보면 있겠지.”
▲ 유즈노사할린스크에서 민박집을 운영하는 이춘자 씨가 보여준 홀아비 사진(동그라미 친 부분).
탄광 감옥에서 버틴 홀아비들
이튿날인 7월 3일 이수진(70) 사할린한인이산가족협회 명예회장의 차를 타고 유즈노사할린스크를 40분쯤 달렸을까. 브이코프한인회의 도움으로 브이코프(옛 나이부치) 탄광에서 일한 배용권(92) 씨를 만날 수 있었다. 무작정 찾아갔는데 다행히 그는 집에 있었다. 흙일로 굳은 손과 이 없는 잇몸에서 지난한 세월을 짐작할 수 있었다. 그는 1944년 사할린으로 와서 10년간 고향에 두고 온 아내를 그리워하며 생활하다가 1953년 ‘쏘련장개’(러시아 여성과 결혼)를 갔다.
“고향은 대구 공산면. 징용 안 갈려고 피해 댕겼는데, 경찰서에서 조사받은 아버지가 ‘이 일을 우에 되겠노, 니가 한 2년 가면 안 좋겠나’ 해서 행님 대신에 왔소. 원래 내 이름은 배태권이오. 행님은 얼라가 있다 보니까네 몬 갔고. 내는 장개를 갔지만 얼라가 없었거든. 짐 싣는 열차를 타고 180명이 왔고 우리 면에서 9명이 왔는데, 지금은 나만 남았소. 열흘도 더 걸려서 오니까네 조선인이 1000명이 있었지. 오다 보니 발이 퉁퉁 붓데요. 얼마나 추븐지 말도 마요. 내는 탄광에서 석탄 캤지. 천장에 말뚝을 박아 무너지지 않게 해야 하는데 바쁘니까 그냥 마구잡이로 쳐들어갔어. 그렇게 하니까네 (천장이 무너져) 두둑두둑 돌이 흘러 사람이 마이 죽었소. 3명이 하나가 돼 움직였지. 일본 사람들은 48년까지 있었어.”
그는 모국을 방문했을 때 재가한 아내를 만나 말없이 바라보기만 하다 돌아왔다면서 홀로 살던 동료 얘기로 화제를 돌렸다.
“일본 사람들이 1년 뒤 집에 보내준다고 캤는데 그렇게 안 돼 항의하니까네 ‘타코비아’라는 곳에 가뒀어. 말 안 듣는 30명 정도를 때리고 자기들 마음대로 부린 거라. 길게는 3년까지 있었지. 홀애비들이 거기 마이 살았어. 우리 면에서 끌려간 사람 중 얼라가 있는 김광생은 환갑도 안 돼 네벨스크에 묻혔지. 독배라도 타고 한국 가겠다고 하니까네 갈 수 있는가 싶었는데 몬 갔어. 한국에 가니까네 그이 가족이 ‘왜 아부지는 안 데리고 왔나’ 캤어.”
배 할아버지의 배웅을 받은 뒤 그가 일했던 브이코프 탄광을 찾았다. 지금은 폐허로 변했지만 한때는 이곳에서 조선인들이 돈을 벌었다. 하지만 그 돈을 만져보지도 못한 채 일본 우체국에 저금해 지금까지 찾지 못한 상태다. 그곳에 가서야 배 할아버지가 “월급이 당시 60, 70엔이었지만 밥값을 제하고 받은 50엔을 사할린 일본 우체국에 저금했는데 그 돈은 못 찾았다”고 말하면서 쓴웃음을 지은 이유를 알 수 있었다.
민박집으로 돌아온 기자는 다음 날 아침 이수진 회장과 함께 러시아인이 운전하는 봉고차를 타고 비포장도로를 서너 시간 달려 고르노자보츠크에 도착했다. 길이 험하기 때문에 다른 차를 빌려야 했다. 때마침 비가 내렸다. 밤배를 탄다는 정윤식(63) 씨를 만나러 가자 그가 아버지 친구인 남정규 씨의 묘를 돌보고 있다며 묘지로 가자고 했다. 그가 하늘을 가리키며 “하늘도 슬프다”고 중얼거렸다. 한국말을 잘 못하는 그를 대신해 마을 사람 강문수(67) 씨가 전한 사연은 이렇다.
“모국을 방문했을 때 남정규 씨의 아내 김순이 씨에게 묘지가 있다는 사실을 알려줬다. 그런데 그의 아들이 죽었기 때문인지 남편의 묘를 찾을 경제적 여력이 안 되는 듯했다. 1990년에 남정규 씨 며느리가 경북 선산군 선산읍 이문동으로 이사했다는 편지 한 통을 했을 뿐 그 뒤로는 아무런 소식이 없다. 남정규 아저씨는 아버지의 좋은 친구라서 기억난다.”
다시 2시간여를 달려 홈스크로 향했다. 홀아비를 기억하는 이쾌임(77) 할머니를 만나러 가는 길이었다. 그는 “친정아버지가 1943년에 들어왔지만 이후 가족동원 정책에 따라 다음 해 어머니, 오빠와 같이 들어와 아버지가 홀로 사는 걸 면했다”면서 “이곳에 오니까 아버지가 머윗대와 청어를 넣고 끓인 멀건 죽을 먹고 있었다”고 기억했다.
쪽배 타고 일본 가다 사망
“홀아비들이 많다 보니까 여자가 귀했지. 여자라고 하면 다 집어갈 판이오. 나도 15세 때 13세나 많은 독신 남자한테 시집갔지. 부모 대신, 형 대신 온 홀아비들은 고생 많았어. 일본에 쪽배라도 오는가 싶어 백사장에 하루 이틀도 아니고, 한두 달씩 마냥 기다렸지. 나중엔 그것도 못했어. 한국 사람들은 도중에 빠뜨린다고 하더라고. 일본 사람인 척하고 살아남은 조선인이 나중에 핀지를 해서 알았지. 그 소문 듣고 사람들이 싹 돌아갔어. 러시아 사람들이 회초리를 들고 와서 집에 가라고 무섭게 하니까 얼씬도 못 했지. 우리 주인(남편)도 그렇게 울면서 술로 살다가 45세에 잘못됐어.”
비포장도로를 덜컹거리며 반나절을 달려서일까. 차바퀴 하나가 형체가 없어질 정도로 찢어지는 바람에 바퀴를 교체하는 데 시간이 걸렸고, 민박집 주인이 살던 코르사코프에는 어둑해져서야 도착했다. 이런 길을 동포들은 어떻게 끌려왔던 것일까. 동포들이 고국을 그리워하며 앉아 있었다는 ‘망향의 언덕’에서 이태준(63) 한인디아스포라협회 회장을 만난 후 그가 돌보는 아버지 고향(경북 영천) 친구 이기우 씨의 묘를 찾아 나섰다. 하지만 동포들이 8월 15일 광복절에만 벌초를 해서인지 풀이 무성했고, 묘를 찾지 못해 한참을 서성였다.
우연일까. 기자 눈앞에 그의 묘가 거짓말처럼 서 있었다. 오랜 시간 조국에서 누군가가 찾아와 자신을 고향 품에 데려다주기를 바라는 것만 같았다. 그제야 사할린 곳곳을 취재하면서 수월하게 홀아비들의 사연을 접할 수 있었던 이유를 알 것 같았다.
아쉽게도 기자는 임병갑 씨의 행방을 러시아 한인사회와 함께 추적해봤지만 찾을 수 없었다. 다만 임씨가 살던 우글레고르스크의 최고령자 김인순(78) 씨로부터 “혼자 사는 분이야 많았지만 나는 제주에서 온 홀애비가 기억에 남는데, 그 양반은 술만 자시면 ‘정미야, 내가 니 애비다’ 하면서 울었다”는 증언만 들었을 뿐이다.
사할린에서의 마지막 날, 기자는 ‘러시아 사할린 우리말 방송국’에 들러 김춘자 방송국장을 만나 “함께 그의 발자취를 취재해보자”는 제안만 남긴 채 돌아왔다. 하지만 황계순 할머니가 생각났기에 한국으로 돌아오는 마음이 편치 않았다. 죽기 전 남편의 유해를 찾고 싶다는 황 할머니의 꿈을 우리 조국은 들어줄 수 있을까.
참고도서 : ‘조선 청년이여 황국 신민이 되어라’(서해문집) ‘사할린 강제동원 조선인들의 실태 및 귀환’(대일항쟁기 강제동원피해조사 및 국외강제동원 희생자 등 지원위원회)
6월 28일 서울 지하철 4호선 끝자락 오이도역(경기 시흥시 정왕동) 부근 아파트에서 딸 가족과 함께 사는 황계순(89) 할머니를 만났다. 충남 홍성군 홍북면 상하리에 살던 그는 임병갑(1920년생) 씨와 결혼했지만 남편이 1942년 사할린으로 간 뒤 시어머니와 시동생, 그리고 큰동서가 재가하며 두고 간 조카 3남매와 딸을 거두며 가장으로 살았다. 출가한 딸과 함께 살면서 손자들을 키우다 67세부터 17년 동안 막내 동생의 병원에서 도우미 노릇을 했고, 3년 전에야 이 자리로 돌아왔다. 그는 2시간 동안 진행한 인터뷰에서 끝내 남편과의 애틋한 추억은 공개하지 않았다. 그런데도 눈물이 그렁그렁한 그의 눈에서 그리움의 정도를 짐작할 수 있었다.
그의 손녀 홍재희(42) 씨는 6월 20, 22일 열린 일제강점기 강제징용 피해자 관련 세미나에서 질의자로 나서 “나를 키운 외할머니가 일제강점기에 사할린으로 간 남편의 생사도 모른 채 세월을 보내는 게 안타깝다”면서 “정부가 일제 강제징용 피해자 유골을 찾으려는 노력을 접으려는 것 같다”며 울먹였다.
생사도 모른 채 남편 기다려
국가가 버린 사람들. 러시아 사할린에는 일제강점기에 강제징용돼 결혼하지 않고 홀로 살면서 고향에 돌아갈 날만 손꼽아 기다리다 죽은 홀아비가 숱하다. 황 할머니의 남편 임병갑 씨도 그중 한 사람이다. 광복 당시 남사할린 거주 조선인은 4만3000여 명으로 그중 70%가 남자로 추정된다. 제2차 세계대전 막바지에 노무자들이 무차별적으로 동원됐다는 점을 감안하면 그 비율은 더 높을 것이다. 하지만 조국은 이들의 존재를 잊었다.
안타까운 것은 조국에 남은 가족이 가장 없이 살아온 탓에 경제적으로 여유롭지 않아 가장 찾는 일을 온전히 국가에 의탁할 수밖에 없다는 점이다. 실제로 먹고살기 바빴던 황 할머니가 남편을 찾으려고 들인 노력은 손녀딸이 한국에 영주 귀국한 러시아 동포를 찾아가 수소문해본 것이 전부다.
정부가 전혀 노력을 기울이지 않은 것은 아니다. 국무총리 소속 대일항쟁기 강제동원피해조사 및 국외강제동원 희생자 등 지원위원회(이하 위원회)가 2011년 러시아연방 사할린 주 유즈노사할린스크 제1공동묘지에 대해 전수조사하면서 일제 강제동원 피해자 유골 찾기 사업을 시작했다(박스기사 참조). 그러나 올해 말로 위원회 활동이 종료되기 때문에 사실상 유골 찾기 사업은 끝나는 셈이다. 결국 속 타는 건 유족이지만 힘없는 유족이 할 수 있는 일은 많지 않다.
7월 2일 기자는 황 할머니가 남편을 찾으려고 그토록 가고 싶었던 사할린을 단 3시간 만에 찾아갔다. 넓이 8만7100k㎡로 남한보다 조금 작은 러시아연방 사할린 주는 일본 홋카이도 바로 위에 자리한다. 주도(州都) 유즈노사할린스크에 들어서자 허름한 잿빛 건물이 드물게 나타났다. 사할린 전체 인구 67만여 명 가운데 80%가 러시아인이고 한국인은 5.4%를 차지한다는 통계를 뒷받침하듯 한국인으로 짐작되는 이들이 눈에 띄었다.
기자는 홀아비의 행적을 찾으려고 가장 먼저 유즈노사할린스크 제1공동묘지를 찾았다. 후손이 없는 이들의 묘는 한인 묘 가운데 ‘가장 버림받은’ 묘이자 ‘대한민국 정부가 나서지 않으면 누구도 돌보지 않을 묘’이기 때문이다. 사할린 묘는 묘 둘레를 철책으로 둘러친 것이 다를 뿐 영화에서 본 서양인 묘지와 비슷했다.
일제 강제징용 피해자 발굴 올해 종료
황계순 할머니가 ‘기다려달라’는 편지를 보낸 남편의 사진을 보고 있다.
일본은 1905년 러일전쟁에서 승리하자 사할린 섬 남부를 통치하고 1918년 사할린 섬 전역을 점령한 뒤, 1939년부터 ‘모집’ ‘관알선’ ‘징용’ 등의 이름으로 조선인을 사할린으로 보냈다. 본격적으로 탄전개발에 나서려는 의도였다. 그동안 이 지역은 노동력을 확보하기 어려워 제대로 개발하지 못했다. 조선총독부 재무국 자료에 따르면 1939~43년 1만6113명을 동원했으며, 업종별로 탄광업에 가장 많은 65%를 배치했다. 나머지는 토목건축(34%), 금속광산(1%)에 동원했다. 현지 동원과 누락분을 감안하면 실제로는 더 많은 사람이 동원됐을 것으로 추정된다.
하지만 조선인들은 1945년 8월 15일, 일본이 전쟁에 졌는데도 고향으로 돌아오지 못했다. 정부를 수립하지 못한 한국은 이들을 나 몰라라 했고, 일본은 조선인이 외국인이라며 책임을 회피했다. 게다가 소련은 노동력을 제공하는 조선인의 이탈을 허용하지 않았다. 일본인은 1946년 ‘소련 지역에서의 철수에 대한 미소협정’, 1956년 ‘일소 공동선언’에 따라 1950년대까지 대부분 고국으로 돌아갔다.
그러나 조선인은 어느 정부로부터도 보호받지 못한 채 사할린 땅에 버려졌다. 심지어 냉전시대에는 소련과 한국 정부의 교류가 전혀 없었다. 급기야 1977년 소련 정부는 한인들의 귀환 항의가 이어지자 주도자 40명을 체포해 밤중에 북한으로 압송하는 일까지 벌였고, 한인들은 망향의 한을 품고 살아가야 했다. 다행히 1990년 한국과 소련이 외교 관계를 맺었고, 1992년부터 영주귀국 사업을 시작해 3000여 명(2009년 현재)이 고국에 돌아올 수 있었다. 그럼에도 그 시절을 버티지 못한 사람은 죽어서 방치됐다.
과연 나흘이라는 짧은 일정 동안 홀아비의 행적을 찾을 수 있을까. 기초조사를 하려고 윤상철(65) 사할린한인노인협회 회장을 만났지만 그는 “어린 시절 돌린스크에 살면서 홀아비 70여 명을 봤다”고 증언하면서도 그들의 묘를 찾는 일에 회의를 보였다. 후손이 없는 사람들은 돈이 없어 나무 비를 세웠는데, 풍화작용으로 그마저 없어졌기 때문이다.
고심 끝에 민박집에 들러 짐을 풀고 주인 이춘자(64) 씨와 얘기를 나눴다. 그런데 뜻밖에도 그가 “아버지가 코르사코프에 함께 살다 죽은 홀아비 소식을 그 가족에게 전해주라면서 그들의 이름, 고향, 부고일자를 적은 장부를 만들어줬는데, 관련 일을 하는 사람에게 그 장부를 전해준 뒤로는 그 일이 어떻게 진행됐는지 몰라 안타까웠다”고 털어놓았다. 코르사코프는 조선인들이 고향으로 돌아갈 귀국선을 기다리던 항구도시로, 독신자들이 판잣집을 짓고 모여 살던 곳이다. 그는 사진을 꺼내 보이면서 특유의 단문으로 말을 이었다.
“탄광마을에 오지상(홀아비 아저씨)이 30명 정도 살았어. 아버지가 초상 치러준 사람이 28명. 오지상들이 월급 받으면 내게 오카시(과자)를 많이 사줬어. 자식이 내 나이일 거라고 했지. 언젠가 고향 갈 걸 생각하고 결혼 안 한 오지상도 있었어. 오지상들은 전쟁 끝나고 탄광에서 나와 건축 일을 했어. 밤낮 고국으로 돌아가고 싶다며 술로 살았지. 그렇게라도 하지 않았으면 죽었을 거야. 아저씨들은 묻혔어. 코르사코프 묘지를 찾아보면 있겠지.”
▲ 유즈노사할린스크에서 민박집을 운영하는 이춘자 씨가 보여준 홀아비 사진(동그라미 친 부분).
탄광 감옥에서 버틴 홀아비들
이튿날인 7월 3일 이수진(70) 사할린한인이산가족협회 명예회장의 차를 타고 유즈노사할린스크를 40분쯤 달렸을까. 브이코프한인회의 도움으로 브이코프(옛 나이부치) 탄광에서 일한 배용권(92) 씨를 만날 수 있었다. 무작정 찾아갔는데 다행히 그는 집에 있었다. 흙일로 굳은 손과 이 없는 잇몸에서 지난한 세월을 짐작할 수 있었다. 그는 1944년 사할린으로 와서 10년간 고향에 두고 온 아내를 그리워하며 생활하다가 1953년 ‘쏘련장개’(러시아 여성과 결혼)를 갔다.
“고향은 대구 공산면. 징용 안 갈려고 피해 댕겼는데, 경찰서에서 조사받은 아버지가 ‘이 일을 우에 되겠노, 니가 한 2년 가면 안 좋겠나’ 해서 행님 대신에 왔소. 원래 내 이름은 배태권이오. 행님은 얼라가 있다 보니까네 몬 갔고. 내는 장개를 갔지만 얼라가 없었거든. 짐 싣는 열차를 타고 180명이 왔고 우리 면에서 9명이 왔는데, 지금은 나만 남았소. 열흘도 더 걸려서 오니까네 조선인이 1000명이 있었지. 오다 보니 발이 퉁퉁 붓데요. 얼마나 추븐지 말도 마요. 내는 탄광에서 석탄 캤지. 천장에 말뚝을 박아 무너지지 않게 해야 하는데 바쁘니까 그냥 마구잡이로 쳐들어갔어. 그렇게 하니까네 (천장이 무너져) 두둑두둑 돌이 흘러 사람이 마이 죽었소. 3명이 하나가 돼 움직였지. 일본 사람들은 48년까지 있었어.”
그는 모국을 방문했을 때 재가한 아내를 만나 말없이 바라보기만 하다 돌아왔다면서 홀로 살던 동료 얘기로 화제를 돌렸다.
“일본 사람들이 1년 뒤 집에 보내준다고 캤는데 그렇게 안 돼 항의하니까네 ‘타코비아’라는 곳에 가뒀어. 말 안 듣는 30명 정도를 때리고 자기들 마음대로 부린 거라. 길게는 3년까지 있었지. 홀애비들이 거기 마이 살았어. 우리 면에서 끌려간 사람 중 얼라가 있는 김광생은 환갑도 안 돼 네벨스크에 묻혔지. 독배라도 타고 한국 가겠다고 하니까네 갈 수 있는가 싶었는데 몬 갔어. 한국에 가니까네 그이 가족이 ‘왜 아부지는 안 데리고 왔나’ 캤어.”
배 할아버지의 배웅을 받은 뒤 그가 일했던 브이코프 탄광을 찾았다. 지금은 폐허로 변했지만 한때는 이곳에서 조선인들이 돈을 벌었다. 하지만 그 돈을 만져보지도 못한 채 일본 우체국에 저금해 지금까지 찾지 못한 상태다. 그곳에 가서야 배 할아버지가 “월급이 당시 60, 70엔이었지만 밥값을 제하고 받은 50엔을 사할린 일본 우체국에 저금했는데 그 돈은 못 찾았다”고 말하면서 쓴웃음을 지은 이유를 알 수 있었다.
민박집으로 돌아온 기자는 다음 날 아침 이수진 회장과 함께 러시아인이 운전하는 봉고차를 타고 비포장도로를 서너 시간 달려 고르노자보츠크에 도착했다. 길이 험하기 때문에 다른 차를 빌려야 했다. 때마침 비가 내렸다. 밤배를 탄다는 정윤식(63) 씨를 만나러 가자 그가 아버지 친구인 남정규 씨의 묘를 돌보고 있다며 묘지로 가자고 했다. 그가 하늘을 가리키며 “하늘도 슬프다”고 중얼거렸다. 한국말을 잘 못하는 그를 대신해 마을 사람 강문수(67) 씨가 전한 사연은 이렇다.
“모국을 방문했을 때 남정규 씨의 아내 김순이 씨에게 묘지가 있다는 사실을 알려줬다. 그런데 그의 아들이 죽었기 때문인지 남편의 묘를 찾을 경제적 여력이 안 되는 듯했다. 1990년에 남정규 씨 며느리가 경북 선산군 선산읍 이문동으로 이사했다는 편지 한 통을 했을 뿐 그 뒤로는 아무런 소식이 없다. 남정규 아저씨는 아버지의 좋은 친구라서 기억난다.”
다시 2시간여를 달려 홈스크로 향했다. 홀아비를 기억하는 이쾌임(77) 할머니를 만나러 가는 길이었다. 그는 “친정아버지가 1943년에 들어왔지만 이후 가족동원 정책에 따라 다음 해 어머니, 오빠와 같이 들어와 아버지가 홀로 사는 걸 면했다”면서 “이곳에 오니까 아버지가 머윗대와 청어를 넣고 끓인 멀건 죽을 먹고 있었다”고 기억했다.
쪽배 타고 일본 가다 사망
고르노자보츠크에서 아버지 친구인 남정규 씨의 묘를 돌보는 정윤식 씨.
비포장도로를 덜컹거리며 반나절을 달려서일까. 차바퀴 하나가 형체가 없어질 정도로 찢어지는 바람에 바퀴를 교체하는 데 시간이 걸렸고, 민박집 주인이 살던 코르사코프에는 어둑해져서야 도착했다. 이런 길을 동포들은 어떻게 끌려왔던 것일까. 동포들이 고국을 그리워하며 앉아 있었다는 ‘망향의 언덕’에서 이태준(63) 한인디아스포라협회 회장을 만난 후 그가 돌보는 아버지 고향(경북 영천) 친구 이기우 씨의 묘를 찾아 나섰다. 하지만 동포들이 8월 15일 광복절에만 벌초를 해서인지 풀이 무성했고, 묘를 찾지 못해 한참을 서성였다.
우연일까. 기자 눈앞에 그의 묘가 거짓말처럼 서 있었다. 오랜 시간 조국에서 누군가가 찾아와 자신을 고향 품에 데려다주기를 바라는 것만 같았다. 그제야 사할린 곳곳을 취재하면서 수월하게 홀아비들의 사연을 접할 수 있었던 이유를 알 것 같았다.
아쉽게도 기자는 임병갑 씨의 행방을 러시아 한인사회와 함께 추적해봤지만 찾을 수 없었다. 다만 임씨가 살던 우글레고르스크의 최고령자 김인순(78) 씨로부터 “혼자 사는 분이야 많았지만 나는 제주에서 온 홀애비가 기억에 남는데, 그 양반은 술만 자시면 ‘정미야, 내가 니 애비다’ 하면서 울었다”는 증언만 들었을 뿐이다.
사할린에서의 마지막 날, 기자는 ‘러시아 사할린 우리말 방송국’에 들러 김춘자 방송국장을 만나 “함께 그의 발자취를 취재해보자”는 제안만 남긴 채 돌아왔다. 하지만 황계순 할머니가 생각났기에 한국으로 돌아오는 마음이 편치 않았다. 죽기 전 남편의 유해를 찾고 싶다는 황 할머니의 꿈을 우리 조국은 들어줄 수 있을까.
|
참고도서 : ‘조선 청년이여 황국 신민이 되어라’(서해문집) ‘사할린 강제동원 조선인들의 실태 및 귀환’(대일항쟁기 강제동원피해조사 및 국외강제동원 희생자 등 지원위원회)